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지음...... 씨? 지음 씨 맞죠?”
“......?”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지음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창국의 부드러운 미소가 담겼다. 그는 꼭...... 우유가 듬뿍 들어간 라떼 같았다.
지음은 커피도 잘 마시지 않으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우스워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가볍게 웃었다.
“지음 씨 맞구나! 아니면 어떻게 하나 했어요.”
창국이 지음의 손에 들린 대걸레를 슬쩍 보는 게 느껴졌다.
지음이 손을 살며시 뒤로 하고 그를 올려다봤다.
“근데 선생님이 여긴 왜......? 어떻게 오셨어요?”
“아, 이거 보러 왔어요.”
창국이 손가락으로 패널을 가리켰다. 전시회를 보러 온 모양이었다.
“지음...... 씨는요?”
“아...... 전 청소하러 왔어요, 직원이잖아요.”
“청소요?”
창국이 아직 전시를 하고 있는 전시회와 지음을 번갈아 봤다.
전시가 끝난 것도 아닌데 무슨 청소를 한다는 건지.
창국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직 전시회도 안 끝났는데.”
“아 여기 말고...... 3층 전시실이요. 곧 새로운 전시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저 넓은 데를 지음 씨 혼자요? 청소하시는 분은 어디 가시고 지음 씨가 청소를 해요?”
지음이 걸레와 양동이를 챙겨 들고 계단이 있는 곳으로 몸을 틀었다.
서서 그런 얘기까지 구구절절할 수 없었으니까.
“......보시고 가세요. 저는 할 일이 있어서요.”
“아.......”
“그럼, 안녕히 가세요.”
무언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창국을 보며 지음이 얼른 인사를 하고 계단으로 향했다.
지음이 뒷모습을 보이고도 잠시 더 고민을 하던 창국은 이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음 씨!”
“......?”
“아무래도 오늘 청소는 저랑 같이 하셔야겠어요.”
창국이 지음이 든 양동이와 걸레를 붙잡았다.
“아, 아니에요! 저 혼자 할 수 있고, 직원도 아닌 분한테 맡길 수는 없어요.”
“그런 게 어딨습니까. 같이 해요. 그래야 빨리 끝나죠. 자, 가요.”
“.......”
지음은 들고 있는 걸 뺏겨서 허전해진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얼른 창국을 따라 걸었다.
“여기 맞죠? 우와, 넓다. 역시 지음 씨 혼자는 힘들 거 같지 않아요? 제가 도와야 일찍 끝나지.”
“넓긴 하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전시회 보러 오셨다면서요. 이건 제 일.......”
“그래도 제가 본 이상 도와드려야겠습니다. 어떻게 그냥 지음 씨만 두고 가요.”
지음은 분주하게 청소 준비를 하는 창국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
일을 마친 강진은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지음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 않았다.
“......별다른 얘기 못 들었는데.”
오늘은 강진 역시도 오랜만에 회의가 없는 날이어서 함께 퇴근할 생각이었다.
강진은 사무실 밖으로 나가다가 정후와 마주쳤다.
“혹시 한지음 씨 못 봤어, 박 비서?”
“지음 씨요? 아, 글쎄요. 못 봤는데...... 기획팀 퇴근하지 않았을까요?”
정후의 말에 강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연락하는 법을 좀...... 가르쳐야겠군.”
“네? 아.......”
강진은 변한 제 모습에 놀라워하는 정후의 어깨를 툭툭 가볍게 두드리고는 기획팀 사무실로 향했다.
불은 켜져 있었다.
들어가 보니 지음의 가방이 자리에 놓여있었다.
물론 받지 않았던 휴대전화도 책상 위에 있었고.
“아직 퇴근은 안 했는데.......”
그런데 어딜 간 걸까.
강진은 사무실에도 탕비실에도 보이지 않는 지음을 눈으로 찾다가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아직 가방과 휴대전화가 자리에 있으니 회사를 나가지는 않았을 거고.
희라와 미림이 퇴근을 하며 또 엉뚱한 일을 시켜 괴롭히는 건 아닌가, 슬슬 걱정이 됐다.
그녀를 찾느라 돌아다니던 강진의 발걸음이 어느새 전시실 앞까지 닿았다.
“전시회를...... 보러 갔나.”
자신과 함께 보았을 때, 나름 여유를 가지고 그녀의 걸음을 따라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부족했던 게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으로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전시회가 끝날 시간이라서 사람 하나 없이 한적했다.
잠시 고민하던 강진이 전시실로 들어서려는데, 저쪽에서 힐을 신은 미림의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어......? 강진 오빠?”
한껏 멋을 낸 차림이었다.
색이 고운 원피스에 출근해서 일을 하기엔 다소 불편해 보이는 신발까지.
“오빠 아직...... 퇴근 안 했어요?”
“넌 퇴근한 거 아냐? 왜 다시 왔어?”
강진이 오늘 출근했을 때와 달라진 미림의 옷차림과 화장을 보며 물었다.
“아 그게.......”
잠시 고민하던 미림이 한숨을 내뱉고 말했다.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 숨길 필요가 없었다.
“사실 여기서 선볼 사람을...... 만나기로 했어.”
“선? 선을...... 여기서 보기로 했어?”
레스토랑도 아니고 카페도 아니고, 미술관에서......?
강진은 신개념 선 자리인가 싶어 미림을 보았다.
“응. 사실...... 창국 오빠랑 선봐.”
미림은 강진의 어리둥절한 눈빛이 상대를 묻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얼른 이실직고를 하듯 말했다.
“아......!”
“창국 오빠 알지? 오빠도.”
“.......”
모를 리가. 지음과 얽히는 일로 얼마나 짜증을 냈었는데.
“선 약속 잡았는데 전시회를 보자고 해서 앞에서 만나기로 했어.”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왜 혼자야?”
“그러게. 분명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안 보이네? 오빤 못 봤어?”
미림에게 무어라 대답을 하려는데 위층에서 쿵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이 위층을 올려다봤다.
“무슨 소리지?”
“무슨 소리?”
“3전시실에서 나는 소리 같은데. 우리 아직 전시 시작 안 하지 않았나?”
“어? 다음 주나 되어야....... 오빠가 잘못 들었겠죠.”
“아냐,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어.”
강진은 다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는 3전시실로 고갤 들었다.
혹시 사무실이나 탕비실, 회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지음이 그곳에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도 않은 전시실에, 미술관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을 막내 계약사원이 혼자 돌아다닐 리는 없고.
만약 저 희미한 발소리와 소란스러움의 근원이 지음이라면 그녀에게 그곳에 올라가라고 시킨 건...... 희림이거나 미림이거나 아니면 둘 다이거나.
강진의 입이 꾹 다물어지고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표정이 싸늘해지는 걸 느낀 미림이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분명 한지음을 건드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며 도가 넘는 말까지 했던 강진이었다.
“또, 너야? 박미림? 아니면 김희라 실장인가?”
“오, 오빠, 그게 아니라.......”
“내가 분명 경고했을 텐데? 말로는 부족했나 보지?”
“아니...... 그게.......”
물론 직원에게 청소를 지시하는 정도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하필 그게 직원들이 청소를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고 그 상대가 한지음이라는 게 미림을 떨게 했다.
‘뭐야, 정말. 아직도 청소를 다 못 끝낸 거야? 진짜 한지음, 일생에 도움이 안 돼.’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강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3층 전시실로 성큼성큼 뛰어 올라갔다.
미림은 그를 막지도 못하고 다리를 달달 떨다가 다 들통이 나기 전에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얼른 강진을 따라 올랐다.
학창 시절을 제외하고 강진이 계단을 세 칸씩 뛰어오르긴 처음이었다.
“하아, 하.”
계단을 뛰어오르며 아무 일도 아니길 얼마나 빌었는지 모른다.
그 짧은 시간에 주먹을 쥔 손에 땀이 나고 숨을 몰아쉴 만큼 긴장을 했다, 어쩐지 전시실로 가면 무슨 일인가 벌어져 있을 것만 같아서.
그리고 왜 이런 기분 나쁜 예감은 비껴가질 않는 걸까.
아무도 없이 텅 비었어야 할 3전시실에서 강진의 눈에 들어온 건 지음이었다.
거기까지였다면 화가 나지 않았겠지, 그녀를 찾기 위해 회사안을 헤매고 다녔으니까.
하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건 지음과 그녈 보고 웃고 있는 창국의 모습이었다.
둘은 어울리지도 않게 긴 대걸레를 들고 전시실 바닥을 닦고 있었다.
“.......”
강진을 먼저 본 건 창국이었다. 애틋하게 웃던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스르르 걷혔다.
“아.......”
창국의 표정이 굳는 걸 보고 지음 역시 강진이 서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강진...... 씨?”
강진의 뒤로 미림의 모습도 들어왔다.
“여기서 뭐 합니까, 한지음 씨?”
“아...... 청소하고 있었어요. 곧 전시도 할 거고.......”
화가 치밀었다. 청소가 아니라 그녀가 뭘 하고 있었어도 강진은 화가 났을 거다.
청소는 그녀가 할 일이 아니었지만, 강진이 화가 난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하필이면 왜 창국과 여기서 이러고 있었던 건지.
강진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는 지음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국을 보았다.
“형도 지우 아트갤러리 전시기획팀 직원입니까?”
“......강진아.”
“그래서 지금...... 그 막내 직원과 청소라도 하고 있는 겁니까!”
텅 빈 전시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그 기세에 모두가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음 역시 입을 다물고 있자, 창국이 한 발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그게...... 강진아, 사실.......”
“그게 아니면, 선볼 상대는 바람맞히고 왜...... 내 여자 옆에 있는 건데.”
“.......”
뭐라고 변명이라도 할 생각이었던 창국조차도 그 말에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강진은 창국에게 시선을 한번 두었다가 지음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잡고 전시실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큰 보폭으로 걷는 강진의 등이 너무도 강인해 보여서, 고집스러워 보여서 남겨진 창국과 미림은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지음에게 설명하지 못할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어서 창국은 오늘의 일이 착잡하고 마음이 쓰렸다.
마찬가지로 미림이 창백해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가 다가오는 걸 보며 창국은 간신히 감정을 추슬렀다.
“전시는 아무래도 오늘 보긴 글렀네요. 저녁이나...... 먹으러 갈까요?”
미림이 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갤 끄덕이자, 창국은 한숨을 쉬며 강진과 지음이 사라진 곳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