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94)

#62화.

“바로 일 시작한 겁니까?”

동희가 우물쭈물 대답하지 못하자, 강진이 다시 한번 물었다.

“아, 네네....... 그것도 그렇고 친구......라서.......”

강진은 동희의 시선을 따라 그의 뒤에 있는 물건을 보았다.

미처 다 넣지 못한 짐과 가방 따위가 있었다.

“흠, 그렇군요. 친구라....... 우리 지음이 챙겨줘서 고맙습니다.”

‘우리......지음이?’

강진과 동희의 대화를 듣던 지음은 강진의 말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동희의 눈치를 보며 힐끔거리는데 아무도 강진의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는 듯 보였다.

강진이 휠체어를 보고 지음을 돌아봤다.

“밖에 나가려고 했나?”

“아, 네.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했어요.”

고개를 끄덕이던 강진이 동희에게서 휠체어를 받아들고 그에게 말했다.

“내가 가죠.”

“아, 네.”

동희가 한발 옆으로 물러났다.

침상 끝에 걸터앉아 몸을 움직이자, 강진이 지음을 번쩍 안아 들었다.

“앗!”

놀란 지음이 강진의 목에 매달리며 소릴 질렀다.

“내려......줘요!”

“그냥 내가 안고 나갈까?”

“안 돼요! 그냥...... 내려줘요.”

지음은 정말 그가 자신을 안아 들고 나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최대한 몸을 버둥거렸다. 동희는 그저 눈만 끔뻑거리며 그들을 보고 있었다.

다행히 강진은 고집을 부리지 않고 지음을 휠체어에 앉혔다.

“다녀......올게.”

“어? 으응.”

지음이 동희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말했다.

***

강진과 지음이 밖으로 나가고 나자, 동희가 휴 한숨을 돌렸다.

들춰진 이불을 제대로 정리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가방도 넣어두고 신발도 가지런히 모아두었다.

“......지음이 괜찮은지 모르겠네.”

동희는 그녀의 부모가 뺑소니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뉴스에서 나오는 교통사고 사건도 제대로 보지 못하던 지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차가 뒤집힐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고였는데...... 어떻게 그 범인을 못 잡지? 아무리 뺑소니였어도 말이야.”

동희 역시 어릴 때였지만, 뉴스에서 스치듯 봤으면서도 그날의 이상한 사고에 관한 건 잊을 수 없었다.

끔찍했던 사고의 잔상을 지워버리고 싶었는지 일부러 이후에 있을 자질구레한 일정들을 중얼거렸다.

가습기가 올려진 탁자까지 정리를 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아직 돌아올 때가 안 됐는데?’

그런 생각으로 흠칫 놀라 돌아봤다. 처음 보는 중년의 여자가 문을 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야!”

“어......?”

“......뭐야, 너?”

이란이 창국과 밖으로 나갔다가 그와 헤어진 후 병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있어야 할 지음은 보이지 않고 웬 키 작은 남자가 병실 안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미림보다도 앳된 얼굴로, 보아하니 딱 지음이 또래로 보였다.

“뭐야, 넌....... 누구야?”

“아...... 안녕하세요.”

“안녕이고 뭐고 누구냐고? 여기 있던 애는 어딜 가고 당신이 있어?”

“전 지음이 친구 김동희라고 합니다.”

“친......구?”

그제야 이란은 일전에 정 비서가 편의점에서 일하는 친구가 하나 있다 했던 게 떠올랐다.

“아...... 그 친구. 근데 니 친구는 어디 갔어?”

“지음이요? 좀 전에 밖에.......”

“밖에? 다리 부러졌다더니 다 꾀병이었어, 그럼? 그럼 그렇지.”

“꾀......병 아닌데요. 다리는 부러진 거 아니고 금이.......”

동희가 덜덜 떨면서도 이란의 말을 정정하자, 이란이 같잖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근데 어떻게 나갔다는 거야?”

“차...... 차강진...... 대표님이랑 나갔.......”

“뭐?”

“.......”

이란의 매서운 기세에 동희가 꿀꺽 침을 삼키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강진이가 왔단 말이야? 확실해, 제대로 본 게?”

“네에.......”

“오늘 출장일 텐데, 그럼 뭐야.......”

일정이 바쁜 거로 알고 있었는데, 접고 올라왔다는 거야 뭐야.

이란이 붉게 칠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오......오셔서 휠체어, 제가 가져다 드렸....... 그래서 지음이랑 같이 잠깐 바람 쐰다고.......”

“휠체어를 타고 나갔다고? 둘이?”

“네.......”

동희가 말을 한마디씩 할 때마다 이란의 얼굴에 주름이 한 줄씩 늘어났다.

***

지난밤은 길고 피곤했다.

그래도 다행히 지음은 강진이 다녀간 후로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강진은 오늘 일찍 다시 올 테니 걱정 말고 쉬고 있으라 했다.

그 덕분에 지음은 조용한 VIP 병실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동희 역시 아침부터 병원으로 왔다. 어차피 기사 일 시작하기로 한 거라면 지금부터 해달라는 강진의 부탁이 있었다.

동희는 지음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혹시라도 그 아줌마가 또 오면.......’

그땐 동희를 쳐다봤던 그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쳐다만 보지 않을 것 같았다, 어쩐지.

“왜. 할 말 있어?”

“응?”

“왜 그렇게 쳐다봐?”

“어, 아......니야, 아무것도.”

지음과 동희가 함께 얘길 나누고 있는데 창국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음 씨?”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동희가 얼른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물러났다.

창국이 동희에게 살짝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지음에게 다가왔다.

“다리 좀 볼까요? 몸은 좀 어때요? 보기에 어디 부러진 곳은 없지만 좀 더 세밀한 검사를 해 봐야 해서요.”

“네.”

창국과 동희가 지음을 부축해서 휠체어에 앉혔다. 동희가 휠체어 손잡이에 손을 대는데 창국이 웃으며 말했다.

“제가 하죠.”

“네? 아...... 네.”

지음이 창국과 함께 나가고 나자 동희는 멍하게 서 있었다. 달리 할 일이 없어 잠시 의자에 앉아 있는데 다시 문이 열렸다.

“한지음.”

들어온 사람은 강진이었다.

동희가 어정쩡하게 일어났다.

‘으으, 지음이 나갈 때...... 따라 나갈걸.’

강진의 매서운 눈매를 떠올리며 동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안녕......하세요.”

“......네. 일찍 왔네요, 동희 씨.”

“네, 할 일이 없......어서요.”

“이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아, 지음이 지금 검사...... 받으러 나갔어요.”

진료실로 지음이를 찾으러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강진은 동희의 예상과는 달리 문을 닫고 그에게 다가섰다.

긴장하는 듯 보이는 동희의 앞 의자에 앉아서 손짓을 했다.

“잠시 앉으세요.”

“네? 네.”

동희가 우물쭈물하다가 강진의 앞에 테이블을 두고 그와 마주하고 앉았다.

“내가 동희 씨한테 뭘 좀 물어보려고 하는데.......”

“저, 저요?”

“아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솔직하게 동희 씨가 알고 있는 것만 말해주면 됩니다.”

“네...... 뭐가 궁금하세요?”

동희가 조금 긴장을 푸는 것처럼 보이자 강진이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그냥...... 한지음, 지음이에 대해서 김동희 씨가 알고 있는 거 전부.”

“아.......”

“지음이가 아는 얘기 말고. 그건 한지음에게 들으면 되니까. 난 지음이가 말하지 않을 법한, 동희 씨가 알고 있는 얘길 듣고 싶습니다.”

강진의 차분한 목소리에 동희가 심호흡을 했다. 지음이 꺼내지 않을 수많은 이야기 중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

“아- 의사 쌤은 왜 안 와? 나 여기저기 쑤신단 말이야.”

“그러게. 많이 아파, 내 새끼?”

이란이 미림의 얼굴과 어깨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달랬다.

“엄마, 근데 왜 강진 오빠는 안 와? 전화도 없던데.”

“바쁜가 보지. 그리고 엄마랑 동기 오빠가 오는데 강진이까지 뭐가 필요해?”

이란의 말에 미림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래도! 출장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걔 보러 왔다며! 같은 병원에 와 있으면서 한 번도 안 오는 게 말이 돼?”

“하긴.......”

듣고 보니 미림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분명 어제 한지음을 보러 출장에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지금 시간까지 한 번 와 보지도 않고 전화도 없었다. 그래도 미림은 피가 섞인 가족인데 말이다.

“짜증 난단 말야, 엄마! 나 걔 진짜 싫다고!”

“으음. 너 오늘 엑스레이 몇 시에 찍는다고 했지?”

“몰라, 이따가 얘기해 준다고 했어.”

이란이 눈썹을 찡그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왜? 엄마 어디 가게?”

“잠깐 있어 봐. 혼자 있을 수 있지?”

“어? 아 싫어, 엄마! 심심하단 말야. 혼자 있기 싫어.”

미림이 아이처럼 칭얼거렸지만, 한번 마음 먹은 이란은 미림을 다독이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

동희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자, 강진이 슬쩍 먼저 말했다.

“지음이 부모님은......? 지금 계신 분들은 양부모라고 하던데요.”

“아, 부모님은....... 네, 사실 지음이 친부모님은 사고로 돌아가셨어요, 어릴 때.”

“사......고?”

동희가 고갤 끄덕였다.

“너무 어려서 저도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는데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다고. 병원으로 금방 갔지만.......”

“.......”

강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동희가 강진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가고 있을 때, 병실 밖에도 그의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미림의 방에서 나온 이란이었다.

이란은 강진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받지 않자, 혹시 지음의 병실에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직접 찾아온 참이었다.

회사에 출근했다가 급히 나갔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에 그곳이 아니라면 병원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노크도 하지 않고 손잡이를 잡았던 미림은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사......고?’

그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동희의 목소리는 점점 떨리고 고조됐다.

-온정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 거기밖에 없거든요. 근데 그 당시엔 거기에 따로 CCTV가 없었대요, 지금은 있지만.

‘온정리에서 서울로...... 가는 길이라.......’

이란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무......광의 검은색 차라고 했어요. 생긴 건 꼭 스포츠카처럼 생겼는데 그런 것도 아닌 거 같고. 뒤쪽에 3자처럼 생긴 표시가 있다고 했나...... 눈처럼 붉고 동그란 등이 양쪽으로 두 개씩 달렸다고 했나. 암튼 타이어도 되게 비싼 거라고 했는데 결국 못 찾았대요.

이어지는 동희의 목소리에 이란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뭔가를 떠올리며 그녀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사실 시골에서 어쩌다 일어난 사고이고, 이란과는 상관없어야 맞는 일일 텐데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그 차 주인이 떨어뜨리고 간 지갑이 있긴 했는데요, 거기에 뭐 신분증도 없었고...... 무슨 번쩍거리는 카드 한두 장? 그거만 있었대요. 그건 지음이가 가지고 있어요.

연이어 들린 동희의 말에 이란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더니 신음성을 내뱉었다.

“으음.......”

그러고는 이란이 제 가슴을 움켜잡고 휘청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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