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후.......”
강진이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의 눈치를 보던 동희가 머뭇거렸다.
“괜찮으세요?”
“괜찮으니...... 계속 얘기해봐요.”
강진이 그에게 손짓을 하자, 동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나서 지음이랑 누나랑 보육원에 맡겨졌어요. 데려갈 친척도 없고 했으니까. 저랑도 거기서 만났고.”
“누......나?”
언니가 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던 강진이 동희를 보았다.
“아, 네. 근데 저도 몇 번 못 봐서 잘은 몰라요. 보육원에 들어오고 얼마 안 되어서 먼저 입양됐다고 들었어요.”
강진은 이상하게 마음 한편에 뭔가 덜컥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네?”
“언니 이름이 뭡니까?”
“이름....... 아, 이름이 뭐였더라.......”
동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게...... 지음이한텐 언니 얘기하는 게...... 금기였어요.”
“.......”
함께 부모를 잃고 언니에게 의지를 하며 보육원에서 살다가 언니가 다른 곳으로 입양이 되어 가서 상처를 받진 않았을까.......
강진은 지음에 대해 알면 알수록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동희가 계속 고민을 하며 말을 이었다.
“은진? 주연......? 뭐 그런 거였는데.......”
“지금은 어디 있는지 모릅니까?”
언니 이름은 상관없었다. 지음에게 들어도 되는 거니까. 다만.......
“네, 그 후로 연락이 끊겼어요. 그러고 나서는 언니 얘기 꺼내는 거 안 했어요, 지음이가.”
지음의 언니가 있다니. 그녀는 지음과 얼마나 많이 닮았을까. 혹시 은주와 닮은 지음이, 그러니까 지음을 닮은 은주가 그녀의 언니는 아닌 걸까.
그런 의심이 강진의 머릿속을 온통 지배했을 뿐.
“조심히 관리 잘하면 금방 나을 거예요.”
“......?”
동희와 마저 얘길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창국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진이 몸을 일으켜 돌아보는 순간, 휠체어에 탄 지음과 휠체어를 밀어주는 창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한지 점점 강진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지음은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얼른 물었다.
“언제 왔어요, 강진 씨?”
“아, 강진아....... 왔구나.”
강진은 두 사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지음에게 다가가 휠체어에 손을 얹었다.
“아.......”
창국이 어색하게 손을 떼고 물러났다.
강진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지음이 탄 휠체어를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럼...... 난 가볼게. 지음 씨, 몸조리 잘해요.”
“네, 그럴게요.”
창국이 나가자, 지음이 강진을 올려다 보며 물었다.
“언제 왔어요?”
“좀 전에.”
그때까지도 창국이 나간 문을 보고 있던 강진이 고개를 돌려 지음을 내려다봤다.
검사 받으러 간다던 사람이 왜 창국과 웃으며 들어왔는지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곁에 동희도 있었고 검사하러 가서 만났을 수도 있으니까, 휠체어를 혼자 밀고 오는 건 더 힘들 테니까...... 참기로 했다.
‘이번만 참는다. 담당의를...... 바꿔 달라고 해야겠어. 이 병원엔 의사가 형만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매번 지음의 담당인 건지.’
“일 바빠서 늦는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전에 검사받으러 간 건데.
지음이 마지막 말을 삼키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가 이렇게 일찍 올 줄 알았다면 창국이 병실에 데려다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을 거다, 무슨 말을 해서든.
잠시 지음을 보던 강진이 천천히 말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
그 말에 당황한 건 지음만이 아니었다. 동희가 일어나 부산스럽게 인사를 했다.
“아, 난 이만 가볼...... 전 가볼게요. 정후 형이 오늘 집...... 계약하자고 해서 먼저 가보려고요.”
“그래요. 앞으로 동희 씨는 한지음 기사니까 잘 부탁합니다.”
“네. 지음아, 갈게. 필요하면 연락해.”
지음이 동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병실 밖으로 나갔다.
휠체어를 잡은 강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음을 보는 마음이...... 이상했다.
그녀가 동희나 창국을 포함해서,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강진의 마음에 휘몰아치듯 불어닥쳐서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은주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진은 벌써 핼쑥한 듯 보이는 지음의 얼굴을 가만 내려다봤다.
더는 정말로 생각나지 않았다.
강진은 그의 앞에서 강진을 올려다보고 있는 다갈색의 눈동자를 보며 빙그레 웃었다.
“......한지음이네.”
“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강진의 앞에 있는 사람은 한지음이었다.
***
지음에게 한마디 하려고 그녀의 병실을 찾았던 이란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창국과 지음이 돌아오는 모습을 발견해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동희와의 얘기를 듣다가 다시 몸을 돌려 돌아가는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천천히 걸었지만, 넋이 반쯤 나가 있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자꾸 휘청거렸다.
「온정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서 사고가 났어요.」
동희의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 울리자, 이란이 벽을 붙들고 걸음을 멈췄다.
「무......광의 검은색 차라고 했어요. 생긴 건 꼭 스포츠카처럼 생겼는데 그런 것도 아닌 거 같고. 뒤쪽에 3자처럼 생긴 표시가 있다고 했나...... 눈처럼 붉고 동그란 등이 양쪽으로 두 개씩 달렸다고 했나.......」
“헉!”
이란이 얼굴 새파랗게 질린 채로 귀를 막았다.
이란은 벽에 기댄 채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던 날, 그날로 돌아갔다.
끼이익.
차를 아무 데나 세우고 이란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가듯 차에서 내렸다.
비가 미친 듯 쏟아져서 제대로 앞을 볼 수도 없었지만 사고 현장은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빗물에 더욱 고급스러워 보이는 동기의 무광의 검은색 세단이 도로를 가로질러 서 있었고, 그 앞에 차를 피하려다 그랬는지 방향이 크게 꺾인 채로 뒤집힌 차가 보였다.
유리창도 다 깨지고 엉망이 된 차는 애처롭게 와이퍼만 간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란이 휘청거리며 달려갔다.
넋이 나간 동기가 그녀를 돌아봤다.
「엄......마.......」
자신을 부르는 그에게서 독한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이란은 그가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된 건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았다.
술을 마시고 빗길을 달리다가 역주행을 하고 결국 이렇게 사고를 쳤을게 뻔했.......
“하......! 아냐, 아냐...... 아냐.”
이란이 눈을 번쩍 뜨고 고갤 마구 저었다.
차가운 병원 벽에 기대고 서서 숨을 고르며 혼잣말을 했다.
“아냐, 그럴 리...... 없잖아. 비 오는 날이야 365일 중에서 100일은 될 거고. 서울에서 온정리로 가는 길도...... 길은.......”
차가 달릴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아냐, 암튼 동기 차가...... 비싼 차라고는 해도 세상에 하나도 아닌데. 거기다 그런 사고가 하나둘 난 것도 아닌데, 그럴 리가...... 없지. 그럼.”
이란은 후들거리는 무릎에 손을 얹고 천천히 발걸음을 움직였다. 시선은 불안정했고 온몸엔 힘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허청거렸다.
입을 벌린 채 넋을 놓고 걷는데 지나던 사람과 부딪쳤다.
“아......!”
그녀는 버틸 힘이 없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어, 괜찮으세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부딪친 사람이 이란에게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주저앉은 채로 고개만 저었다.
***
회사로 돌아간 강진은 지음이 있을 병원으로 빨리 가기 위해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했다.
회의도 휴식 시간 없이 진행했고, 밥도 사무실에서 대강 챙겨 먹었다.
마음 같아선 지음의 옆에 가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후!”
목이 뻐근할 정도로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강진이 의자에 몸을 기대며 숨을 내쉬었다.
피로감이 급히 몰려왔지만, 병원에서 홀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지음을 떠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며 지음에게 전화를 했다. 다행히 이번엔 그의 전화를 받았다.
“나야. 뭐 하고 있었어?”
지음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저쪽에서 희라와 정후가 강진을 향해 오고 있었다.
“......퇴근했어. 병원으로 갈 거야. 그래, 가서 보자.”
“오오...... 이야, 우리 대표님, 많이 바뀌셨습니다?”
“쓸데없는 소릴.”
정후가 싱글벙글 미소를 지으며 강진에게 장난을 걸었다.
그 옆에서 함께 듣고 있던 희라는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대표님, 오늘은 좀 일찍 끝났는데 저녁이나 같이.......”
“병원 갑니다. 다들 퇴근하시죠. 간다.”
희라의 말을 무시하고 간단히 인사를 마친 강진이 회사 밖으로 나가자, 희라가 발을 동동 굴렀다.
정후가 단념하라는 듯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회사에서 나온 강진은 병원으로 빠르게 달렸다. 자칫 퇴근하는 차들과 섞이면 꼼짝없이 도로에서 묶여 있어야 했다.
너른 주차장에 차를 대고 들어가려는데 그 앞으로 익숙한 차가 와서 섰다.
“.......”
강진은 차를 알아보고 문을 열었다.
“으음.”
“오셨어요?”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 차동구였다.
그가 강진의 부축을 받으며 내려섰다.
“지금 퇴근한 게야?”
“네. 할아버지는 어떻게 오셨어요?”
“어떻게 오긴. 사고가 크게 났다고 하던데 와 봐야지.”
강진은 동구의 걸음걸이 속도와 맞춰 천천히 걸었다.
“차는 많이 상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습니다.”
“그럼 다행이고. 참....... 늬 고모 입이 댓 발이나 나왔던데 미림이한테 한 번도 안 가 봤다며?”
“......가보겠습니다.”
강진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실 지음 걱정에 그녀를 생각하느라 미림은 생각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본 적이 없는데.’
강진은 제게 찾아온 변화가 우스워 피식 웃고 말았다.
함께 걷던 동구는 걸음을 멈추고 강진을 올려다봤다.
근래 들어 지금처럼 강진의 얼굴이 부드러워진 것도 처음이었고, 비록 가벼운 웃음이긴 하지만 미소를 띤 것도...... 놀라운 변화였다.
‘지음이라는 그 아이가 강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니야!’
동구는 아주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생각 같아선 병원 앞에서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지만 차마 말을 꺼내진 못하고 강진의 등을 한 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동생이니 미림이한테도 한 번 다녀와. 지음 양에겐 내가 먼저가 볼 테니.”
“알겠습니다.”
강진이 동구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미림의 병실로 향하자, 동구는 뒷짐을 지고 흐뭇한 표정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쩌면 정말로 제 손자 녀석에게 좋은 짝을 정해주고 떠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