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5화. (66/94)

#65화.

“뭔......데, 오빠?”

미림은 어쩐지 강진의 눈빛이 매섭고 무서워서 멈칫했다.

“네 블랙박스 영상. 차는 폐차시켰는데 이건 남아있더군. 운 좋게 건져왔어.”

“......!”

“지음이가 착한 척을 해? 운전 매너도 모르고 소란스러웠고, 그래서 사고가 났어? 내가 보고 들은 영상은 다른 말을 하던데.”

“그, 그건.......”

미림이 눈을 또르르 굴리자, 강진이 한 발 더 다가섰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 어디.”

“.......”

변명이라도 해 볼까 하던 미림이 입을 꾹 다물었다.

“경고 하나 하지, 박미림. 앞으로 한 번만 더 지음이 건드리면....... 지금까지의 생활은 없다고 생각해. 어디 멀리 유학을 보내버리든 시집을 보내버리든 눈앞에서 치워버릴 테니까 그렇게 알아. 그게 나한테 얼마나 쉬운 일인지 너도 잘 알 거야.”

블랙박스 영상을 본 후 치미는 화를 누를 길이 없어 좀 심하다 싶을 만큼 무섭게 말을 꺼냈다. 사내새끼였다면 주먹이 먼저 날아갔겠지만.

그렇다고 후회하진 않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지음에게 독한 말을 하고 상처를 줄 테니까.

아무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자신에게로 온 여자였다. 그런 여자...... 강진이 지켜야 했다.

딸꾹, 딸꾹.

놀라서인지 미림이 딸꾹질을 시작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지.”

강진이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는데 병실 문이 열렸다.

이란이 동기의 손목을 꽉 잡은 채로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마도 오기 싫다는 그를 끌고 온 듯했다.

“얼른 안 들어와? 아, 깜짝이야. 강진이 왔구나?”

“.......”

강진은 동기와 슬쩍 눈이 마주쳤지만 별다른 대꾸도 없다가 이내 이란을 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채 닫히지 않은 병실 문을 열고 나갔다.

“뭐, 뭐야, 그냥 가는 거야? 미림이랑 얘기는 좀 했고?”

강진의 뒤에 대고 이란이 소리를 쳐 봤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나 참...... 뭐야, 대체. 사람을 보고 인사도 제대로 않고. 아무튼 요즘 애들이란.”

이란이 동기의 손을 놓고 미림에게로 돌아서며 툴툴거렸다.

근데 미림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퍼렇게 질렸고, 눈시울이 벌건 데다 무언가에 놀란 건지 계속 딸꾹질을 하고 있었다.

이란이 미림의 등을 찬찬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왜 이래, 얘가? 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응?”

“어, 엄마......!”

“어어? 얘가 정말? 왜 그래? 강진이가 뭐라고 했어?”

이란을 보며 설움이 북받쳤는지 미림은 울음이 터졌다.

그녀는 병실 안에 동기가 있다는 것도 잊고 목놓아 울었고 이란은 그런 미림을 달래느라 애를 써야 했다.

***

지음이 사고가 난 지도 몇 주가 지났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계절은 가을이 되었다.

다리를 다치긴 했지만 미세한 금이었기에 3주가 흐르자 지음은 깁스를 풀고 퇴원할 수 있었다.

만약 지음이 혼자 병원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금방 치유가 되진 않았을 거다, 답답해서 돌아다니거나 미리 퇴원했을 테니까.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동희까지 붙여놓고 시시각각 감시하는 강진이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음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창에서 보이는 하늘이 깨끗해서 지음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일어났다.

창문을 열어보니 청명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었다.

“벌써 가을......이구나.”

강진의 곁에 있기로 한 4번의 계절 중에 벌써 한 번이 흘러갔다.

지음은 괜히 마음이 서글퍼지려고 하자 얼른 숨을 한번 골랐다.

바람에 흘러가는 새털구름을 보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지음아.”

동희였다.

“어, 일찍 왔네?”

“응. 지음아, 내가 말 했나?”

“뭘?”

“대표님이 너 태우고 다니라고 주신 차, 진짜 엄청 좋아. 내가 밟아본 차 중에 제일.......”

“너 운전 많이 안 해봤잖아.”

“어? 아...... 그, 그렇긴 한데, 그래도 진짜 좋아. 넓고 깨끗하고. 아마 앞으로도 난 이런 좋은 차는 못 가져볼 거야.”

“.......”

동희의 말에 지음이 고개를 돌렸다.

동희는 심란한 지음의 마음은 알지 못하고 계속 말했다.

“편의점보다 돈도 세 배나 더 줘.”

“......그렇게 좋아?”

“응! 돈도 많이 준다니까? 편하고, 너랑 같이 일하니까. 좋은 거 같아.”

“그거 모아서...... 뭐 할 건데? 하고 싶은 건 있어? 갖고 싶은 거나.”

“어? 아...... 돈 모아서? 모아서 그냥...... 집 살까?”

동희의 말에 지음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세월에.”

지음을 보던 동희가 깜짝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음......아, 너....... 우와.......”

“왜? 뭐 묻었어?”

지음이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너...... 웃었어!”

“.......”

동희의 말에 지음이 민망해져 얼른 표정 관리를 했다.

“와...... 너 웃는 거 되게 오랜만에 봐.”

“......저리 가. 짐이나 챙겨.”

지음이 눈썹을 찡그렸지만 동희는 계속 그녀를 따라다니며 얼굴을 보고 신기한 듯 굴었다.

“나랑 얘기하면서 원래...... 아니지, 나랑 얘기할 때도 원래 잘 안 웃었잖아. 근데 지금 웃었.......”

“웃는 게 뭐. 어이가 없어서 그랬지. 그 돈으로 어떻게 집을 사? 네가 하도 어이없는 말을 하니까.......”

“달라졌구나!”

동희는 벅차다는 표정으로, 지음을 보며 제 가슴에 손을 얹었다.

“......저리 가래도?”

지음은 동희를 밀어내고 몸을 돌렸다. 창피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의 말대로 지음 역시 자신이 변했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여름의 습한 바람이 선선한 가을바람으로 바뀌듯, 우중충하던 지음의 마음 역시 바뀌고 있었다.

***

퇴원을 했지만 여전히 지음은 회사에 나갈 순 없었다.

계약직 주제에 말이다.

현관 앞에 선 지음이 강진에게 재킷을 건넸다.

“잘...... 다녀오세요.”

이런 배웅이라니.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강진과 지음은 고작 계약서상의 부부일 뿐인데, 강진의 집에 함께 살고. 그의 출근을 배웅하며 옷을 건네고, 저녁이면 언제 오려나 기다리기도 하고. 같이 밥을 먹고 밤을 보내고.......

이런 일상들이 지음에겐 낯설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강진의 잘생긴 얼굴을 보면서 괜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어서 가슴에 대고 주먹으로 토닥토닥 두드렸다.

“그래. 다리는 정말 괜찮은 거지?”

다행히 강진은 그녀의 태도에서 이상한 점은 눈치채지 못하고 지음의 다리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지음이 다쳤던 다리로 바닥을 몇 번 디디고 말했다.

“끄떡없어요. 근데.......”

“근데?”

흡족한 표정으로 나가려던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저도 이제 출근하고 싶어요. 다 나았는데 심심하기도 하고 계속 빠지는 것도 그렇고.......”

“이번 주는 쉬어. 당신 아직 완전히 나은 거 아냐. 원한다면 다음 주부터 나와. 말해둘 테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

그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뜻을 꺾을 순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다시...... 자리 한번 마련할게. 가족이랑 친지, 친구...... 밥 한번 같이 먹자고. 동희 씨도 불러도 좋아.”

“네.”

강진이 문을 열고 서서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오늘은 당신, 뭐 할 거야?”

“이따 병원에 다녀오는 거 말곤 별일 없어요.”

‘그래서 너무나 회사에 가고 싶은 거예요.’

지음이 마지막 말을 삼키며 강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강진은 일전에 그녀와 함께 가려던 전시회, 그날 동기와 마주하고 있는 걸 보고 흥분했던 일을 떠올렸다.

“전시회, 미술관...... 그런 거 좋아한다고 했나, 당신?”

“아....... 안 가봐서 잘....... 싫지는 않았던 거 같아요.”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며 강진이 품에서 티켓을 꺼내 들었다.

“그럼 앞으로 같이 해 보자.”

“네?”

“이것도 가 보고, 음악회도 가 보고...... 다 해 보자고 나랑.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그가 꺼내든 티켓을 지음에게 내밀었다.

“이따...... 앞에서 봐.”

“.......”

강진이 지음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 밖으로 나갔다.

지음은 티켓을 받아든 채로 그가 맞닿았던 이마를 짚고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

병원에 가기 위해 나왔는데 동희가 그녀의 앞으로 달려왔다.

“타세요. 제가 편하게 모시겠습니다.”

“장난은.......”

싱글벙글 웃으며 장난스럽게 구는 동희에게 눈을 슬쩍 흘기고 지음은 차에 올랐다.

그동안 운전을 할 일이 없었을 텐데도 동희는 제법 편하게 운전을 했다. 그녀가 가을이 흠뻑 내린 밖을 편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병원에 도착하자, 안으로 따라 들어가려던 동희에게 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가도 돼. 다녀올게.”

“아, 그럼...... 난 매점에 다녀올게. 운전 그거 했다고 출출하다.”

“그래.”

주차장에서 멀어져 병원 안으로 들어가는데 창국이 지음을 보고 다가왔다.

“지음 씨?”

“아...... 권 선생님.”

“또 만나니 반갑네요?”

“네.......”

창국의 미소를 보면서 지음은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지음이 사고로 입원한 직후, 창국이 주치의였지만 어째서인지 입원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서 그녀의 주치의가 바뀌었다.

갑작스럽게 바뀌는 바람에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했다.

「오늘 치료는 잘 받았나?」

「네, 근데 주치의가...... 바뀌었어요.」

주치의가 바뀌던 날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강진에게 물었는데, 그는 명확한 대답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당신까지 봐줄 여유가 없는 모양이지.」

‘그럴......리가.’

지음은 이상하다 생각했다. 어쩌면 강진이 손을 썼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강진이 그럴 이유가 없을 테니 뭔가 사정이 있는 걸 수도 있다고.

“많이 좋아졌네요?”

“네? 아, 네. 다행히 좋아진 거 같아요. 뼈가 잘 붙었대요, 튼튼하게.”

창국의 목소리에 상념을 깨고 지음이 그를 보았다.

“다리 말고.”

“......?”

창국이 제 가슴에 손가락을 대고 콕콕 찔렀다.

“......마음이.”

“네?”

지음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창국을 올려다봤다.

그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고 손을 내렸다.

“저, 지음 씨.”

“?”

“오늘 병원 진료 다 받고 나면...... 뭐 하세요?”

“아, 오늘...... 강진 씨랑 전시회 가기로 했어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하는 지음의 볼이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창국과 제대로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뭔가 기대하는 것처럼 들떠 보이기도 했고.

창국은 막 짝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소녀를 보는 것 같아서 어쩐지 입이 썼다.

“아...... 그렇구나. 한발 늦었네.”

“......?”

그가 이마를 탁 치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의아한 듯 창국을 쳐다보았지만,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지음이 돌아서서 병원 밖으로 나가자, 창국은 그제야 주머니에서 티켓을 꺼내 들었다.

“이건...... 어쩌나.”

오늘 강진이 지음에게 준 티켓과 같은 전시회였다.

지음은 그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가을 공기가 청명한 병원 밖으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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