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무슨 사...... 아, 그때 온정리에서 빗길에 낸 사고?”
조심성 없는 동기의 말에 이란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란의 기세가 사납고 눈초리가 매서웠는지 동기가 한발 물러났다.
“그게 언제 일인데...... 갑자기 그건 왜?”
“글쎄! 있어, 없어?”
“어, 그거...... 그거 뭐 여기 어디 있을 건데.”
동기는 이란이 그냥 하는 말 같지 않자 눈치를 보다 얼른 서랍장을 뒤졌다.
그가 한참 여기저기 찾아보는 걸 보고도 이란은 그 자리에 서서 동기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에이, 씨...... 어디에다 둔 거야.”
“너는 그걸 지금 말이라고......! 차라리 폐기를 해 버리든지 할 것이지. 쯧쯧.”
“폐차할 때 가져왔는데.......”
고급 외제 차였다, 국내에 몇 대 없는.
비가 오는 날이었다, 파티에 들렀다가 술도 두어 잔 한 채로 달렸다.
서울에서 전주까지, 그러다 다시 강원도엘 갔다가 경기도로 향했던가. 하도 정신이 없어서 어딜 가려고 했는지, 어느 길로 들어섰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빗길에 피로와 취기가 한꺼번에 올라오니 어질어질했다. 몇 번이나 차가 중앙선을 넘어 휘청거렸고, 그때마다 구역질을 했다.
그때 멈췄어야 했지만 동기는 사람도, 차도 없는 이런 시골길에서 무슨 일이 있겠냐 싶었다.
그 오만이 그리 큰 사고를 낼 줄은 꿈에도 모르고.......
한참 서랍을 뒤지던 동기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일어났다.
“찾았다! 에이, 서랍 뒤로 빠졌었네. 어쩐지 서랍이 안 닫힌다 했다.”
그 말을 듣던 이란이 눈에 형형한 불을 켜고 다가와 동기의 손에서 잡아채듯 USB를 가져갔다.
“아...... 깜짝이야. 엄마, 왜.......”
“넌 이런 걸 그렇게 아무 데나 두면 어떻게 해!”
“......그럼 어쩌라고. 내가 폐차할 때 그냥 같이 버리자니까 그것도 싫다고 하고. 그냥 엄마가 가지고 있든가.”
“이거 좀 틀어봐, 뭣 좀 확인하게.”
동기는 이란에게서 블랙박스 영상이 담긴 USB를 받아들고 리더기에 끼웠다.
“여기서...... 바로 듣게?”
“맞는지 확인해야 할 거 아냐. 틀어봐, 어서.”
이란의 재촉에 못 이겨 동기가 영상을 틀었다.
***
이란에게 내쫓기듯 밖으로 나간 유린은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아니 그렇게 느끼도록 한참 걸어간 뒤, 도로 사무실 앞으로 다가섰다. 이번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마치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선 유린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붉은색의 버튼을 하나 눌렀다. 그러고는 블루투스를 귀에 꽂은 채 숨을 죽였다.
“......그냥 문밖에서 들었다간 하나도 못 들을 뻔했다. 생각보다 방음이 잘 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유린은 열심히 녹음되고 있는 휴대전화를 보았다.
한참을 듣던 유린이 굽혔던 허리를 펴고 몸을 일으켰다.
귀에서 블루투스를 빼 들고 녹음 중지 버튼을 누르는 유린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녀가 곱게 화장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그런 짓을 했어, 박동기? 차이란......? 흥....... 진짜 무서운 게 없는 사람들이네.”
그녀가 닫힌 문을 슬쩍 보다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고 조심스럽게 회사 밖으로 향했다.
“몇 년을 참은 보람이 있네.”
얼른 그동안의 기록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그녀였다.
***
지음이 희라의 심부름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회의가 오래 걸릴 거라던 희라가 그녀보다 먼저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 따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지음은 담담하게 희라에게 다가갔다.
“서류는 잘 전달했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가 봐.”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자리로 돌아간 지음이 팸플릿 시안과 기획안을 정리하는데 이번엔 희라가 지음의 자리로 왔다.
“지음 씨.”
희라는 지음의 책상 위에 자료를 올려놓았다. 그러느라 책상 끝에 아슬아슬 걸려있단 지음의 휴대전화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떨어진 휴대전화를 보며 희라는 흥, 코웃음을 치고 지음에게 말했다.
“이것 좀 복사해 와. 회의 자료니까, 음...... 15부씩? 그 정도면 되겠다.”
“알겠습니다.”
지음이 하고 있던 일을 멈추고 그녀가 건넨 자료를 들고 가려는데, 희라가 덧붙여 말했다.
“아 참, 근데 보니까 복사 용지가 없더라. 비품실 가서 좀 가져와야겠는데?”
비품실에는 굳이 가지 않아도 괜찮았다. 전화로 요청만 하면 보통 몇 시간 내로 가져다주는 건 희라가 더 잘 알고 있는 거였다.
“비품실에 연락.......”
“지음 씨? 내가 이따 받을 거면 이렇게 자기한테 시키겠어? 지금 하라니까?”
“......알겠습니다.”
지음은 요즘 들어 부쩍 짜증이 심한 희라에게 더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급히 나오느라 휴대전화를 또 두고 나왔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꽤 오래 걸렸다.
지음이 사무실을 나가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진 휴대전화에 진동이 울렸다.
“......뭐야?”
남의 휴대전화이고 어디서 연락이 왔든 그녀가 신경 쓸 바는 아니었지만 궁금했다.
자존심이 허락지 않아 발길을 돌리려던 희라는 반짝이는 휴대전화를 보며 인상을 쓰다가 팔을 뻗었다.
“메시지 감추는 법도 모르고, 비밀번호 걸어둘 줄도 모르네 얘는.......”
희라는 괜히 메시지를 보는 자신을 합리화하려고 중얼거렸다.
[오늘 늦어, 기다리지 말고 먼저 들어가]
“.......”
지음에게 메시지를 보낸 상대는 강진이었다.
희라는 제가 받아야 할 메시지를 뺏긴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순 없어서 분하기까지 했다.
창밖으로 어둑해지는 날씨를 보고는 얼른 앱으로 날씨 확인을 했다.
“저녁부터...... 비? 그으래......?”
습도도 높고 짜증 지수가 올라오는 게 정말 비가 올 것 같긴 했다.
고민하던 희라가 휴대전화의 버튼을 눌렀다.
삭제 버튼을 누르고는 휴대전화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이게...... 제자리지.”
생각보다 소리가 커서 주위를 얼른 살펴보던 그녀는 발끝으로 휴대전화를 툭 밀었다.
매끄러운 기계가 책상 밑으로 쏙 들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지음은 어쩔 수 없이 비품실에서 복사 용지를 가지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대강 정리를 하고 복사를 마쳤다.
서류를 챙겨 희라에게 향했는데, 희라는 미림과 같이 서서 뭔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게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기에 신경 쓰지 않고 지음이 복사한 자료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 했어?”
“네.”
“지음 씨, 아후...... 정리를 좀 깔끔하게 해. 이게 뭐야?”
지음은 미림의 핀잔에 얼른 서류를 착착 세워서 정리했다.
미림의 말이 끝났으니 희라의 2절이 시작되어야 했지만 그녀는 이어지는 핀잔 대신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아, 맞다, 지음 씨. 내가 바빠서 깜빡했네. 아까...... 대표님한테 잘 전해 드렸어.”
“아...... 네, 감사합니다.”
“오늘 회의가 워낙 많았잖아. 나한테 대신 전해달라고 하던데.”
“......네?”
희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따 퇴근하고 아트갤러리랑 문화센터 중간, 알지? 거기...... 사무실 잘 보이는 곳. 거기서 기다리래.”
“......?”
아트갤러리와 문화센터의 중간 지점이라면......, 그냥 산책로 중앙이었다. 휑한 공간.
희라 말처럼 건물도 뭣도 아무것도 없어서 사무실이 잘 올려다보이고, 사무실에서도 잘 내려다보이는 곳.
“왜?”
말을 듣고도 지음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하고 멀뚱거리며 서 있자, 희라가 눈썹을 삐쭉 올렸다.
“아...... 좀.......”
이상해서요.
하지만 지음은 마지막 말은 삼키고 다시 물었다.
“아트갤러리...... 앞이 아니고요?”
“응. 아니고, 그 사이. 공터처럼 트여있는 공간 있잖아, 거기. 알지? 거기서 좀 기다리래.”
“.......”
‘왜요?’는 강진에게 물어야 할 말이었다.
“아, 그리고 좀 늦을 수도 있대. 외근 갔다가 올 수도 있고. 암튼, 그래도 뭐...... 최소한 엇갈리진 않을 테니까.”
이상했다. 전화를 하면 될 걸 왜 엇갈린다는 건지.
하지만 어디서 언제 만나자, 말을...... 티켓도 받았으면서 이렇게 희라를 통해 말을 전하는 걸 보면 전화도 하지 못할 만큼 바쁜 건가 싶고.
그렇더라면 다른 날을 잡아서 가보자고 하면 될 것이지 굳이...... 싶기도 했다.
지음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난 분명...... 전했다?”
“......네.”
“가 봐. 우린 자료 좀 봐야겠으니까.”
희라의 말이 끝나자 지음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자리에 채 발길이 닿기도 전에 미림이 손짓을 했다.
“아, 지음 씨, 탕비실 엉망이더라.”
결국 지음은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숨을 쉬곤 탕비실로 향했다.
탕비실을 정리하면서 내내,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는 강진이 서운했고, 그런 마음을 갖는 자신이 낯설어서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
강진은 강진 나름대로 심란했다.
온정리로 내려가면서 메시지를 보내놓고 속력을 올렸다.
빨리 가야 얼른 해결하고 돌아올 테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우리가 대화를 안 했지.’
그동안 지음과 함께 지내고 계절 하나가 지나갔는데...... 뭐가 그리 바쁘다고 서로 이마를 맞대고 앉아 얘기할 시간도 없었나.
매번 그녀를 보면 몸이 먼저 동해서 그랬을까.......
핑계를 대 보는 강진이었다.
얼마나 집중해서 달렸는지 금방 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강진은 병원 앞에 차를 대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곤 급한 마음에 아까 지음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던져둔 휴대전화는 그대로 보조석 위에 두고 내리고 말았다.
강진은 차를 잠그고 병원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