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지음은 얇은 눈꺼풀이 이토록 무거운 줄 미처 몰랐다.
차 문을 뜯는 소리, 빗소리를 뚫고 들리는 사이렌 소리, 지음을 부르는 소리.......
귀로는 수많은 소리를 들으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아예 눈조차 제대로 뜰 수 없었다.
흐릿해지는 의식. 지음은 스르르 눈이 감겨 그 뒤의 기억이 없었다.
현장은 엉망이었다.
미림의 차 뒤로도 달려오던 차들이 빗길에 제대로 정차하지 못하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도로는 더 혼잡했다.
출동한 구급대원들은 미림의 차 문을 뜯고 미림과 지음을 꺼냈다.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으로 보였지만 둘 다 정신을 잃고 늘어져 있어서 빨리 병원으로 가야 했다. 검사를 받아봐야 자세한 건 알 테니.
구급대원들은 미림과 지음을 차에 싣고 가까운 병원으로 향했다.
“이쪽으로!”
지음을 실은 카트가 지선 병원으로 들어왔다.
회의실에서 레퍼런스를 마치고 내려오던 창국이 소란스러운 응급실 입구를 보며 다가섰다.
카트에 사람들이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 교통사고 환자예요. 저쪽 사거리에서 역주행하던 차랑 부딪치는 바람에. 비도 오는데 참....... 여기 선생님이세요?”
“네......! 침상은 이쪽입니다.”
창국은 구급대원들을 따라 안쪽으로 향하다가 실려오는 환자를 보고 멈칫했다.
“지......음 씨? 한지음 씨!”
“아시는...... 분이세요?”
“예, 제가 아는...... 어? 미림이도?”
창국이 지음과 미림을 보며 잠시 멍하다가 얼른 응급실로 따라 들어갔다.
***
회의실에서 나온 강진은 곧장 호텔 숙소로 향했다.
눈이 피곤하고 뻑뻑해서 소파에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얼른 시계를 보았다.
“비행기 탔을 시간인데.......”
던져둔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지음에게서는 연락 한 통 없었다.
그가 넥타이를 풀며 피식 웃었다.
“어딜 가면 간다, 오면 온다...... 얘기하는 걸 좀 가르쳐야겠네.”
그러다 멈칫했다.
‘내가...... 한지음 덕분에 많이 변하긴 변했네, 이런 일로 웃기나 하고.’
강진이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넥타이를 풀어 옆에 던져두었다.
맥주나 한잔할까 생각하며 일어나려는데 정후에게서 연락이 왔다.
냉장고로 향하며 휴대전화를 받았다.
“어, 왜.”
-저기...... 대표님. 아니, 강진아.......
“......?”
정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그답지 않게 머뭇거리는 것도 그렇고,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 차 있는 것도 그렇고.
이상하게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기분 나쁜 한기가 그랬다.
강진의 발걸음이 거실 중앙에 멈춰 섰다.
“뭔데? 무슨 일...... 있어?”
-그게...... 아 너무 심각한 건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뜸 들이지 말고, 본론.”
듣기도 전에 숨이 차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전력 질주로 뜀박질을 한 것도 아닌데.
-지음......이가.......
고작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강진은 어지러워서 눈을 꼭 감았다.
그가 비틀거리며 옆의 소파를 손으로 꽉 움켜잡았다.
“그...... 사람이 왜......? 무슨 일인데?”
-그게.......
두려웠지만 들어야 했다.
강진은 심호흡을 했다.
“뭔데! 오늘 출장 못 온대? 그래?”
-사고가...... 났어.
사고라는 말에 강진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심장을 콱 움켜쥐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서 휘청하고 무릎이 꺾였다.
그가 가슴을 부여잡고 끄응, 신음을 내뱉었다.
“지음......이, 그 사람이 왜?”
-강진아...... 너 괜찮아?
“괜찮으니까...... 빨리 말해. 그 사람, 어떻게 됐어!
-아 그게...... 추돌 사고가 났어. 오는 길에 비가 와서 미끄러져 그랬나 본데. 다행히 그렇게 심한 부상은 아니고.
교통사고라니.
강진은 교통사고에 대한 두려운 과거 때문에 제대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감은 눈에 매달린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숨이 막혀 입을 벌리고 신음성만 내뱉었다.
귓가에 윙윙 소리가 울리고 눈앞이 캄캄했다.
“무슨 소리...... 얼마나.......”
강진은 말을 제대로 이을 수 없었다.
그의 상태를 짐작한 정후가 휴대전화 너머에서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아, 전복될 정도는 아니었고, 그냥 차만 좀 부서졌어. 암튼 지금은 지선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어. 그러니까.......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데.......”
강진은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을 누가 꽉 잡고 놓지 않는 것처럼 통증이 심해서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아직은...... 근데 정말로 큰 사고는 아니었어. 일단, 강진아 내가 가 보고 연락할 테니까 너무 걱정 마.
“.......”
-나 지금 병원 거의 도착했거든. 여보세요, 강진아?
“......내가.......”
강진은 귀를 파고드는 정후의 목소리를 들으며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그가 소파를 붙들었다.
-강진아? 야, 차강진? 너, 괜찮아?
“가야 해, 내가.......”
몸을 일으키고 문으로 향하던 강진이 비틀거리며 벽을 붙잡았다.
손에 차가운 벽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도 그랬다, 손에 닿는 벽이 어찌나 차갑던지.
강진은 떠오르는 기억에 흠칫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급수술이라고 쓰인 시뻘건 글자가 탁 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선생님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환자분 두 분 모두...... 사망하셨습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강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흰 천에 덮인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강진은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비틀거리며 벽을 붙잡았다.
손에 닿는 찬 기운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강진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내가, 가야 해!”
그때처럼 보낼 순 없었다.
강진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
비가 내렸다.
이상하게 쏟아지는 빗속에 서 있는데 옷이 젖지 않았다.
지음은 여기가 어딜까, 주위를 둘러보는데 갑작스럽게 어둠이 내렸다.
‘......응? 이렇게 갑자기 밤이 올 수도 있나?’
지음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시커먼 상태에서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딘가 둘러보던 지음이 멈칫했다.
깜깜했지만 어딘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어느새 훌쩍 커버린 나무를 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두었는데.
뒤집힌 부모님의 차가 보였다.
‘......아!’
지음이 당황해서 앞으로 나서려는데 제 몸이 점점 줄어들었다.
마치 애니메이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순식간에 지음의 몸이 그 시절, 어릴 때로 돌아가 버렸다.
그녀의 앞에 펼쳐진 건 연기가 솟고 뒤집힌 부모의 차, 그렇게 사고를 내놓고도 신고하지 않고 그 차를 한 번 더 치고 달아나는 누군가.
그러다 장면이 바뀌었다, 마치 영화처럼.
‘어......?’
그녀 앞엔 피투성이가 된 부모가 쓰러져 있었다.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녀의 옆에서 누군가 지음을 안으며 흐느꼈다.
『보지 마...... 보지 마!』
‘......언니?’
지음은 울지도 못하고 부모님의 사고 모습을 보다가 은주에게로 고개를 돌리는데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왔다.
‘아......!’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되더니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러다 헉!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는데 꿈이었다.
“아.......”
지음이 눈을 반짝 떴는데 주위가 온통 흰색의 벽이었다.
그녀는 적당히 단단하고 적당히 폭신한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주위가 시끄러웠다. 근처에서 동희와 정후의 목소리가 들렸다.
“엉엉, 지음아.......”
동희는 울고 있었고 정후는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지음이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펴보는데, 동희와 눈빛이 마주쳤다.
“어? 지음아! 지음아, 너 정신이 들어?”
“......여긴?”
“여기 병원이야.”
동희에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정후가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지음아, 괜찮니?”
“아...... 네. 저 어떻게 된 거예요?”
정후가 한시름 놨다는 듯 의자에 털썩 앉았다.
“사고 났잖아. 그건 기억나?”
“아.......”
지음은 그제야 미림과 출장을 가는 길에 사고가 난 걸 떠올렸다.
‘차 문이 열리는 걸 보고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다행히 병원으로 왔구나.’
“이마는 또 찢어지고, 오른쪽 다리엔 금이 갔어. 부러지지 않은 게 다행이야. 차가 확 찌그러지면서 그렇게 됐네.”
“아.......”
정후의 말을 듣고 지음이 자신의 다리를 보았다. 오른쪽 다리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엑스레이상으로 다른 곳은 우선 타박상 말고는 괜찮다는데....... 그래도 교통사고라 나중에 후유증이 있을지도 몰라서 고생은 좀 할 거 같네. 많이 아프지? 놀랐겠다.”
지음은 옆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동희를 보다가 정후에게 시선을 두었다.
“괜찮아요. 아, 미림...... 선배는요?”
“어, 미림이는 멀쩡해. 다른 병실에 입원했어.”
“네, 다행이네요.”
정후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음, 그리고...... 강진이가 연락이 안 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오는 모양이야.”
“네? 가...... 강진 씨도, 대표님이 아세요?”
“......어.”
“출장은 어쩌고요?”
“그러게. ......그래도 너 이렇게 됐는데 얘긴 해야 할 거 같아서.”
‘말하지 말죠, 오빠는......’
지음이 입술을 움직였지만, 말과는 달리 마음은 두근거렸다.
강진 씨가 오고 있다.......
그런 생각에 마음이 놓이는데 정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튼 당분간은 입원해야 하니까, 세안용품이랑 뭐...... 필요한 것 좀 챙겨다 줄게.”
“내가, 내가 갈게요, 형. 내가 다녀올게, 지음아.”
동희가 울먹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정후가 둘을 번갈아 보다가 피식 웃었다.
“진정해. 누가 보면 네가 지음이 애인인 줄 알겠다.”
“훌쩍. 지음이...... 불쌍해서.......”
지음은 기가 막혀서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누구한테.......
정후가 웃으며 동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래그래. 그럼 동희 편으로 보낼게.”
“네, 고마워요.”
“쉬고 있어.”
정후와 동희가 밖으로 나가자, 지음은 그제야 조용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침상에 기대 숨을 후, 몰아쉬는데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아, 네.”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