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오랜만의 출근으로 지음은 매일같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희라와 미림의 보조를 하느라.
잠시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희라가 자리를 비워 숨을 돌리던 지음은 아트센터 일정을 확인하다가 마우스를 잡은 손을 멈칫했다.
[고향]이라는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향?”
지음이 의자에 천천히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고향이 지음에게 그리 썩 행복하기만 한 기억을 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가족과 연결할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기에.
그 단어를 보는 지음의 마음이 묘했다.
전시회 주제가 고향이라니 어쩐지 따뜻하고 푸근할 것만 같았다.
‘강진 씨도 좋아할까.......’
지음은 문득 강진과 함께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고민하던 지음이 인쇄한 티켓 두 장을 가지고 일어났다.
강진이야 대표니까 이런 티켓 따위가 무슨 상관있겠나 싶었지만 강진이 그랬던 것처럼 해 보고 싶었다.
아주 사소한 것, 그래서 나중에 바람에 슬쩍 날려버릴 수 있을 기억들. 이를테면 그를 떠올리며 준비한 전시회 티켓 같은 걸 챙겨주는 일.
그런 생각을 하며 강진의 사무실로 향하는데 회의실에서 나오던 희라와 마주쳤다.
“......어디 가, 지음 씨?”
“아...... 그게.......”
지음이 희라의 뒤쪽에 시선을 두자, 희라가 뒤를 돌아봤다.
‘이 길이 끝나는 곳에 있는 건 대표실뿐인데......?’
지음은 희라의 눈이 가늘어지자 얼른 티켓을 뒤로 했다. 너무 늦어버려서 소용없었지만.
희라가 사냥감을 노리듯 그녈 향해 서서히 다가섰다.
“대표실에 가려고 했나봐?”
“그게.......”
희라가 짝다리를 짚고 서서 한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리고 나머지 손을 지음의 앞에 내밀었다.
“그 뒤에 감춘 거 뭐야? 줘 봐.”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잖아. 대체 뭘 감췄기에 그래? 이리 줘 봐.”
티켓 이까짓게 뭐라고. 지음은 괜히 티켓을 들고 왔나, 괜히 대표실로 향했나, 그냥 메시지 한 통이면 좋았을 걸 후회가 됐다.
그러는 사이 지척까지 다가온 희라가 우악스럽게 지음의 팔을 붙잡고 앞으로 향하도록 했다.
“아......!”
희라의 시선이 지음의 흰 손가락 사이 걸려있는 티켓에 멈췄다.
탁!
얼마나 빠른지. 지음은 희라가 움직이는 걸 보지도 못했는데 어느 순간 티켓이 그녀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 아니, 티켓의 거의 대부분이.
“.......”
지음의 손끝에 남아 있는 티켓의 찢어진 조각.
어쩐지 제 마음이 찢긴 것 같았다. 강진을 위해, 그와 함께하기 위해 준비한 티켓인데.......
지음의 마음을 알 리 없는 희라가 눈썹을 한껏 올리고 목소릴 높였다.
“뭐야? 지음 씨...... 지금 대표님, 아니 아니 강진 씨랑 여기 가겠다고 들고 온 거야?”
“.......”
지음은 손에 들린 찢긴 조각을 보며 별다른 답을 하지 않았다.
희라는 마치 속에 용광로가 들어앉은 듯 불이 훅훅 이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강진과 회사일 외에 다른 걸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지음의 행동이 몹시 거슬렸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앞으로 다가서 따귀라도 갈기고 싶었지만.......
화를 눌러 참느라 희라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하긴 뭐...... 이런 거 봐 두면 좋지, 살면서 이런 걸 볼 기회나 있었겠어? 잔심부름이라도 하려면 자주 봐야 하는 것도 맞지.”
“.......”
“근데 지금 대표님 회의 중이셔. 가도 만날 수 없을 거야. 빨리 끝날 일은 아니라서.”
지음은 그녀의 말이 사실일까 생각하며 손을 내밀었다.
“네, 알겠습니다. 티켓은...... 집에서 줄 걸 그랬어요, 강진 씨한테. 주세요, 앞으론 회사 말고 집에서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지음의 말에 희라의 얼굴이 더 엉망이 되었다. 씰룩대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는 척을 하며 말했다.
“아, 이거?”
희라가 팔을 위로 쭉 뻗어 티켓을 올렸다.
“이건...... 이건 내가 대표님께 전해줄게, 지음 씨가 준 거라고 하면서. 어차피 나도 다시 회의 들어가야 하거든.”
“......아뇨, 괜찮습니다. 그렇게 번거롭게 수고하실 필요 없어요, 제가.......”
지음이 손을 내밀었지만 희라는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내가 전해준다니까? 아 참.”
그러더니 다른 손으로 들고 있던 자료를 지음에게 내밀었다.
“이거 마케팅팀 실장님한테 좀 가져다드려, 오전 내내 바쁘게 찾으셨어.”
“아.......”
“난 다시 회의 들어가 봐야 하거든. 자료 때문에 급히 나온 건데 지음 씨 만났으니 다행이다. 알았지?”
“......네.”
“그래, 어서 가 봐.”
희라는 네가 돌아서서 대표실에서 멀어지는 걸 꼭 봐야겠다는 얼굴로 버티고 서 있었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지음은 자료를 받아들고 발걸음을 돌렸다. 괜히 그녀를 자극한 게 더 독이 된 것 같기도 했다.
희라는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서서 노려보고 있었다.
지음이 그곳을 떠나자 희라가 그제야 코웃음을 쳤다.
“웃기고 있네. 티켓은 뭐야, 대체....... 진짜. 대표님한테 무슨 티켓이야. 그리고 제까짓 게, 나 참 어이가 없어서.”
희라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손에 들고 있던 티켓을 박박 찢었다.
코팅된 종이이지만 악에 받친 희라의 손힘을 이기진 못했다.
그녀가 한참이나 툴툴거리며 티켓을 찢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서 뭐 합니까, 김 실장님?”
소스라치게 놀란 희라가 뒤를 돌아봤다. 회의실에서 나온 강진이었다.
“아...... 대표님. 아무...... 아무것도 아니에요.”
희라는 얼른 갈기갈기 찢긴 티켓을 뒤로 하고 방긋 웃었다.
강진은 희라가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그러려니 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대표실로 막 들어온 찰나,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
강진은 자리에 채 앉지 못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건 상대는 지음의 양어머니 민자였다.
-여기, 온정리예요.
“......네.”
-그...... 병원비가.......
병원비라면 일전에 지음이를 찾으러 온정리로 내려갔을 때 차고 넘치게 주고 왔는데 또 부족하다는 말인가.
강진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이랬으니 한지음이 힘들었겠지.’
제게도 서슴없이 돈을 요구하는 사람이니 지음에겐 오죽했겠는가.
민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것도 그렇고 아휴...... 뭐 요샌 다 힘들잖아요. 우리같이 없이 사는 사람이야 더하면 더했지. 그래서 말인데...... 내가 한번 올라가 보는 건 어떨까 하는데. 아니 뭐 그래도 딸자식인데 지음이 사는 것도 좀 봐 두는 게 좋겠고.......
강진은 민자의 목소릴 흘려들으며 동희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지음의 양부모가 지음에게 썩 좋은 부모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끝내 지음이 양부모에게 왜 그렇게 치를 떠는지, 혼자 힘으로 먹고살기도 힘들었을 텐데 왜 양부모의 병원비를 그녀가 책임지고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귓가를 괴롭히는 민자의 말을 끊고 강진이 말했다.
“됐습니다. 번거로우실 테니 제가 가죠.”
-번거롭기는요. 내가 가서 우리 지음이 사는 것도 좀 보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그 사람이 사는 게 궁금하신 것도 아니실 텐데.”
-네? 아니, 무슨 그런.......
“지금, 가겠습니다.”
강진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온정리로 향하기 위해.
***
이란은 며칠 전부터 온 집을 뒤지느라 바빴다.
“대체 어디에 뒀더라.......”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금고는 물론이고 서랍장, 화장대 등등 아무리 뒤져도 그녀가 찾는 건 보이질 않았다.
그러다 뭔가 떠올라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이란은 정 비서의 차에 올라 동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그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동기야. ......응?”
대표실에 혼자 있을 거라는 생각에 문을 열었는데 안에는 아들과 함께 웬 여자도 함께 있었다.
동기는 의자에, 여자는 테이블 위에 앉아 둘이 노닥거리는 꼴이 가관이었다.
이란이 들이닥치자 놀라는 동기와 달리 여자는 천천히 일어나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란의 눈이 가자미 눈처럼 가늘어졌다.
“사무실에서...... 뭐 하는 거야?”
“아 깜짝이야....... 그렇게 갑자기 문을 열면 어떻게 해, 엄마는.”
“지랄한다. 뭐 하는 건데, 사무실에서? 누구야?”
동기를 한번 흘겨본 이란의 눈길이 유린에게 향했다.
“안녕하세요, 민유린이에요.”
“내 안녕은 신경 쓸 거 없고. 대표실에서 지금 뭐 하는 거니? 처음 보는 앤데. 신입이야?”
“아, 얘는 괜찮아. 나랑 오래 알고 지냈어.”
이란의 목소리가 날카롭다는 걸 느낀 동기가 끼어들었다.
이란은 동기의 대답조차 못마땅한지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분명 경고 했지? 이런 애들이랑 적당히 놀고 말라고.”
그녀의 말에 유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내 그녀가 하, 코웃음을 치고 가방을 들었다.
“사람 앞에 두고 무시하시는 거, 진짜 잘하시네요?”
“뭐......라고? 너 지금...... 그거 나한테 한 말이니?”
“네. 여기 아줌마 말고 나 무시한 사람 또 있어요?”
“이게 미쳤나, 진짜......!”
유린의 대꾸에 열이 훅 오른 이란이 당장에라도 그녀의 얼굴을 뜯어놓을 것처럼 다가서자, 중간에 동기가 이란을 막아섰다.
“아, 엄마. 엄마, 왜 그래.”
“너 저리 안 비켜?”
하지만 아무리 이란일지라도 동기의 힘을 당해낼 순 없었다. 동기가 이란을 잠시 붙들었다가 유린에게 몸을 돌려 다가서서 그녀의 손을 잡는데, 유린은 매몰차게도 그 손을 뿌리쳤다.
“오늘은 동기 씨 얼굴 더 보고 싶지 않아요. 가야겠어요.”
“어어? 저거 좀 봐?”
유린이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녀를 못마땅하게 보던 이란이 유린을 향해 다시 손을 뻗었다.
“에헤이, 엄마도 참.”
재빨리 동기가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옷이 뜯어지든 머리가 뜯기든, 일이 터졌을 거다.
“야, 어디가!”
이란이 동기를 노려보며 유린을 향해 소리를 질렀지만, 그녀는 문을 닫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랑 얘기해. 나 보러 온 거 아니야, 엄마?”
“휴....... 하여간 어울리는 여자들 수준하고는.”
이란이 동기를 보며 혀를 쯧쯧 차다가 숨을 골랐다.
“너, 그때 블랙박스 영상 어딨어?”
“무슨 블박? 갑자기 찾아와서 무슨 엉뚱한 소리야?”
동기의 말에 이란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때 그 사고 말야, 사고!”
“무슨 사...... 아, 뭐...... 그때 온정리에서 빗길에 낸 사고?”
조심성 없는 동기의 말에 이란이 그를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