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병원에서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동희는 지음을 힐끔거렸다. 꼭 무슨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뭔데?”
“응?”
“왜 그렇게 사람을 몰래 보냐고. 할 말 있어?”
“아니 그게, 사실...... 아주머니가.......”
그가 망설이며 말을 꺼내자, 지음은 왜 그렇게 동희가 머뭇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응. 왜, 돈 달래?”
“아니, 돈 얘긴 이번엔 안 했어. 그냥...... 너 잘사냐고 물었어.”
“뭐?”
“음, 지음이 너 밥은 먹고 다니냐, 잘 지내고 있냐...... 그러면서 안부 물었어.”
‘언제부터 그런 걸 챙겼다고.’
지음이 눈을 찌푸렸다.
“그래서...... 돈은? 병원비 얘기는 없어? 뭐 언제 달라, 그런 얘기.”
“어? 그러고 보니 없던데?”
어째서 없지?
지금까지 민자가 단 한 번이라도 지음의 안부, 걱정...... 돈을 제외한 다른 걸 궁금해한 적은 없었으니까.
코웃음을 치던 지음이 멈칫했다.
“혹시.......”
지음이 민자를 만나러 갔던 그 날, 강진이 연락되지 않는 지음을 데리러 왔던 그 밤, 차 안에서 강진과 민자가 서 있는 모습을 보았다.
강진의 차 안, 그 안전하고 따뜻한 곳에서 강진의 든든한 뒷모습이 민자를 가로막아 서서 얘기하고 있는 걸 보았다.
‘혹시 그때 강진 씨랑 무슨 얘길 한 건...... 아닐까?’
민자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법했다.
강진과 지음이 어떻게든 묶여있다는 걸 알았고, 그가 돈 많은 남자라는 것도 알았을 테니 그냥 넘어갔을 리는 없는데.
“응? 왜, 지음아?”
“아...... 아무것도 아니야. 몰라도 돼, 넌.”
그렇다고 강진이 아무런 말이 없는데 먼저 물어볼 수도 없어서 일단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자신이 오해한 걸 수도 있으니까. 분명 그날 돈...... 주고 왔으니까.
동희를 보내고 집으로 들어간 지음은 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이제는 희미해진 이마의 상처를 살피다 샤워를 하고 나왔다. 나와서는 옷을 갈아입으며 다리의 상처도 살펴봤다.
“이마는 찢어지고 다리엔 금이 가질 않나....... 무슨 일이 이렇게 연달아 일어나냐.”
하긴 그중에 무엇도 강진과의 계약 결혼보다 놀랍진 않을 테지만.
지음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단정한 원피스를 입었다.
예전 같으면 티셔츠에 청바지가 편했을 텐데, 언제부턴가 원피스나 투피스도 꽤 어색하지 않게 입을 수 있었다.
고작 몇 달뿐이었는데....... 역시 사람의 적응력은 무시무시했다.
그 때, 동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음아, 오후엔 어디 안 나가?]
[응, 괜찮아.]
간단히 답을 보내고 밖으로 나섰다.
옷은 익숙해졌지만 아직 기사니 차니...... 그런 것까진 익숙해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음은 동희를 부르지 않고 혼자 버스에 올랐다.
다행히 버스 노선이 복잡하지 않아 금방 회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음은 버스에서 내려 전시회장 앞으로 천천히 걸었다.
강진이 주었던 티켓을 꺼내 보았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여름] 이라는 제목의 전시회였다.
지난번 강진과 함께 보려다 결국 그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던.
지음은 전시회 제목이 주는 묘한 느낌이 좋아 입술을 움직여 나직이 발음해 보았다.
“사랑, 이별, 그리고.......”
“무슨 얘기해, 혼자?”
“아......!”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강진이 서 있었다.
훤칠한 모습으로 시원스레 미소를 지으며 서 있는 그는 가슴 떨리게 멋있었다.
지음이 얼른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아, 아무...... 아무것도 아녜요. 언제 왔어요?”
“방금. 들어갈까?”
조금 일찍 왔고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리 금방 나타난 걸까.
지음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의문이었지만, 사실 강진에겐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지음이 오기 전부터 밖을 내다보고 있었으니까.
한지음이 언제쯤 도착할까.
언제쯤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약속이 있다고 해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초조했던 적은 없었는데.
강진은 제 손에 잡힌 지음의 차갑고 작은 손을 슬쩍 내려다보며 피식 미소를 지었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자 지난번에 보았던 패널과 시 등이 보였다.
강진은 지음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걸었다.
“그림이나 사진 전시회 할 때 올 걸 그랬나? 이번 전시회는 만화가 주제라.......”
강진의 말에 지음이 그를 돌아봤다.
“아녜요. 좋아요, 이것도.”
“......그래.”
좋아요, 강진 씨도.
지음의 목소리가 그렇게 들리는 마법에 걸린 것 같았다.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았다.
지음은 따뜻한 강진의 손을 잡고 걷는 게 좋았다.
온갖 몸의 감각이 그에게 몰려 있어서 전시회를 무슨 정신으로 보고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덕분에 전시 패널을 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집중이 잘되지 않아서.......
강진은 지음의 걸음이 느릿해지는 게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하진 못하는 듯했다.
“그림 좋아하면 다음에 또 오자. 당신이 이렇게 전시회를 좋아하는 줄 몰랐다.”
“......네.”
그림보다 강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이 더 좋았지만, 그건.......
지음이 강진을 슬쩍 올려다봤다.
‘그건 계약 위반이니까.’
***
이란이 소파에 앉아 사진과 이력서 따위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만 있어 보자.”
미림은 씻고 나오면서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눌렀다. 그러다가 이란이 앞에 죽 늘어놓은 사진을 보며 폴짝 뛰어 소파에 올랐다.
“엄마 뭐 해? 아까부터.”
“어, 잘 왔다, 너. 이리 앉아봐.”
“왜, 뭔데?”
미림의 눈에 들어온 건 남자들의 사진이었다. 집안은 어떻고, 학력이 어떻고...... 자질구레한 내역까지 쫙 뽑혀 있었다.
“너 선 볼 사람 명단.”
“아, 엄마! 뭐야! 나 싫다니까.”
“싫기는!”
이란은 미림이 그러거나 말거나 살펴보고 있는데, 싫다던 미림이 테이블에 놓인 사진 중에 하나를 탁 집어 들었다.
“어, 이 사람......?”
“누군데? 아는 사람이야?”
이란이 미림이 들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창국이었다.
“어, 그래. 권 선생이네.”
“누구?”
“의사잖아, 지선 병원.”
“지음이 주치의였던...... 아 뭐야, 민준 오빠 친구 아니었어?”
“왜 아니야. 너도 봤지? 우리 창사 기념일 파티에도 왔었고. 안면도 있고 얼마나 좋아. 어때?”
“......이름이 뭐지?”
“권창국. 왜? 언제는 싫다더니?”
이란의 놀리는 듯한 말에 미림이 입술을 삐쭉거렸다.
“누...... 누가 싫대? 그리고 뭐 딱히 좋지도 않거든? 그냥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거지.”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연락 한번 해 보자.”
이란이 사진을 내려놓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미림은 조용히 사진을 든 채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
지음의 마음도 모르고 어느덧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그녀가 회사에 출근하게 되었다.
오래도록 쉬다가 나온 터라 희라와 미림은 지음이 눈엣가시처럼 미웠는지 아침부터 툴툴거렸다.
“세상에 전시회 일정은 급한데...... 놀러 다니니, 회사를? 이렇게 급한데 도대체 회사에 다니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아니, 우리가 사정을 언제까지 봐줘야 해요? 뭐 여기에 사정없는 사람도 있나? 지만 다쳤나.......”
미림 역시 옆에서 툴툴거렸다.
그도 그럴 게 미림도 지음과 함께 사고를 당했지만, 그녀는 퇴원하자마자 출근을 했다. 몇 주나 쉬고 나온 지음과 달리.
그리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게 진짜 이유였지만, 미림으로서는 지음이 혜택을 보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지음은 그녀들의 그런 태도야 예상했던 터라 새삼스럽게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저 고개 한 번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조용히 반성하는 것처럼 보여야 금방 끝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걸로 끝나지 않고 희라와 미림은 하루 종일 지음을 괴롭혔다. 덕분에 그녀는 자리에 앉아 잠시 쉴 틈도 없었다.
그래도 지음은 묵묵히 제 할 일을 했다.
점심시간에도 그들은 지음을 없는 사람 취급을 하며 끼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편했기에 지음은 군말 없이 일을 마치고 혼자 점심을 먹었다.
복귀 첫날부터 일을 바쁘게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어느 정도 일이 마무리가 되고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는데, 희라가 가방을 들고 지음의 자리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이번엔 또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그녀의 곁으로 미림도 와서 섰다.
“......?”
“인쇄소 가서 팸플릿 오늘 받아다 놓고 퇴근해.”
“아...... 그거 내일 인쇄소에서 직접 가져다주신다고.......”
“지음 씨, 내가 우스워? 가져다 놓으라면 그럴 것이지 무슨 말이 많아?”
“그게 아니라, ......네, 알겠습니다.”
내일 가져다주겠다는 팸플릿을 왜 굳이 차도 없는 자신이 가야 하는 것인지.
그건 그냥 지음이 이 두 여자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한 벌이었고, 지음도 그것을 짐작했기에 두 번 말 않고 알겠다고 했다.
그제야 희라와 미림이 흡족하다는 얼굴로 사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
혼자 남은 지음이 한숨을 내쉬는데, 닫힌 문을 열고 미림이 다시 얼굴만 빼꼼 디밀었다.
“아 참, 한지음.”
“네?”
“다음 주부터 2전시관에 전시 들어오는 거 알지?”
2전시관이라면.......
“아, 3층이요?”
“그래, 거기.”
“네...... 압니다. 다음 주에 사진 전시.......”
“그래, 그거. 그걸 내가 모르겠니?”
“.......”
“오늘 거기도 청소 좀 하고 가. 부탁할게, 한지음 씨.”
“알겠.......”
그러겠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미림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
인쇄소에 가서 팸플릿 시안을 낑낑거리며, 내일 가져다드릴 텐데 굳이 오셨냐는 말을 들으며 사무실로 가져온 지음은 청소도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걸레와 마른걸레를 전부 챙겨서 전시회장으로 올라가는데 강진과 보았던 전시회가 1층에서 진행 중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날.......’
지음은 3층으로 바로 오르지 못하고 전시회 패널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강진과 함께 걷던 길, 그가 잡았던 손.......
아무것도 아닌 듯했지만 나중엔 추억이 될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거리는데,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어...... 지음 씨?”
“......?”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지음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