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하아, 하.......”
지음과 눈이 마주치자 강진이 성큼성큼 빠르게 다가섰다. 꼭 급하게 지음을 쫓아 나온 것처럼 보였다.
그가 순식간에 지음의 앞에 섰다.
아직 그의 머리카락에서는 물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똑, 똑. 떨어지는 물방울을 보며 지음이 강진에게 물었다.
“왜 나왔어요?”
강진이 지음의 뒤, 동희가 사라진 쪽을 힐끗 보았다.
“친구는 갔나?”
“네.”
“그럼 좀 걸을까?”
강진이 지음의 곁으로 와 섰다.
강진은 지음의 걸음걸이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그를 따라 걸으면서도 지음은 내내 궁금했다.
차강진이 왜 이렇게 급하게 따라 나왔을까. 머리에 물도 채 말리지 못하고.......
“김동희 씨.”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건 강진이었다.
“?”
“......김동희 씨랑 친해?”
“아, 네.”
“얼마나? 어떻게 알게 된 친구야?”
강진의 목소리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그를 올려다봤다.
“그냥...... 보육원에서 같이 지냈던 친구예요. 동희도 저도 가족 없이, 그러다 보니 둘이 가족처럼 지냈어요.”
“가족처럼이라...... 제일 친하다는 얘긴가?”
“네, 뭐.”
제일 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제일이라는 건 그다음도 있다는 얘긴데 지음에겐 동희 말고는 다른 친구도, 가족도 없었으니까.
“......단지 내 편의점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는 건 어떻게 된 거야? 원래 여기서 일하던 건 아니었을 거 아냐?”
“네. 저 올라올 때 같이 와서 구한 아르바이트 자리래요.”
“으음.......”
지음의 말을 들을수록 강진의 얼굴은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음은 그의 말이 아리송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그런 걸 묻는 걸까.’
그것도 강진 성격과 달리 계속해서 집요하게.
지음은 아직도 그가 자신을 미워하는 건지 아니면 믿지 못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동희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부터 그의 얼굴이 그리 밝지 않아서 걱정이 되었다.
“고마워요.”
“뭐가?”
“그 일, 동희가 하게 해 줘서요.”
“당신이...... 원하니까.”
“.......”
강진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지음은 뭐라고 더 설명을 해야 그의 마음이 풀릴까 고민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마음이 어떤지 모르니 뭐라고 말을 할지 모르겠고, 말재주가 없으니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란 어려울 거란 판단이었다.
지음이 강진의 마음을 재어보느라 머릿속이 복잡했다면 강진 역시 그녀를 향한 제 마음을 어찌할 줄 몰라 복잡했다.
분명 동희를 보던 자신의 감정은 질투였다.
‘내가...... 그 어린 남자를 상대로 질투를 한다고?’
기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해 놓고 그녀의 입에서, 그게 비록 지음과 소꿉친구에 어린 남자라 하더라도...... 다른 남자의 이름이 나오자 속에서 불이 끓어올랐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음을 뚫어지라 보는 그 시선이 너무 뜨거워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려는데 톡, 뭔가가 이마를 두드렸다.
“아......!”
여름의 소나기였다.
강진이 하늘을 보더니 지음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상황인지 지음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강진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로 달렸다.
그들은 커다란 나무 밑으로 향했다.
다행히 나무가 얼마나 큰지 내리는 비가 나무에 걸려 요란한 소리만 나고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무 아래로 들어가자 강진이 손을 놓았다.
“하아, 하.......”
급하게 뛴 지음이 숨을 골랐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비에 맞아 젖어있었다.
강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툭툭 털어주었다.
“.......”
“젖으면 안 되는데...... 소나기가 오네.”
강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깔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듣기에 좋았다. 지금처럼 비가 오는 여름밤에 듣기엔 더더욱.
심장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 아무 말도 못 하고 강진을 올려다봤다.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치는 괴로움을 보고 살짝 당황했다.
다행히 그는 별말 없이 지음을 바라보기만 했다.
강진은 지음의 상처에 혹시나 물이라도 들어가는 건 아닌가 걱정하며 빗물을 털어주다가 멈칫했다.
그녀의 얼굴에 은주의 얼굴이 겹쳤다.
“......!”
은주.......
이름 한 번 제대로 불러보지 못한 첫사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은주의 얼굴이 지워지듯 사라지고 지음의 얼굴만 또렷하게 보였다.
‘아...... 왜 이러지......?’
당황한 강진이 고개를 흔들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앞에서 강진을 올려다보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 여자는...... 지음이었다.
은주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의 앞에는 지음이었던 것처럼.
“......?”
강진이 고개를 마구 저었다가 눈을 깜빡이고, 눈을 비비기도 했다가...... 뭐가 잘못된 것처럼 얼굴을 잔뜩 찌푸리기도 했다.
지음이 당황하며 그를 보고 있는데 그의 큰 손이 지음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차가운 지음의 얼굴에 따뜻한 강진의 손이 닿았다.
얼굴을 쓰다듬던 그가 손가락으로 지음의 도톰한 이마를 건드렸다. 이마에서 콧날로 입술로.......
지음은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그를 보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지음의 입술을 문질렀다. 보드랍고 통통한 그녀의 입술이 마구 짓눌러졌다.
강진이 꽉 문 잇새 사이로 하아, 한숨을 내쉬었다.
강진의 큰 손이 지음의 어깨에 닿았다.
그가 지음의 양어깨를 꽉 붙잡았다. 지음은 그 힘에 밀려 커다랗고 두툼한 나무에 툭 등을 기대고 섰다.
그가 괴로운 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모르겠어.”
“......?”
비가 오는 데다 그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고 있었고, 강진은 고개를 숙인 채로 한숨 섞어 말을 하니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숨죽여 그의 말을 들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내가 누굴...... 떠올리는 건지도.......”
강진은 점점 어깨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은주......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금방 지워질 사람이었던가.
혼란스럽기는 강진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린 시절, 강진이 은주를 마음에 담아둔 건 그녀가 그에게 다가와 상처에 손수건을 매어줬던 그 기억 때문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시절 강진의 마음에 들어왔던 여자가 은주가 맞나 흔들렸다.
사실 그 의심은 형과 은주의 결혼식 날부터 시작되긴 했다.
은주는 정성스럽게 이니셜까지 수 놓인 하얀 손수건을 까맣게 잊은 듯, 손수건을 내미는 강진을 보며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뒤에 은주와 형을 잃고 좌절한 채 무너져 있던 강진의 앞에 나타난 지음.
은주와 너무나 닮은 그녀를 보고 강진은 흔들렸다. 처음엔 은주 대신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강진이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가 고개를 들어 지음을 보았다.
“강진...... 씨?”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어 지음이 당황하는데, 강진이 차가워진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이제 내 첫......사랑의 주인공이 은주인지 당신인지.......’
“알 수 없지만...... 가보기로 했다.”
‘마음을 막지 않기로...... 했다.’
“......?”
강진이 나무에 기대선 지음에게로 몸을 굽혔다.
놀라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을 한입에 삼켜버렸다.
뜨겁고도 달콤한 지음의 숨결이 강진에게 넘어왔다.
그녀가 누구이든...... 강진은 지금, 이 순간 온전히 지음을 느끼고 있었다.
***
오늘은 지음이 상처의 실밥을 푸는 날이자, 강진의 생일이었다.
‘출근할 때 챙겨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음은 그의 선물을 뭐로 준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민 중이었다.
오늘따라 강진은 슬프고 힘들어 보였는데, 지음으로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녀올게.」
회사 일이 잘 안 풀리는 건가 싶어 입술을 잘근거리던 지음이 강진을 불렀다.
「저기.......」
「?」
「아, 오늘은 좀...... 일찍 와 주세요.」
「그럴 거긴 하지만...... 왜?」
「네? 그...... 오늘 같이 저녁...... 먹었으면 좋겠어요.」
「그래, 그러자.」
그렇게 강진은 별말 없이 출근을 했다.
남아 있던 지음은 얼른 병원에 다녀오기로 했다. 다녀오는 길에 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 실밥을 푸는 건 순식간이었다.
잘 아물었다는 민지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진료실 밖으로 나왔는데 창국과 마주쳤다.
“어? 지음 씨? 오늘 실밥 풀었군요?”
“아, 안녕하세요.”
“그냥 가려고 했어요?”
“.......”
“서운하네.”
창국이 부드럽게 웃었다.
“차 한잔하고 가요. 비록 자판기 카페지만요.”
“네.”
지음은 창국과 함께 대기실로 향했다.
음료수를 마시다가 지음이 창국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나한테요? 아, 그럼요! 뭐든지 물어보세요.”
평소 질문같은 게 없던 지음이 물어볼 것이 있다고 말을 하자, 창국이 기대하는 얼굴이 되었다.
입을 열어 막 물어보려는데 강진에게 메시지가 왔다.
[뭐 해?]
지음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창국이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봤다.
“보기...... 좋네요. 강진이에요?”
“네? 아, 네.......”
“그런 줄 알았어요. 지음 씨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져서. 그런 얼굴도...... 지을 줄 아네요, 지음 씨.”
씁쓸한 얼굴로 말하는 창국을 보다가 지음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오늘이 강진 씨 생일인데......, 뭘 해줘야 할지 모르겠어서요.”
“아...... 그렇구나. 강진이 생일......이군요.”
“왜요?”
확 어두워지는 창국을 보며 지음이 물었다. 그가 얼른 표정 관리를 했지만, 쉽게 밝아지지 않았다.
“사실 오늘...... 생일이기도 하지만 강진이 형과 형수가 죽은, 사고 날이기도 해요.”
“아.......”
그렇다, 잊고 있었다.
정후에게 들었으면서도.......
사고가 떠올라 생일도 제대로 지내지 못하고 힘들어해서, 이듬해 강진을 데리고 온정리로 왔다고.
그래서 마음 약해진 강진이 지음을 안았다고도 생각했으면서.
지음이 덩달아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자, 창국이 얼른 미소를 지었다.
“그럼 지음 씨가 만든...... 케이크 같은 거 어때요? 미역국도 좋고.”
“아.......”
“선물보다 그런 게 더 의미 있을 거 같아요.”
지음은 왜 그 생각을 하지 못했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그거 알아요?”
“네?”
“지음 씨가...... 강진이 형수님이랑 많이...... 닮았다는 거.”
“......네?”
예상하지 못한 창국의 말에 지음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