#75화.
주말이었고, 오랜만에 강진과 함께 쉬는 날이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지음은 환해지는 방에 스르르 눈을 떴다.
몇 시나 됐을까.
강진은 요 며칠 새벽까지 일이 많아 피곤했는지 지음의 뒤척임에도 깨지 않고 옆에서 자고 있었다.
지음은 얇은 이불보를 당겨 가슴을 가린 채로 몸을 일으켰다.
지음이 그의 집으로 들어온 이후 강진이 지음보다 늦게 일어나는 건 처음 보는 듯했다.
푹 자고 있는 그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훤칠한 이마에 긴 속눈썹, 높은 콧날에 깎아놓은 듯한 턱선. 거기에 뜨거운 입술.......’
손가락으로 멀찍이 강진의 얼굴을 허공에 새기듯 그려보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가 참 많이도 그리울 것 같았다.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해지자 지음은 그를 깨우지 않으려고 최대한 고양이 걸음을 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젯밤도 그와 몸의 대화를 나누느라 걸치고 있는 옷이 없어 지음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집어 들었다.
문을 열고 혹시 그가 깨진 않았나 다시 돌아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살금살금 거실로 나온 지음이 들고 온 옷을 소파 위에 걸쳐두고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와서 주방으로 향하던 그녀가 계단 옆, 가장 안쪽에 위치한 방에 시선을 두었다.
‘저긴...... 뭐지?’
처음 왔을 때 집을 소개하면서도 열어주지 않았던 방문이고, 몇 달을 함께 살면서도 지음 역시 열어보지 않았다.
그땐 이 집과 강진에 관해서 관심이 없어서였을까.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지음은 문득 밀려드는 호기심을 참을 길이 없었다.
잠시 고요한 안방 문을 보던 지음은 닫힌 문으로 향했다.
“그래, 잠겨 있으면 그냥 깔끔하게 돌아서는 거야.......”
그런 생각으로 손잡이를 잡았는데.
“어? 열렸......다.”
지음이 안으로 들어가 방을 살펴보았는데, 마치 작은 화방 같았다. 거창하진 않았지만 개인이 작업하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이젤이며 하얀 캔버스에 갖가지 그림 도구들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와...... 이게 다 뭐지. 강진 씨, 그림...... 그리나?”
한 번도 취미에 관해 대화를 나눠본 적 없다 보니 알 기회가 없긴 했다.
방 곳곳엔 그림이 완성된 캔버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지음은 홀리듯 방 안으로 들어가 캔버스와 도구들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까슬까슬 손가락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천천히 둘러보던 지음은 방 가장 깊숙한 곳에 놓인 캔버스를 보고 멈칫했다.
다른 것들과 다르게 흰색의 천으로 덮여 있었다.
하지만 보지 말라고 하면 더 보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
지음이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가 천에 손을 대는데 뒤에서 문이 열렸다.
“여기서 뭐 해?”
“아......!”
놀란 지음이 얼른 손을 거둬들이고 돌아봤다.
바지만 입은 강진이 문을 열고 지음을 보며 서 있었다.
“미안......해요. 그냥 궁금해서.......”
강진은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지음이 얼른 그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우리 형이...... 그린 그림이야.”
“형이요?”
그에게서 처음 듣는 얘기였다.
강진이 이젤 앞에 의자에 앉아, 그 앞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손으로 의자를 툭툭 치자 지음이 그곳에 앉았다.
“형은 그림을 좋아했어. 보는 거, 그리는 거, 만지는 거, 상상하는 거. 그림과 관련된 것 전부.”
형이 좋아한다는 그림에 대한 얘길 하고 있지만, 지음은 그가 형을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림이 참...... 예뻐요.”
강진의 형이 그렸다는 그림엔 시골 풍경, 자연에 대한 그림이 많았다.
지음은 저도 모르게 옆에 놓인 캔버스 풍경을 쓰다듬었다.
“너무 멋있네요, 하늘이. 나도 한 번 그려보고 싶.......”
“응? 뭐라고 했어, 방금?”
지음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강진이 물었다.
“아, 그림...... 이거 너무 멋있다고요.”
뭔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게 어색해서 지음이 얼른 말을 돌렸다.
“......그래.”
강진이 지음의 머리를 푸스스 쓰다듬고는 몸을 일으켰다.
“나가자. 오늘 식사하기로 한 날이잖아.”
그의 말에 지음이 몸을 일으켜 강진을 따라 나가며 방을 한 번 더 돌아봤다.
***
잠시 후 지음이 강진과 함께 향한 곳은 호텔 안이었다.
그곳엔 할아버지와 고모 차이란, 동기와 박미림, 창국과 정후. 동희와 희라까지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에 와서 지음이 알게 된 사람은 다 모인 듯했다.
연회를 하기엔 좀 작은 홀이었지만, 많지 않은 인원이었기에 밥 한 끼 하기에는 훌륭한 곳이었다.
긴장한 탓일까. 테이블 아래 무릎에 올려둔 손이 살짝 떨렸다.
“왜? 어디 불편해?”
그녀의 모습을 보던 강진이 지음의 귀에 속삭였다.
“......아뇨, 그냥 좀. 긴장했나 봐요, 괜찮아요.”
“긴장할 거 없어. 내가 당신 옆에 있잖아.”
강진이 지음의 손을 한 번 꼭 잡아 주었다.
그의 체온이 손으로 전해지는 순간, 놀랍게도 거짓말처럼 떨림이 멎었다.
‘이런 순간들이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걱정이 됐지만, 우선 오늘의 식사 자리를 무사히 넘기는 게 지음의 가장 큰 목표였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건너마다 이라와 동기, 미림이 한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다음엔 창국과 정후 동희, 희라가 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할아버지가 지음을 보며 주름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조촐하게 사람을 맞게 되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할아버님.”
그녀가 지금까지 밥을 먹었던 곳 중에 가장 화려한 장소였기에 긴장하고 있던 지음은 얼른 대답했다.
“더 빨리 이런 자리를 가졌어야 하는데 그동안 다들 일이 많았다. 사고도 나고. 몸은 괜찮은 거냐?”
“네, 걱정해주신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구나.”
할아버지의 손짓에 호텔 매니저가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동안 여러 사람의 시선이 지음을 향했다.
그 중엔 창국의 눈빛도 눈에 띄었다. 미림의 옆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가끔 씁쓸한 눈빛을 지음에게 보내기도 했다.
물론 희라와 미림의 기분 나쁜 듯한 표정도 잘 보였다.
음식은 맛있었지만 굉장히 불편하고, 어색하면서도 강진이 있어서 든든한 자리였다.
‘이렇게 묘한...... 식사 자리라니.’
지음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 견딜 만했지, 아니었다면 꽤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란 역시 강진 곁에 있는 지음을 더 참아주기 힘들다는 듯 식사 시간이 끝나자마자 할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갔다.
동기는 어느 틈엔가 빠져나갔고. 정후는 일 때문에 먼저 자리를 비웠다. 가는 길에 희라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남겠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 동떨어져 있던 동희는 이런 자리가 지음만큼 불편한데다, 지음에게 있는 강진 같은 존재마저 없어서인지 꼭 체한 것처럼 보였는지, 신경을 쓴 정후가 나가는 길에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나갔다.
잠시 후, 지음은 강진과 함께 남아 있는 사람들과 차를 마셨다. 창국의 옆에는 미림이, 지음은 강진의 곁에, 그리고...... 희라.
그녀 역시 표정은 굉장히 불편해 보였지만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게 강진을 향한 희라의 짝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쓰러운 마음도 들어서 지음이 슬쩍 희라를 보았다.
지음과 강진이 계약으로 얽힌 가짜 관계라는 걸 알면 얼마나 좋아할까.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허전한 걸까.’
괜히 입 안이 써서 지음이 고개를 숙이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림아, 혹시 주위에 초보자가 그림 배울 만한 선생님 있으면 추천 좀 해 봐. 쉽게 가르칠 수 있는 분으로.”
“그림? 웬 그림이요? 오빠 그림 그리게?”
“그건 알 거 없고. 너 미대 나왔으니까 한번 알아봐 달라고.”
평소에 부탁 같은 건 하지 않는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미림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요. 내가 한번 알아볼게.”
그녀가 기껍게 받아들이자, 강진이 이번엔 창국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두 분, 잘 만나고 있습니까?”
“......아, 뭐.......”
차를 마시고 있던 창국이 당황한 듯 강진과 지음을 번갈아 보며 간신히 대답했다.
“왜요? 아닙니까? 일전에 선본다고 했잖습니까.”
“.......”
그날이었다. 3층 전시실을 청소하겠다는 지음을 굳이 따라 올라가 도우려 했다가 지음도 창국도, 입장이 난처하게 됐던 날.
창국은 강진이 무슨 뜻으로 그날 일을 꺼냈는지 알 수가 없어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다행히 옆에 있던 미림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날부터 만나고 있어. 그러니까 오늘도 같이 왔지.”
창국으로선 오늘 이 자리에 온 건 강진과의 친분을 등에 업고 지음을 한 번 더 보기 위해서였지만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잠자코 있었다.
강진이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창국에게 말했다.
“그럼 IO 호텔 파티엔 같이 볼 수 있겠군요.”
미림이 뭐라 말을 얹으려는데, 그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던 아니, 온갖 못마땅하고 분하고, 서러운 표정을 하고 있던 희라가 벌떡 일어났다.
끼이익, 의자가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희라에게 쏟아졌다. 단 한 사람, 희라가 그토록 바라는 강진의 시선만 빼고.
그 바람에 희라는 더욱 꼴이 우스워졌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이만 가......봐야겠.......”
희라는 떨리는 목소리로 차마 가야겠다는 말조차 끝내지 못하고 서둘러 가방을 들고 나가버렸다.
“뭐야, 희라 언니....... 왜 저래?”
미림이 분위기 망쳤다는 듯 희라를 살짝 노려보았다.
강진은 그다지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이만 일어나죠.”
***
어색하고도 불편한 식사 자리가 완전히 끝나자, 지음은 강진의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창국은 강진의 차가 사라지는 걸 끝까지 보고 있다가 미림의 채근에 못 이겨 발길을 돌렸다.
그러다 창국이 멈칫,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초보자가 그림 배울 만한 선생님 있으면 소개해 봐.」
강진이 그 말을 할 때 분명 지음을 슬쩍 바라본 것도 같았다.
창국의 머릿속에 실낱같은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왜요? 왜 안 가, 오빠?”
창국은 팔짱을 끼는 미림을 떼어놓고 그녀를 보았다.
“미림아, 혹시.......”
“응?”
“혹시 그 선생님 말이야, 아까 강진이가 말한 그림 가르칠 만한.”
“그게 왜?”
창국은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닫지 못했는지 뭐에 홀린 것처럼 미림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