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94)

#55화.

지음은 창국과 헤어져 병원을 나오고, 마트로 향하면서도 내내 창국의 말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그거 알아요? 지음 씨가 강진이 형수님이랑 많이...... 닮았다는 거.」

「네?」

「처음엔 진짜 놀랐어요, 너무 닮아서.」

창국의 말에 지음이 더 놀랐다.

그러고 보니 창국뿐이 아니라 처음 온정리를 떠나올 때 정후에게도 들었던 말이었다.

「닮았다.」

그뿐인가? 이란에게도, 미림과 동기에게도 들었던 말.

그래도 괜찮았다. 세상에 닮은 사람이 어디 지음 혼자인 것도 아니고. 닮은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도플갱어니, 닮은 꼴이니 그런 말들도 있지 않은가.

그녀가 정말 놀랐던 건 그다음 이어지는 창국의 말 때문이었다.

「이런 말까지 하는 건 주제넘은 것도 알고...... 치졸한 것도 압니다. 질투가...... 더해진 거니까.」

「......?」

그의 말은 반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음은 말을 끊진 않았다. 주제넘은 그의 말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았다.

「강진이가 그 형수를...... 마음에 둔 것 같았습니다.」

「......!」

그러지 않아도 느릿했던 지음의 발걸음이 우뚝 섰다.

빵빵!

“이봐요! 대체 눈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겁니까! 죽고 싶어 환장했어요?”

“아....... 죄송......합니다.”

지음은 저도 모르게 도로까지 나와 있었다.

당황한 그녀가 얼른 꾸벅 고개를 숙이곤 인도로 들어갔다.

「......이름이 뭐야.」

강진과 온정리 펜션 안에 있을 때 그가 했던 말이 퍼뜩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 이름을 묻는 건 당연할지 모르지만, 그저 스쳐 갈 원나잇 상대라면 굳이 묻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한......지음.」

게다가 지음이 대답했을 때 강진의 눈빛과 표정이 어떠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안심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치 ‘네가 다른 누구도 아니고 ‘한지음’이라는 모르는 여자라서 다행이다.’ 라고 하는 듯한.

지음은 그동안 강진이 그녀에게 했던 말과 행동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비밀의 화원에서도 그는 이상했다.

지음이 다가서려 할 때 팔을 내뻗고 다가오지 말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비틀거렸던 강진의 모습.

그래서였을까. 지음을 통해 형수라는 사람을 보고 있어서?

혹시 강진이 선물했던 목걸이와 반지도 그 사람이 했던 건 아닐까, 그 뒤에 보인 강진의 이상한 반응을 봐선 최소 그녀가 했던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아냐...... 그건 너무 비약이야.’

지음이 고개를 도리도리 세차게 저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지음에게 선물한 것도 그렇고, 그래놓고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보는 것조차 힘들어한 것도 이상했다.

점점 지음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원래 의심이라는 녀석은 불안감을 먹고 점점 더 커지기 마련이었다.

지음의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내리던 날, 강진이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누굴...... 떠올리는 건지도.」

그땐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에 이끌려 강진과 키스하면서 그가 했던 말 같은 건 다 지워버리고 말았다.

혹시 그때의 강진은 한지음과 형수라는 분을 두고 헷갈렸던 건 아닐까.

그래서 지음을 보며 횡설수설 힘들어했던 건 아닐까.

“흐읍!”

지음은 치솟는 구토감에 인도에 선 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마음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금방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코끝이 매웠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입을 벌려 숨을 몰아쉬었다.

“아...... 나, 왜...... 이러지.......”

지음은 그냥 강진의 호의로, 서로의 필요 때문에 그와 계약서를 쓰고 거짓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뿐인데.

‘착각하지 마, 한지음.......’

그의 첫사랑과 닮았다.......

그래, 그런 게 아니라면 차강진처럼 완벽한 남자가 한지음 같은 애를 곁에 둘 이유가 없지.

그제야 지음은 정후가 아무것도 없고, 가족도 없는 제가 왜 차강진에게 잘 맞는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근데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지음이 눈을 꼭 감자, 아슬아슬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들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미쳤어, 한지음.”

지음은 얼른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아냈다.

심호흡을 하고 뻐근하게 통증이 이는 가슴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눈물 때문에 엉망이 된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천천히 마트로 향했다.

가서 무슨 정신을 재료를 골랐는지 모른다.

그의 첫사랑이 누구든, 그래서 지음과 그녀가 닮았든 아니든, 그가 어떤 생각으로 지음을 곁에 두든 말든...... 그건 지음과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냥 지음은 약속대로 1년간 계약 관계를 잘 마치고 돈 받아서 그의 곁을 떠나면...... 그뿐이다.

그런 생각으로 견디며 간신히 장을 봐서 집으로 향했다.

되도록 현재에 집중하기로 했다.

‘미역국을 끓이고 케이크를 만들고.......’

너무 긴장을 했는지 땀이 너무 나서 준비를 하기 전에 씻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욕실로 향했다

***

그 시각,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온 강진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숨을 돌렸다.

“후.......”

그러다 무심코 달력에 눈이 닿았는데.

8월 달력엔 8일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도록 새카맣게 지워져 있었다.

“.......”

그가 달력을 노려보다가 탁 책상 위에 엎어 놓았다.

8일은 그의 생일이기도 하면서...... 형과 형수의 사고 날이기도 했다.

괴로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괜히 달력에 분풀이해 두었다.

똑똑.

“네.”

“대표님.”

사무실 안으로 희라가 들어왔다, 두 손 가득 무언가를 들고서.

그녀의 뒤로 미림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대표님, 생일 축하드려요.”

“저희가 조촐하게 준비한 거예요!”

희라는 손에 케이크까지 들고 있었고, 가느다란 손목엔 선물로 보이는 종이가방도 걸려있었다.

미림 역시도 손에 선물 가방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들어왔다.

그 뒤로 정후가 따라 들어왔지만 그의 얼굴만은 어둡고 잔뜩 굳어 있었다, 마치 강진처럼.

강진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희라와 미림을 올려다봤다.

“뭡니까, 이게?”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말이 너무 서늘해서, 등줄기로 소름이 돋을 만큼이나 사나워서 희라와 미림이 멈칫했다.

“아, 그게...... 오늘 대표님 생일이시라서 축하해 드리려고 왔어요.”

“네, 아주 소소한 선물이에요. 이건 희라 언...... 아니, 김 실장님 거고 이건 제 거요.”

“.......”

강진은 책상 위에 내려놓는 희라와 미림의 선물을 보았다.

그가 뜯어볼 생각도 하지 않자, 희라가 얼른 케이크를 내려놓고 선물 포장지를 뜯었다.

작은 박스에 들어 있는 선물, 희라 것은 넥타이였고 미림의 것은 넥타이핀이었다.

“후...... 여기 회삽니다. 아직 업무시간인데 지금 두 분 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아, 그게.......”

“저희는 그냥.......”

생각지도 못하게 너무도 싸늘한 그의 반응에 당황하는데 정후가 얼른 나가라고 손짓을 했다.

“나가보세요.”

희라와 미림은 울상을 하고 쫓기듯 밖으로 나갔다.

강진이 정후를 보며 고개를 까딱 움직였다.

“네, 대표님.”

“이거...... 가져가.”

“......아, 네. 알겠습니다.”

정후가 얼른 책상 위에 너저분하게 올려진 포장지와 선물을 종이가방 안에 담아 돌아갔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정후가 잠시 서서 강진을 보았다.

“......그래도...... 네 생일이기도 해, 강진아.”

“.......”

“축하한다.”

정후가 나가고 문이 닫히자 강진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꽉 구겨 잡았다.

“하.......”

그가 잠시 숨을 고르고는 재킷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

지음은 물과 씨름을 하고 간신히 거실 밖으로 나왔다.

“......진짜 맘껏 씻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좋다.”

물론 실밥 푼 지 얼마 안 돼서 당분간은 조심하는 게 좋겠다고 했지만, 지음은 방수밴드를 큼지막하게 붙이고 마음 편히 샤워를 하고 나왔다.

지음은 드레스룸에서 단정하고 편한 원피스를 입었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반지와 목걸이를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정말 강진 씨는 날 통해...... 형수님이라는 분을 보고 있는 걸까.’

괴로운 마음에 보석을 만지작거렸다.

“사실 내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는데.......”

말 그대로였다.

강진이 지음을 통해 누굴 보고 있든, 그녀가 누구와 닮았든...... 지음과는 상관없었다.

그녀는 그냥 강진에게 1년간 고용된 사람일 뿐이니까.

지음이 반지를 손가락에 끼우고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래도...... 강진 씨가 날 위해 사준 거니까. 게다가.......”

이 반지와 목걸이, 순전히 지음을 위해 산 선물일지도 모른다.

되도록 굳은 표정을 부드럽게 만들고 준비를 마치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띵동.

“......어? 누구지? 올 사람이 없는데.”

지음은 아직 강진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는 걸 떠올리며 거실로 나갔다.

“정후 오빤가.......”

띵동띵동.

“네, 누구세요?”

지음이 미처 확인도 하지 않고 문을 열었는데, 문 앞에 있는 사람은 차이란이었다.

눈빛을 서로 교환한 두 여자가 멈칫했다.

지음이 뒤로 주춤 물러나며 인사를 했다.

“아, 고모님....... 안녕하세요.”

“고모......님?”

지음을 보던 이란이 싸늘한 얼굴로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지음 씨가, 네가 왜 여기 있지? 여긴 우리 강진이 집인데?”

“네? 그게.......”

이란이 소파 테이블 위에 케이크와 선물상자로 보이는 작은 상자를 내려놓고 지음을 향해 휙 돌아섰다.

“오늘 우리 강진이 생일이라 내가 직접 챙겨주려고 왔더니...... 네가 왜 여기에 있냐고!”

“.......”

지음은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러대는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무슨 말이든 지금 상황에선 아무 소용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았고.

그녀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이란이 지음을 노려보더니 주방으로 향했다.

“이게 대체...... 뭐야?”

지음이 이란이 있는 주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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