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비가 내리는 저녁, 강진은 회사까지 차를 모는 동안 불안했다.
한지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미련한지 아니까.”
강진이 쾅 운전대를 쳤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도 연락을 해야 했었다.
어딜 가면 간다, 언제까진 오겠다, 그러니 기다려라.
그랬어야 했다, 지금까지 겪어온 한지음을 생각했어야 했다.
강진의 한숨이 깊어졌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회사로 뛰어 올라갔다.
급히 사무실로 가 봤지만 자리엔 아무도 없었고, 어두운 사무실 안, 책상 밑에서 전화만 울리고 있었다.
강진이 휴대전화를 꺼내 보았다.
온정리에 가기 전에 보냈던 메시지도 확인하지 못한, 지음의 것이 맞았다.
“미치겠네, 정말.”
가방이 없는 걸 보면 전화를 잊은 채 나간 게 분명한데, 어디로 사라진 걸까.
그러다 강진은 최근 그녀가 전시회에 관심이 많다는 걸 떠올리고 전시실로 향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복도를 가로질러 마구 뛰어가다가 문득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가을비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곧장 전시실로 향하려던 강진은 묘한 이끌림 때문에 창가로 발길을 돌렸다.
“어딜 간 거야, 한지음.......”
비는 잘도 내리고 있었다.
강진이 비가 내리는 밖을 보고 있다가 멈칫했다.
“......어? 한......지음?”
밖에, 창밖으로 지음이 비를 다 맞으며 길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었다.
커다란 가방을 들어 올려 머리를 가릴 생각도 않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
“바보같이 저 비를 다 맞고! 저 여자가 대체......!”
강진이 다급하게 밖으로 뛰어나갔다.
부디 밖에서 미련하게 비를 다 맞고 서 있는 여자가 지음이 아니기를 바라며.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잘못 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할 때 자리를 피하려고 들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음은 옷이 흠뻑 젖어가는데도 비를 피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정신은 어디에다 두고 있는지 모르게 멍한 얼굴을 하고.
“온다고 했......으니까.”
서서 비를 맞고 있으니 제 처지를 더 실감할 것만 같았다.
강진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잘라내지 않으면 평생 이런 꼴이 될 거라는.
닿지 않는 연락에 목매며 그를 기다리고, 그와 지음이 만나는 걸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에게 치이고.
지금처럼 이렇게 혼자 비를 맞고.
그런데도 단호하게 돌아서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혹시 강진이 자신에게 올까 싶어서. 부족할 게 하나 없는 차강진이라는 남자이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걸 알면 올까 싶어서.
지음이 입 안으로 들어가는 빗물을 막아보려고 입술을 꼭 무는데, 빗소리를 뚫고 그녀의 귓가로 들리는 발소리에 고갤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화가 잔뜩 난 채 비를 맞으며 다가오는 사람은 강진이었다.
“한지음!”
“강진 씨? 왜 비를.......”
그의 흰색 셔츠가 비에 다 젖어가고 있었다.
우산도 없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 강진의 손이 지음의 양팔을 꽉 붙잡았다.
“아......!”
안 그래도 차가워진 몸에 그 힘이 세게 느껴져 통증이 일자, 지음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당신, 왜 여기 이러고 있어!”
“강진 씨 기다리고 있.......”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비에 젖은 강진의 얼굴은 꼭 우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을 기다렸다고 말하기도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지음 대신 강진이 폭발했다.
“내가 오늘 일이 있다고 들어가라고 했잖아! 대체 왜 메시지는 보지도 않고 연락도 안 하는 건데?”
지음은 그제야 어렴풋이 짐작했던 게 맞는구나, 싶었다.
희라를 자극한 대가로 그녀가 지음에게 지독하면서도 짓궂은 장난을 했다는 걸 알았다.
‘바보 같아, 한지음. 이런다고 강진 씨가 날.......’
받아줄까. 비를 맞으면서 한지음, 이름을 부르며 달려와 준 것처럼 자신을 보아줄까.
지음은 그럴 일은 그녀의 인생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계약, 그 1년이라는 시간에 충실한 것일 뿐.
‘그는 그런 사람이니까.’
강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있는 힘을 다해 입꼬리를 끌어올려 미소를 지었다. 빗물 때문에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분간이 잘되지 않겠지만.
“......그냥 강진 씨, 기다리느라고요.”
“.......”
다음 순간 지음은 강진의 뜨거운 품 안에 안겨 있었다.
그가 작은 지음의 몸을 으스러지라 안았다.
“왜 이렇게...... 당신은.......”
강진이 눈을 꼭 감았다.
지음의 몸에 떨어지는 비를 그의 등으로 대신 맞아줄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녀가 더는 아프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가 떨리는 입술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왜 이렇게 바보 같아, 당신은. 앞으론 비도 맞지 말고.......”
지음이 강진의 목소릴 들으며 눈을 감았다.
“누구한테도 맞......지 말고. 맞지도......말고.......”
그가 끝말만을 반복했다. 비를 맞았다고 떨릴 남자가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몸이 떨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음이 강진의 품에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강진 씨?”
“아무 일 없어. 당신을 찾았으니까, 만났으니까...... 됐어.”
지음은 그 길로 강진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다 젖어 덜덜 떨렸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웠다.
비가 오는 날 연락도 닿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느라 몇 시간을 허비하는 모습, 남들이 보면 세상 미련한 짓이겠지만 지음에겐 괜찮은 일이었다.
그녀가 살아온 인생에서 고작해야 비를 맞는 일은 숱하게 일어났던 일이었고, 찬 바닥에 혼자 쓰러져서 울지도 못했던 날들이 수도 없이 많았으니까.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그녀의 곁을 지켜준 건 차디찬 바람과 흙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음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한 거실로 들어서며 강진을 힐끔 올려다봤다.
비록 이 편안함이 1년 후엔 끝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그와의 계약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탁. 거실에 불이 켜졌다.
지음의 몸에선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그건 강진도 마찬가지였다.
강진이 지음을 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비를 맞고서도 멋있을 수 있는 남자, 차강진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현실이 아닌 것 같아서.
혹시 1년의 세월이 전부 꿈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강진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나직한 그의 목소리에 지음의 몸이 움직였다.
그의 체취가 느껴질 만큼 다가서자 강진이 지음을 당겨 안았다.
이번엔 아주...... 포근하고 부드러웠다.
“한지음, 내가...... 뭘 좀 물어볼 건데 사실대로 얘기해도 좋고...... 너무 괴로우면 말하지 않아도 좋아. 그럼 내가 알아서 알아들을 테니까.”
“......?”
“혹시 당신.......”
무슨 어려운 말이기에 강진이 이리 고민을 하는 걸까. 지음이 의아해하는데 그가 이내 고갤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그러나 강진은 그녀에게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정말 양아버지라는 작자가 아직도 이토록 여린 당신을 때리고 학대하고, 종국에는 당신의 가느다란 손목으로 돌을 들어 휘두르게까지 했냐고.
진실이라면 어쩔 텐가. 어린 자녀를 학대하고도 그 작자는 벌도 받지 않고 누워있는데.......
할 수만 있다면 강진은 그 옛날 지음의 기억을 깨끗하게 지워놓고 싶었다.
“강진...... 읍!”
강진을 부르려는 지음의 외침은 그의 숨결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강진이 차가운 지음의 얼굴을 감싸 쥐고 키스를 퍼부었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입술을 핥다가 깨물고 치아를 두드렸다.
지음은 축축하게 젖은 강진의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비에 젖어서 그런지 그의 체취가 더욱 향하게 밀려들었다.
그는 향기마저도 관능적이고 단단했다. 어설픈 풋내기인 지음과 달리.
“읏.”
아랫입술을 세게 물자 아릿한 통증에 지음의 몸이 휘청했다.
강진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받쳐 안고 소파 옆, 러그가 깔린 바닥에 눕혔다. 간신히 떨어진 입술 사이로 숨을 몰아쉬는 지음을 보며 강진은 젖어서 무거워진 재킷을 벗어 던졌다.
비 맞은 셔츠가 그의 가슴 갈라진 근육을 따라 달라붙었다. 지음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느새 그의 품에 안기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씨, 씻어야 하는데요.......”
강진은 벗은 옷을 거실 한구석으로 던져버리고 지음의 몸 위로 올라타듯 앉았다.
그녀의 옷에 달린 단추를 툭툭 풀고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에 입술을 대고 핥았다.
이렇게라도 그녀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만 있다면. 그래서 지음의 아픈 과거를 지워버릴 수만 있다면.......
“강진 씨.......”
그의 입술이 불길 같았다. 닿은 살갗이 뜨거워 녹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때도 그랬어, 우리.”
강진이 고개를 들어 양팔로 지음을 가두고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 해에도 당신은...... 씻어야 한다고 했고.”
“강진 씨는 괜찮다고 했죠.”
“그래.......”
그때, 오늘처럼 비가 오던 날.
강진의 손길에 무너져 그에게 자신을 허락했던 그때도 그랬다.
강진은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걸까.
형과 형수를 잃고 약해진 마음으로, 충동적으로 지음을 안았을 텐데.
지음이 입술을 잘근거리며 강진을 올려다봤다. 강진 역시 그녀를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봤다.
그의 몸을 지탱하고 있던 오른팔을 거두고는 비를 맞고 들어왔음에도 따뜻한 손가락으로 지음의 이마와 콧날, 볼과 턱을 그리듯 쓰다듬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음의 입술에 닿았다.
“......예쁘다, 한지음.”
“보고 싶었어요.”
지음은 저도 모르게 강진에게 제 마음을 불쑥 고백해 버렸다.
당황하며 물러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그런 마음에 곱게 휜 지음의 눈썹이 일그러지는데, 강진이 지음의 말을 따라 했다.
“보고 싶었어, 한지음.......”
꿈인가 싶을 만큼 달콤한 그의 목소리가 얼굴로 쏟아졌다.
‘눈물이.......’
주책스럽게도 지음은 눈물이 차올라 눈을 마구 깜빡였다.
눈물 때문에 강진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걸 참을 수 없어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아......!”
당황하는 지음을 보던 강진이 그녀의 눈물을 핥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술을 올려 지음의 눈두덩에 입을 맞췄다.
“울지 마. 울지...... 말자.”
지음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진이 몸을 일으켰다.
강진은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놀란 지음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강진은 그대로 성큼성큼 욕실 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