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주방엔 지음이 준비해 둔 미역국과 이란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케이크 따위가 보였다.
이란이 코웃음을 쳤다.
“겨우 이따위 걸 해 주는 거야? 그래?”
“.......”
“남의 집에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란이 돌아봤지만 지음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더 화가 치미는지 점점 이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음의 코앞까지 다가와 손가락질을 하며 악을 썼다.
“너희들 뭐야? 너 대체 뭐냐고? 집까지 드나드는 거니? 결혼식도 안 한다고 해 놓고는 집에를 드나들어?”
흠잡을 게 더 없을까 희번덕거리던 이란의 눈길이 열려있는 문에 닿았다.
“응?”
이란이 지음의 방으로 향하더니 문을 벌컥 열었다.
쾅!
문이 벽으로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지음이 말릴 새도 없이 이란이 방을 살펴봤다.
누가 봐도 여자 침실처럼 꾸며진 곳, 놓여 있는 화장품이니 물건이 전부 지음의 것으로 보였다.
이란의 눈이 더욱 커졌다. 조금만 더 했다간 뒤집어질 것 같았다.
“뭐...... 뭐야, 이거? 너희 설마...... 도, 동거해? 그래?”
올 게 왔구나. 지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핑계 따위는 먹히지 않을 만큼 확실한 증거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집이 어딘지 말 못 했구나? 그래?”
이란이 그녀를 잡아먹을 것처럼 매서운 눈빛으로 지음을 노려봤다.
이렇게 된 이상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지음이 심호흡을 했다.
“강진 씨한테 못 들으셨나요?”
“......뭐?”
“고모님 말씀처럼 저희 동거해요.”
“너, 너...... 지금...... 지금 나한테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까부는 거야?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아주 못 쓰겠구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시는 줄 알고.”
“죄송? 어른들 기만해놓고 죄송하다고 하고 끝날 일이야, 이게?”
이란이 길길이 뛰며 화를 냈지만 지음에게 별 타격이 없어 보였다.
이란은 화가 치밀어 속이 뒤집힐 것 같은데 그녀는 처음 이란을 보았을 때 말고는 내내 담담한 얼굴이었다.
순간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이란이 기어코 지음에게 다가섰다.
기세에 놀라 뒤로 물러나는 지음의 앞으로 다가선 이란은 커다란 알이 박힌 반지를 낀 손으로 지음의 따귀를 갈겼다.
“......아!”
예상치 못한 공격에 지음의 몸이 거실 바닥으로 날아가듯 쓰러졌다.
얼마나 세게 쳤는지 묵직한 통증이 얼굴에 가득했다.
안 그래도 왼쪽 다친 상처가 그대로인데, 얼굴 수난 시대인 듯하다.
지음은 턱까지 아플 정도로 얼얼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지음을 보고 잠시 뒤로 멈칫 물러나던 이란이 눈썹을 치켜떴다.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입술을 씰룩이다가 지음의 원피스, 어깨를 붙잡았다.
“이 옷. 네가 산 거는 맞니?”
지음이 이란의 힘에 휘둘려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이란은 자기 힘이 지음을 압도한다는 걸 알자, 신이 나서 양손을 뻗었다. 한 손으론 원피스를 잡아 뜯을 듯 움켜잡고 다른 손으론 지음의 머리를 휘어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하늘하늘한 그녀의 원피스 어깨가 투두둑 소리를 내며 뜯어지고 말았다.
“아......!”
지음은 얼른 흘러내리는 옷을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모든 건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는 제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피식 헛웃음이 흘렀다.
엉망이 된 지음을 보던 이란이 손을 놓고 물러서서 숨을 골랐다.
“아휴, 힘들어.”
지음은 그저 얼른 이란이 가 줬으면, 그래서 옷을 다시 갈아입고 머리를 정돈할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란은 이렇게 끝낼 생각이 없었다.
뭘 어떻게 더 엉망으로 만들까 두리번거리던 이란이 주방으로 향했다. 주위를 둘러보더니 만들어 둔 케이크를 들고 거실로 나왔다.
이란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옷을 추스르고 있던 지음은 이란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케이크를 들고 다음에 뭘 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볼품없는 솜씨지만 열심히 만든 건데.......
“고, 고모님......,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지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란은 있는 힘껏 케이크를 거실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
순식간에 엉망이 된 케이크를 보며 지음은 망연자실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 지음의 앞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던 이란이 멈칫했다.
지음의 뒤로 띠리리, 문이 열리며 강진이 들어왔다.
“무슨 소란이야?”
“가, 강진아.......”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강진을 보고 이란이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며 말까지 더듬었다.
강진이 주위를 살펴봤다.
자신도 없는 집 안에 이란이 들어와 있는 것도 그렇고, 그녀 앞에 지음이 옷이며 머리가 흐트러진 채 엉망인 꼴로 서 있는 것도. 거기에 거실 바닥엔 케이크가 쏟아져 뭉개져 있었다.
상황은 묻지 않아도 알 만했다.
강진이 지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다듬듯 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와 잡아 뜯은 듯 구겨진 옷, 그리고 이런 일을 당했음에도 덤덤하게 표정도 변하지 않게 서 있는 지음을.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말을 하면서 점점 화가 치솟는지 소리가 커졌다.
당황한 이란이 머뭇거리다가 얼른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케이크와 선물을 들고 강진에게 다가섰다.
입술을 끌어올려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
“생일인데, 혼자 있을까 봐 마음이 쓰여서. 너 형 그렇게 되고 계속 힘들어했잖니.”
“.......”
“그래서 와 봤다. 가만있을 수가 없어서. 자, 이건 선물이야.”
강진은 이란과 지음을 번갈아 보다가 그녀가 내민 케이크를 들어 꺼냈다.
어색하게 미소 짓는 이란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고 케이크를 집어 들어 거실로 패대기를 쳤다.
보드라운 케이크가 거실 바닥에 쩍 달라붙으며 생크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앗!”
이란이 흠칫 놀라 뒷걸음질을 치는데, 강진이 다가서서 그녀의 손에서 선물상자를 뺏어 들었다.
찌지직, 포장지를 아무렇게나 뜯고 상자를 여니 고가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
강진은 헛웃음을 흘리며 시계를 바닥에 툭 떨어뜨리고 구둣발로 짓이기듯 밟아버렸다.
시계에 금이 가는 소리에 지음도 놀라고 이란 역시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가, 강진아!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하지만 강진은 매서운 표정으로 몸을 비스듬히 옆으로 틀어 서서 이란에게 말했다.
“나가시죠. 끌어내기 전에.”
“......지금, 지금 네가......!”
이란은 보고 있기에도 몸을 부들부들 떨며 화를 참아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이게 다 저 계집애가.......”
“저 없을 때 만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한 번만 더 허락 없이 집에 찾아와 이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습니다.”
“.......”
이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진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끊었다.
소리가 크지도, 높지도 않았지만 강진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지음은 말리고 싶었지만 끼어들 수 없었다.
강진이 이란에게 한 발 더 다가섰다.
“이 사람, 내 와이프 될 사람입니다. 다시 한번 손대면 아무리 고모님이라도 가만 안 있겠습니다.”
“뭐, 뭐라고? 그, 그럼 네가 어쩔 건데? 난 네 혈육이야! 안 참으면 어쩔.......”
말하면서도 두려운지 이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가! ......시라고요.”
“......!”
흡사 짐승 같은 눈동자가 이란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란은 더 저항하지 못하고 서둘러 집 밖으로 나갔다.
차에 올랐지만 분을 참을 수가 없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을 굴렀다.
“아아악! 아악!”
식식거리는 그녀의 눈에 핏발이 섰다.
***
이란이 사라지고 문이 쿵 닫히고 나자, 강진이 그제야 지음에게 시선을 두고 돌아섰다.
지음이 강진의 시선을 피해 비스듬히 서서 옷을 부여잡고 있었다.
“어떻게......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그녀가 거실에 쪼그리고 앉아 엉망이 된 케이크에 손을 뻗었다.
강진이 얼른 다가와 손이 케이크에 닿기 전에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지음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
강진은 너무 화도 나고 미안해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어깨부터 죽 찢어진 옷은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을 정도로 너덜너덜했고, 맞기라도 한 건지 한쪽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괜찮아?”
말하면서도 부끄러웠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
강진이 손을 들어 지음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네...... 괜찮.......”
지음이 고개를 툭 떨어뜨리고 말을 잇지 못하다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맞는 거라면 익숙해져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강진의 앞에서, 그의 생일날......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미안......하다, 한지음.”
“.......”
강진의 목소리가 지음의 마음속을 파고들었다.
그가 지음을 당겨 안았다.
얼마나 꽉 안았는지 그의 품에 안겨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일 기운도 없어서 안겨 있었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미안해, 미안하다.......”
“.......”
“미안해.......”
울고 싶은 건 지음이었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눈물에 꽉 잠긴 것처럼 들렸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몇 번이나...... 속죄하듯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