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94)

#64화.

똑똑.

강진을 기다리고 있던 지음이 말없이 열리는 문을 돌아봤다.

“강진 씨예요?”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은 식사 자리에서 한 번 뵈었던 할아버님, 차동구였다. 손녀딸인 미림과 함께 사고가 나서 입원했다는 걸 알면 한번 와 볼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강진이 없을 때 만나게 될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날세.”

“아, 네. 안녕하세요, 할아버님.”

동구가 병실 안으로 들어서며 모자를 벗고 지음의 인사를 받았다. 병실을 둘러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으음. 강진이는 잠시 미림이 병실에 들렀다고 온다고 했네. 나는 지음 양 보려고 잠시 이리로 온 거고.”

“네. 이쪽으로 앉......으세요.”

지음은 급히 몸을 일으키느라 다리에 통증이 일었지만, 할아버님을 병실 안에 세워둘 수는 없었다.

지음이 불편한 다리 때문에 침상을 잡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더니 동구가 만류하는 듯한 손짓을 했다.

“어어, 불편할 텐데 신경 쓰지 말고 앉아있어요, 나도 여기 앉으면 되지.”

할아버지의 말에 뒤따라온 이 비서가 동구의 앞으로 의자를 챙겨놓았다.

지음이 어정쩡하게 침상을 잡고 일어났다가 조심히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네, 할아버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럴까, 그럼?”

“네.”

지음을 보며 동구가 빙그레 웃었다. 그가 들고 있는 모자로 살살 부채질을 했다.

“나이가 드니까 조금만 움직여도 이렇게 힘이 드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퇴원하고 찾아뵈면 되는데.......”

“그래도 다른 일도 아니고 사람이 다쳐서 병원에 있다는데 와 봐야지, 당연히.”

동구가 따뜻한 눈길로 지음을 요리조리 훑어보았다.

“다리에 금이 갔다고? 큰일 날 뻔했네. 큰 사고였어....... 다른데 어디 불편하거나 아픈 곳은 없는가?”

“네, 다행히 다리 말고는 다치지 않았어요.”

“으음.”

긴말은 하지 않았지만 지음은 그의 따뜻한 눈빛에 걱정이 담겨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저런 눈빛을 지닌 어른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부모의 눈길을 기억하기엔 너무 이른 이별이었고, 그 후에 만난 양부모는 지음을 괴롭히기만 했으니까.

‘진심으로 걱정하는 눈빛은 저렇게도 따뜻......한 거구나.’

그런 생각에 울컥해진 지음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음은 동구의 앞에 앉아 조금은 편안하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동구 역시 지음을 보며 강진을 잠시 미림에게 보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지음의 나이는 어렸지만 보면 볼수록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서늘하고 날카로운 강진이 곁에 있는 것만 보아도.......

‘강진이가 제 형과 형수를 그리 보내고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강진마저 잘못될까 봐 동구는 매일매일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결혼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했던 놈이...... 이렇게 사람을 데려온 것도 기특하고.’

그래서 지음에게 더 고마웠다.

동구가 천천히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나이가 어리든, 이란의 말처럼 가진 게 없고 가족이 없든...... 그런 건 상관없었다.

강진이 사랑하는 여자였고 그거면 됐다, 동구에게는.

가진 거야 동구와 강진의 것을 나누어주면 되지만, 가족은.......

동구가 지음의 손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손에 잡힌 작은 손이 보드랍고 차가웠다. 꼭, 어린 시절 산에서 구해주었던 여린 산새처럼.

“.......”

동구는 당황하는 지음의 손을 토닥이듯 쓰다듬었다. 차가운 손을 체온으로 따뜻하게 덥혀주기라도 하려는 듯.

지음은 어쩐지 울컥해져서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거리며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티를 내진 않았지만 그녀 역시 가족이, 엄마와 아빠가 그리울 때가 많았다. 어른이라고 해 봤자, 지음의 나이 이제 고작 스물넷이었다.

친부모가 잡아 준 손은 너무 어릴 때라 기억나지 않았고 양부모는 손 한번 잡아 준 적이 없었다.

느껴보지 못한 부모에 대한 정이 동구를 통해 느껴지는 것만 같아서, 지음은 그만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렸다.

떨어진 눈물방울이 거칠게 주름이 잡힌 동구의 손등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지음이 얼른 눈을 깜빡거리며 주책맞은 눈물을 말리려고 애를 썼다.

그 모습을 보며 동구가 비서에게서 손수건을 받아 지음에게 건넸다.

“아가. 네가 강진의 짝이라서 나는 참...... 좋구나.”

“......네?”

지음은 그의 말에 눈시울이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동구를 보았는데, 그는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웃는 동구의 눈가에 자글자글 진 주름이...... 보기에 좋았다.

동구는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거렸다.

“몸조리에 신경 쓰거라. 퇴원하면 예전에 하려다 못했던 식사, 하자꾸나.”

“네, 할아버님.”

“너희들이 결혼식 같은 거추장스러운 건 필요 없다고 해서 그러마 했지만.......”

왜 그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겠는가. 하나 남은 손주, 아픈 손가락...... 멋지게 결혼식을 해주고픈 마음이야 누구 못지않았다.

하지만 강진과 지음이 원치 않는다면 굳이 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는 제대로 먹어야지.”

동구는 마른 듯 보이는 지음에게 한 번이라도 더 밥을 먹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네.”

지음은 동구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으며 한없이 죄송스러운 마음이었다.

‘다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되면.......’

지음이 동구의 따뜻한 눈빛을 받아내지 못하고 끝내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

강진은 동구의 말에 따라 미림에게로 가면서 점점 얼굴이 굳어졌다.

병원으로 가기 전에 강진은 정후를 잠시 따로 불렀다.

그가 강진의 심상치 않은 표정을 보고 긴장하자 손짓을 했다.

「가져오라는 건?」

「여기...... 있습니다.」

정후가 작은 SD카드 하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차는 폐차시켰습니다. 엉망이던데요? 사람 안 다친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안 다쳐? 다리에 금이 갔는데?」

「아, 그건 물론...... 그렇죠. 그래도 그만하길 다행입니다.」

정후의 말에 강진이 못마땅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고갤 끄덕였다.

「근데 대표님 이건 왜......?」

SD 리더기까지 꺼내 건넨 정후가 강진에게 물었다.

강진은 별다른 대답 없이 SD카드를 리더기에 꽂아 PC로 확인하기 시작했다.

정후가 건넨 카드는 미림의 차 블랙박스에 있던 거였다. 폐차하기 전에 가져오라는 말에 정후가 리더기와 함께 챙겨왔고.

강진이 소리를 켜고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하기 시작하자, 정후 역시 강진의 곁으로 다가가 함께 보았다.

미림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대번 울렸다.

-......운전도 못 해? ......내가 이렇게 운전까지 해야 해?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강진도 정후도 얼굴이 굳어졌다.

「아...... 미림이가 짜증이 많이 났네.」

미림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강진에게서 전화가 온 순간이었다.

-받아, 스피커폰으로.

미림이 악을 쓰자 지음이 전화를 받았다. 몇 마디를 하고 전화가 끊기고 났지만 미림의 짜증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가 막혀서....... 오빠가 미친 거야.

그녀의 말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면 이렇게...... 뭐 하나도 볼 거 없는 애를. 제정신이야?

미림의 말에 정후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 미림아, 미림아.」

「네가 듣기에도 심하지?」

강진은 그 후에 이어지는 희라와의 통화도 들었다.

그리고.......

-은주 언니랑 진짜 많이 닮았어. 내가 너 보고...... 기절할 뻔했잖아.

‘으음.......’

강진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고 눈을 감았다.

-저기...... 운전에 집중을 하는 게 어떨까요? 비도 오는데.

담담한 지음의 목소리에 강진이 눈을 천천히 떴다. 그다음 순간 귀를 찢을 듯한 소리와 쾅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강진이 주먹을 꽉 쥐고 정후를 올려다봤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 비서님?」

「아......, 미림......이가 좀 심했네요. 운전에 집중도 못 하고.」

강진은 신경질적으로 SD 리더기를 빼서 손에 꽉 쥐었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성큼성큼 걷던 강진이 병실 앞에서 문을 잡고 숨을 골랐다.

똑똑.

“누구세요?”

문을 열고 강진이 들어서자, 미림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어, 오빠!”

“......몸은 좀 어때?”

아무런 생각이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화가 치밀었지만 그래도 다쳤으니까, 강진이 한 번은 눌러 참았다, 그 잘난 가족이라는 명분으로.

“여기저기 뻐근하고 아파. 교통사고 이게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병원에서도 몇 주 쉬어야 한다고 하니까.”

“비도 오는데, 운전 조심하지. 어쩌다 사고가 난 거야?”

강진의 말에 미림이 움찔하다가 이내 생글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러게요. 비가 오니까 도로가 미끄럽기도 했고. 아휴, 그리고 한지음 씨말이에요, 운전을 못 한다더니 기본적인 매너도 모르나 봐.”

“무슨 말이지?”

“어찌나 옆에서 소란스럽던지. 차가 휘청거릴 정도였다니까?”

“차가...... 휘청일 만큼이나 소란스러웠다고? 그 사람이?”

강진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자, 멈칫하던 미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으니 사고가 났죠. 오빠, 진짜 걔가 계속 떠들고 짜증 내고.......”

“그러니까...... 한지음 씨 잘못이다?”

“......어?”

미림은 강진의 입가에 싸늘하게 걸린 미소를 보며 말을 멈췄다.

“차를 타고 가는데...... 그것도 비까지 오는 밤. 운전도 못 하는데 운전을 방해하고, 신경 쓰이게 하고, 그러다 사고까지 내게 했다? 한지음 씨가. 그 말이지?”

“어, ......뭐 빗길이었으니까 미끄러운 것도 있었......지만...... 네, 뭐. 거의 맞아요.”

“확실해?”

강진이 다시 한번 묻자 미림이 발끈해서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니까? 오빠, 오빠도 그 사람 말하는 거 다 믿지 마. 앞에서는 그렇게 착한 척을 한다니까? 오빠도 속지 마요.”

강진은 미림의 말에 대답 없이 품에서 SD 카드를 꺼내 침상에 새하얀 이불 위로 툭 던져놨다.

“......이게, 이게 뭐야?”

“봐봐, 재미있을 텐데. 휴대전화로도 볼 수 있으니까. 같이 볼까?”

“뭔......데, 오빠?”

강진이 넥타이를 손으로 풀어 쥐고 싸늘하게 웃었다.

“네 블랙박스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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