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미안하다.......”
그녀를 안아주는 강진의 몸이 떨리자, 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입을 열었지만, 마음처럼 소리는 나지 않았다. 넓고 포근한 강진의 품 안에서 지음의 목소리가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지음이 진정될 만큼 꼭 안아주던 강진이 그녀의 몸을 떼어놨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는 손길이 따스했다.
지음이 고갤 들어 그를 보았다.
되도록 밝은 표정으로 강진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강진 씨 주려고 케이크 만든 건데.......”
지음이 바닥에 쏟아진 케이크를 보았다.
“엉망이 됐네요. 그래도 고모님이 가져온 것까지 저렇게 할 필욘 없었어요, 음식인데. 아깝다.”
“.......”
“미역국은, 그래도 내가 직접 끓인 미역국은 그대로예요.”
강진이 지음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빤히 그녀를 보았다.
‘그녀를 보면 은주가 보이....... 응?’
지음에게서 은주를 보던 강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더이상 지음을 통해서 은주가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요?”
그가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자, 지음이 물었다.
강진은 얼른 고개를 흔들고 눈을 깜빡거렸다.
하지만 여전히 은주의 모습이라고는 아예 떠오르지도 않고, 그를 보며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걱정하는 지음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은주가...... 사라졌다?’
흐릿하게 겹치기도 하고 어떨 때는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매번 지음에게서 은주를 보고 있었던 건 아니었기에 그러려니 했다. 시간이 흘렀으니 흐릿해지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토록 아예 생각나지 않는 건 이상했다.
“하아.......”
강진이 지음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강진 씨?”
그의 앞에 있는 건 지음의 목소리, 지음의 얼굴뿐이었다.
강진이 지음을 찬찬히 살펴봤다.
아무리 은주의 모습을 떠올리려 해봐도 소용없었다. 그의 앞엔 오직 한지음뿐이었다.
게다가...... 지음이 예뻐 보였다, 미치도록.
‘이 마음이 뭐지, 대체...... 뭘까.’
강진은 찢어진 지음의 원피스, 그 안에 뽀얗게 숨어 있는 지음의 어깨에 입술을 맞췄다.
“읏.......”
지음은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터지자,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려 들었다.
강진이 좀 더 빨라 그녀의 손을 잡아 내렸다.
그의 눈길이 그윽해지자, 지음은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의 말대로라면, 어쩌면...... 어쩌면 강진 씨가 보고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닐지도 몰라. 아아, 강진 씨가 나를 두고 형수님이라는 분을 보고 있는 거면...... 어쩌지?’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눈을 깜빡거렸다.
“나 좀 봐, 한지음.”
강진이 그녀의 턱에 손가락을 얹어 고개를 들어 올렸다.
“.......”
“키스......해도 돼?”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자신을 눕혀놓고 매번 울리기도 했으면서.......
강진의 몸이 떨리는 게 느껴지자 지음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강진은 그녀에게 다가서서 몸을 숙였다.
더는 은주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그의 눈을 스르르 감고, 지음의 입술에 집중하듯 키스를 했다.
이건 온전히...... 한지음과의 키스였다.
***
8월이 훌쩍 지나갈 즈음 지음은 다시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가끔 무의식적으로 건드릴 만큼 가렵기도 했지만, 흉터도 많이 흐려졌고 일상생활에 문제도 없었다.
오랜만에 회사로 향해 사무실로 들어간 지음이 희라와 미림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하지만 희라와 미림은 그녀를 보고도 본체만체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상처를 받을 지음이 아니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더구나 오늘은 강진과 출장을 떠나는 날이어서 지음에겐 다른 게 눈에 들어올 여력이 없었다.
희라와 미림 역시 출장 준비로 한창이었다.
미림이 입술을 삐죽이며 맘에도 없는 소릴 했다.
“실장님도 가면 좋은데...... 왜 내가 쟤랑 가야 하냐고요.”
“......그러게. 그래도 일단 난 남아서 전시회 준비를 해야 하니까, 미림 씨가 가서 대표님 많이 도와드려. 쟤가 남아 있어봤자 할 수 있는 게 있겠어?”
“휴, 하긴 그래요.”
그들은 지음에게까지 다 들리도록 떠들어댔지만 지음은 입을 꾹 다물고 할 일만 했다.
“한지음 씨?”
“네.”
“짜증 나지만...... 지음 씨도 출장인 거 알죠?”
“......네?”
“아휴, 정말 짜증 나. 대표님은 왜 저런 말단 직원을 데려가겠다는 건지.”
“.......”
“가서 청소나 할 줄 알면 다행이죠, 뭐.”
희라와 미림이 키득거리며 지음을 놀리고 있는데 희라의 자리에 있던 전화가 울렸다.
“어? 강진 씨네. 네, 대표님.”
희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금방 대외용 목소리가 되었다.
-실장님, 난 급한 일정 때문에 먼저 제주로 떠납니다.
“아,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함께 가지 못해서 너무 아쉽.......”
-미림 씨는 말한 대로 오늘 실장님 도와 마무리하고 저녁에 퇴근 후에 지음 씨와 함께 오시면 됩니다.
“......네, 전달하겠습니다.”
제 할 말만 하는 강진의 태도에 희라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강진이 뭐라 했을까. 지음은 희라와 얘길 나누는 강진의 목소리가 궁금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하게 복사기로 향했다.
희라는 못 봐줄 만큼 얼굴이 어두워지고 나서야 내선 전화를 툭 끊었다, 전화기를 부술 듯이.
“왜요, 실장님?”
미림의 말에도 희라는 팔짱을 끼고 분하다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지음은 전화를 끊는 걸 확인하자 복사기를 돌렸다.
위이잉, 소리가 희라와 미림의 수다를 지워버렸다.
“한지음 씨.”
“.......”
“한지음 씨!”
“아, 네.”
소리를 빽 지르는 희라 때문에 지음이 얼른 기계를 끄고 그녀를 보았다.
희라는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다가 손짓을 했다.
“대표실로 가 봐.”
***
지음이 대표실로 향하는 길에 정후를 만났다.
“어, 지음 씨.”
“아, 네.”
정후가 지음의 얼굴을 살폈다.
“흉터는 좀 괜찮아졌어? 많이 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구나?”
“그래도 잘 안 보여요, 눈썹이 있는 곳이라.”
“다행이네. 들어가 봐요. 대표님 기다리겠다.”
“넵.”
지음이 가볍게 웃고 대표실로 향하는데 정후가 지음을 불렀다.
“지음아.”
“네?”
“강진이가...... 너 덕분에 많이 좋아진 거 같다.”
“......네? 뭐가......?”
정후가 지음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사실...... 온정리 펜션에 강진이를 데려갔을 때까지만 해도 그 자식, 진짜 엉망이었거든.”
“.......”
“형과 형수 사고가 자신 때문이라고 믿는 어리석은 놈.”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강진 씨도.”
사랑하는 형과 거기에 사랑하지 말아야 할...... 여자까지 강진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지음의 말에 정후가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래...... 그랬겠지. 암튼 강진이가 널 만나서 마음을 잡는 거 같아 다행이야.”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강진 씨는.’
정후의 말대로 지음을 만나서 마음을 잡았다는 건...... 형수라는 여자가 지음과 닮아서일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 심장을 뭔가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통증이 일었지만.
‘그렇게라도 강진 씨가 마음을 다잡을 수만 있다면...... 됐어.’
정후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여주고 멀어졌다.
지음은 그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도 사무실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강진과 그의 형, 형수에 대한 사연을 떠올릴 때마다 강진이 얼마나 혼자 외롭고 아팠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강진을 만나고 난 후부턴 지음의 표정도 계속 다양해지고 있었다.
지음은 얼른 마음을, 표정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네.
사무실 안에서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음은 얼른 옷을 한 번 훑어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출장인데도 강진은 한참 바빠 보였다.
“어, 한지음 씨. 앉아서 잠시 기다려요.”
“네.”
지음은 소파에 앉아 그가 서류에 파묻혀 있는 걸 보고 있었다.
‘고갤 숙이고 일하는 강진 씨 모습도...... 멋있구나.’
“내가 그렇게 잘생겼나?”
“......네?”
“당신이 그렇게 뚫어지라 보고 있으니까 설레서 작업을 마칠 수가 없잖아.”
“아.......”
강진의 말에 지음이 얼른 시선을 피했다.
꼭 제 마음속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잠시 방황하던 지음이 다시 고갤 돌렸는데, 그새 강진이 그녀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아......!”
놀란 지음이 움찔 뒤로 물러나자 강진이 팔을 뻗어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여기 소파야. 물러날 곳이 없다고. 왜 그렇게 놀라?”
“언제 왔어요? 방금까지 저기....... 바쁜 거 아니었어요?”
“바빠. 지금도 이미 출발했어야 했는데 이러고 있네. 어제 얘기한다는 게 일정이 급히 바뀌는 바람에 미리 말 못 했어.”
강진이 지음의 손을 붙든 채로 쓰다듬었다.
“......괜찮은데, 난.”
“그래. 난 잠시 후 먼저 갈 거야. 당신은 미림이랑 같이 업무 끝나면 와.”
“전...... 가서 무슨 일을 하나요?”
“나랑 같이 있어야지.”
“.......”
강진의 말에 지음이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보아도 잘난 강진을 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기대 같은 건...... 하지 마, 한지음. 그는 어차피 나를 통해...... 형수라는 분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녀의 상념이 길어졌을까. 강진이 그녀의 턱에 손가락을 대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렇게 숙이지 말고. 날 봐야지, 한지음.”
“.......”
지음의 얼굴에 강진의 눈빛이 와 닿았다.
“난 당신 보고 싶은데 그렇게 피하면 볼 수가 없잖아.”
“.......”
강진의 목소리가 너무도 부드러워서, 먹어보지 못한 라떼 커피 위에 올려진 거품처럼 고와서...... 지음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강진이 그녀를 한참이나 쓰다듬어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몸을 숙였다. 그리곤 그 보드랍고 촉촉한 강진의 입술이 지음의 입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