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미림의 표독스러운 목소릴 들으며 오늘의 길이 쉽지 않겠다,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네.”
미림이 지음을 힐끗 보며 입술을 꽉 무는 게 보였다.
지음은 되도록 그녀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는 사이 강진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오고 있어?
“네.”
-나는 회의 들어가. 당신이 도착할 즘이면 나오려나. 회의가 언제 끝날진 모르겠다, 아직.
“......네.”
-조심히 오고. 도착하면 내 방으로 와. 메시지 보내 놓을게.
“그럴게요.”
몇 마디를 더 하고 전화는 끊겼다.
빵빵!
“아 씨, 운전을 대체 왜 저따위로 하는 거야?”
전화를 끊자마자 미림이 신경질을 내며 경적을 울렸다.
“기가 막혀서....... 오빠가 미친 거야, 미친 거.”
“.......”
지음의 짐작대로 미림이 화가 난 건 강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미림이 계속 혼잣말이지만 지음에게는 충분히 들릴 만한 목소리로 짜증을 부렸다.
“대체 무슨 생각이길래 이렇게 가족도 돈도 학력에 배경도......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애를. 제정신이야? 아무리 할아버지가 아무하고나 결혼시킨다고 해도 그렇지. 아니, 그거야 할아버지가 그냥 화가 나서 한 말이지.”
“.......”
이제 자신을 욕하는 말에는 이골이 났다. 지음은 미림의 말을 그냥 그러려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밖을 내다보았다.
이번엔 미림의 전화가 울렸다.
“아, 네, 실장님.”
-응, 가고 있어? 아 무슨 놈의 회의가 이렇게 많은지. 지금 비 오던데.
“네, 비 내려요. 실장님, 저 짜증 나 죽겠어요.”
-왜?
희라였다. 미림은 일부러 지음까지 들으라고 전화를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아니, 참나...... 직원 뽑으면 뭐 해요? 이런 날 운전도 못 하는 애를.”
-그건 그래. 아무리 계약직이라고 해도...... 월급이 아깝다.
“내 말이요! 그리고 실장님, 좀 전에 대표님 전화 왔었거든요?”
-어, 그래? 잘 도착하셨대? 나도 전화를 좀 해 봐야겠다. 뭐라는데?
“......대박인 게 저한테 안 왔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미림과 희라의 목소릴 번갈아 들으며 지음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고 무릎에 놓인 가방을 꽉 움켜잡았다.
미림은 목소리를 높이더니 지음을 슬쩍슬쩍 곁눈질해서 보았다. 그러더니 지음에게 들으란 듯 목소릴 높였다.
“한지음, 걔한테 전화를 했다니까요? 진짜 내가 어이가 없어서. 뭐 잘 와라, 어쩌라. 누가 보면 걔가 운전도 다 하는 줄 알겠네.”
-......정말 미쳤어.
“그러니까요. 대체 무슨 생각이면 이런 애랑.......”
미림은 희라에게 한참이나 속풀이를 했다.
지음은 한동안 이어지는 자신의 욕을 들으며 창문을 살짝 열었다. 안 좋은 기운들 모두 밖으로 흘려 내보내기라도 하려는 듯.
비바람 때문에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얼굴과 목을 건드렸지만, 그래서 더 시원하고 좋았다. 답답함이 조금은 풀리는 거 같아서.
“어머, 야! 너 창을 왜 열어? 비가 오는데! 실장님, 언니, 내가 이따 또 전화할게!”
미림이 소리를 마구 지르며 전활 끊었다.
“아, 죄송해요. 좀 답답해서.”
“답답? 하, 내가 답답하다! 누가 할 소릴. 진짜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시트 다 젖으면 어쩌려고.”
지음은 미림의 잔소리를 들으며 창문을 올렸다.
이 지겹고도 긴 여정이 언제나 끝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지음의 욕을 퍼붓던 미림이 그녀를 힐끔거리며 보았다.
“......?”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지음을 훔쳐보듯 보는 게 이상해서 지음이 미림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
지음의 말에도 미림이 아무 말 안 할 것처럼 입을 다물다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알아서 하겠지, 지음이 몸을 돌려 도로 창밖에 시선을 두는데 미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
“너...... 강진 오빠 형수, 그러니까 민준 오빠 와이프랑 닮은 거 알아?”
아, 또 그 얘기구나.
지음은 저도 모르게 가방을 잡은 손에 힘이 턱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한번은 저 사람들을 통해 듣게 될 거라고 생각은 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은주 언니랑 진짜 많이 닮았어. 내가 처음에 너 보고 기절할 뻔했잖아, 너무 닮아서. 놀랐던 거 기억나?”
‘은......주?’
강진의 형수 이름이, 지음을 닮았다는 그 여자 이름이 하필이면 은주란 말인가.
‘언니...... 이름이잖아?’
지음은 순간 심장이 너무나 뛰어 입을 벌리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세상에 은주라는 이름이 한둘도 아니고, 엄청 특이한 이름도 아니기에 지음은 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했다.
“세상에...... 깜짝 놀랐다니까? 완전 닮았어!”
“.......”
미림이 지음을 자꾸 옆으로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거나 크게 타격을 입는 타입은 아니라 상관없었는데, 이렇게 운전 중에 돌아보는 건 문제가 있어 보였다.
“웬일이야, 정말. 도플갱어인 줄.”
더구나 반대편에서 불빛을 쏘며 달리는 자동차, 그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설마 중앙선을 넘어서 역주행을 하고 있는 건가.
지음은 불안한 마음에 미림의 팔을 툭 쳤다.
“저기...... 운전에 집중을 좀 하는 게 어떨까요? 비도 오는데.”
“뭐? 이게 미쳤나, 진짜!”
지음의 말에 미림이 그녀를 돌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그 바람에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며 휘청했다. 그 순간 앞에서 불이 번쩍했다.
“엇......!”
“아악!”
미림의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지음의 귀를 때리는가 싶더니 차가 한쪽으로 크게 휘었다.
쾅!
뒤이어 몸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지음이 보았던 역주행 차량이 미끄러지듯 미림의 차를 받아버렸고, 당황한 미림이 급히 핸들을 꺾었지만 소용없었다.
보닛이 꽉 찌그러지도록 세게 부딪친 차량이 빗길에 멈춰 섰다.
“아아.......”
지음은 몸이 튕겨 나가듯 앞으로 숙여졌다가 안전벨트 때문에 도로 뒤로 젖혀졌다.
갑작스럽게 닥친 충격에 눈앞이 캄캄하고 숨이 턱 막혔다.
귀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마치...... 꽉 막힌 좁은 상자 안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상자 안 공기는 점점 사라져가고 온몸이 결박당한 듯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으읏.......”
지음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확인하려고 고갤 돌리려 했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가슴팍과 다리에 통증이 일었다.
눈을 잠시 감고 숨을 몰아쉬었다.
솨아아!
쿵쿵쿵!
-이봐요! 괜찮아요?
-뭐야, 대체. 사고 난 거야?
-신고해야 하는 거 아냐?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 빗소리에 섞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음이 힘겹게 눈을 떴다.
사고가 크게 났는지 지음이 타고 있는 차는 엉망이 되어 있었고, 연기가 빗물을 뚫고 올라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주위로 모여들며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차창을 두드렸다.
지음은 미림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는데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하아, 미림...... 선배.......”
그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몸을 묶어둔 벨트를 풀고 미림에게로 몸을 돌렸는데.
“아악......! 하아, 아.......”
다리에 통증이 일었다.
찌그러진 차 때문에 다리가 꽉 끼어 다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하아, 하.......”
입술을 꽉 물고 팔을 뻗었다.
“선......배님! 미림 선배님.”
하지만 그녀는 몸을 부딪치며 정신을 잃었는지 아무리 불러도 일어나지 못했다.
지음은 보닛에서 올라가는 연기를 보며 일단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차 문을 열어봤지만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
머리가 지끈거려서 손을 가져다 댔는데...... 또 피가 묻어났다.
이번엔 또 어딜 다친 건지 모르겠다.
신고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찾는데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 액정 깨진 휴대전화가 보였다.
“문을...... 문이라도...... 하아, 제발.......”
밖에서 사람들이 지음이 있는 쪽과 운전석 쪽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마구 흔들었다.
지음이 숨을 고르며 밖을 보았다.
주위를 빙 둘러선 사람 중에 몇이 신고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음은 손을 뻗어 미림의 몸을 흔들었다.
“선배....... 흑, 좀 일어......나 봐요!”
차분히 상황을 살펴보던 지음도 점점 옥좨오는 공포 때문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점점 머리는 어지럽고 숨은 차오르고, 괜히 이마와 다리에 통증이 심해지는 것 같고, 거기다 칼날처럼 머릿속을 헤집는 그 날의 사고 생각.
“흑......!”
그날의 날씨가 어땠는지 지음은 기억하지 못했다.
날씨뿐만인가. 며칠이었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어딜 가던 중이었고, 왜 그곳에 서 있었는지.
엄마와 아빠는 왜...... 죽어가고 있었는지.
지음의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은 죽음의 장면이었다.
「......엄......마, 아빠?」
캄캄한 밤에 비가 내렸던가.
날씨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음은 제 몸을 축축하게 적시는 소름 끼치는 느낌이 식은땀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눈앞이 흐릿해지는 게 충격 때문만은 아니라고.
익숙한 차가 뒤집힌 채로 불이 붙고 있었다.
지음이 손을 뻗었지만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엄......마! 아.......」
지음은 부모님을 채 부르지도 못하고 찬 바닥에 쓰러졌다.
그렇게 정신을 잃고 깬 지음 앞엔 부모의 시신만 놓여 있었다.
“헉......!”
지음은 그때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녀도 그 차에 타 있었다면,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랬다면 이 힘들고도 고통스러운 세상, 끝낼 수도...... 외롭게 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지음은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스르르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 이보세요!”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