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창국과 헤어진 지음은 화장실에 들러 얼굴을 확인하고는 병원 밖으로 향했다.
얼마 안 있어 강진의 차가 그녀의 앞에 와 섰다.
“한지음, 타.”
강진은 지음이 타서 벨트를 하는 걸 찬찬히 지켜보았다.
“진료는 잘 받았어?”
“네.”
“또 언제 오래?”
“내일모레요.”
“상처는 좀 어떻대? 내가 함께 가 봤어야 하는데.”
“회사 일 안 바쁘세요? 출장에서도 그냥 오셨는데.......”
나 때문에.
지음은 마지막 말은 입 안으로 삼켰다.
강진은 덤덤한 얼굴로 부드럽게 차를 돌렸다.
“다쳤잖아, 당신이. 병원 다니는 약혼녀, 데려다줄 정도 시간은 내야지.”
‘약혼......녀.’
정작 말을 꺼낸 강진은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지음의 맘속은 시끌시끌했다.
그러다 강진이 하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게 어때?”
“네?”
“회사 말이야. 그만두는 게 어떤가 해서.”
“싫어요.”
“.......”
“다음 주에 실밥만 풀면 바로 나가도 돼요, 사실. 강진 씨가 한 달이나 쉬라고 했잖아요. 나는 다니고...... 싶어요, 계속.”
정말 다니고 싶은 모양인지 평소엔 두어 마디 듣는 것도 힘들 만큼 말이 없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제 의견을 빠르게 피력하고 있었다.
강진은 뭐가 어쨌든 그녀가 하고픈 말을 한다는 게 기분이 꽤 괜찮았다.
“그러면 비서 겸 기사 붙여줄게.”
하지만 그건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매번 데려다줄 수 없는 일이고 연락도 잘 안 되는 사람인데,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필요 없.......”
“필요해.”
“차도 없는데....... 그리고 병원 말고는 다닐 곳도 없어요, 병원도 버스 한 번이면.......”
“싫어?”
강진의 목소리가 고집스럽게 바뀌자 지음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면 내가 매일 이렇게 데려다주고 데려오고 할까?”
그럴 줄 알았어.
지음이 미간을 찌푸렸다.
“꼭...... 선택해야 하나요?”
“응.”
“기사 같은 거...... 불편해요, 나.”
“걱정 마. 당신 불편하게 안 하는 사람으로 고용할 테니까. 고용하기 전에 당신이 직접 인터뷰하면 되고.”
강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가 집 앞에 섰다.
지음은 손을 맞잡고 머뭇거리다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럼...... 제가 편한 사람으로 해도 되나요?”
“당연하지. 왜,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김......동희라고.......”
김동희?
강진이 어쩐지 익숙한 이름을 되뇌었다.
집 앞에서 강진과 헤어진 이후에 지음은 회사로 돌아가는 강진의 차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서 있었다.
까맣게 점으로 멀어지는 차를 보다가 사라지고 나자 동희에게 전화를 했다.
-어, 지음아.
“언제 끝나?”
-나? 거의 끝나가는데 왜?
“이따가...... 저녁에, 우리 집으로 와.”
-응? 너, 너......네 집으로?
“응.”
지음의 말에 동희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왜?”
-그게...... 그냥 밖에서 만나면 안 돼?
“강진 씨가 너...... 한 번 보쟤.”
-나, 날? 왜? 아, 나는 좀...... 그분 무서운데.
지음이 후, 한숨을 쉬었다.
동희는 워낙 겁이 많은 성격이긴 했다.
“겁먹을 거 없어, 너한테도 나쁜 얘긴 아니니까.”
***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온 미림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그래서?”
이란에게 지음에 대한 얘길 하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내가 진짜 짜증이 나서....... 그거 조금 찢어진 거로 강진 오빠가 얼마나 화를 냈는지 몰라. 희라 언니랑 나 세워두고 막, 걔한테 실수를 하니 마니. 아후 진짜.”
“흠.......”
정말인 건가?
이란은 미림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아리송해졌다.
은주와 닮은 애를 데려다 놓은 것도 이상했는데, 그 애의 효용 가치는 기막힐 정도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강진이 지음을 싸고돈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미림의 푸념은 끝나지 않았다.
“그깟 년이 뭐라고. 짜증 나, 진짜. 엄마! 정말 강진 오빠가 그 거지 같은 애랑 결혼하게 둘 거야?”
“.......”
이란은 미림의 푸념을 가만히 듣다가 말을 돌렸다.
“그래, 가만있어 봐. 엄마도 생각이 있으니까. 그리고 너도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선볼 준비 잘하고.”
“선? 나 선보는 거 싫은데.”
미림이 얼굴을 찡그리다가 이란의 팔에 매달리며 배시시 웃었다.
“근데 누군데? 나도 아는 집이야? 잘생겼대?”
***
강진의 집도 예전과 달리 조금은 소란스러웠다. 생전 오지 않던 손님이 왔으니까.
동희는 소파 끝에 앉아 무릎에 양팔을 올리고 있었다.
“편히 앉으세요.”
“네? 아, 네.......”
강진의 말에 동희가 긴장을 풀고 소파에 엉덩이를 좀 더 붙이고 앉았다.
지음이 허브차 두 잔을 가져와 강진과 동희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신은?”
“아, 난...... 마셨어요.”
지음의 대답에 강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희를 보았다.
“김동희 씨?”
“네, 네.......”
강진은 지난번에 정후와 함께 만나러 갔던 걸 기억해냈다. 왜 이름이 낯익은가 했더니 그때 들어서였구나.
“지금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네. 다른 데로 옮기려고도 하고 있어요.”
“아, 그렇습니까?”
“네네.”
지음은 오늘따라 더 멍하게 구는 동희를 보며 한숨이 나왔다.
저러다간 오늘 인터뷰도 탈락할지 모르겠다.
지음은 기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낯선 사람하고 다니는 건 불편하고 성가셨다.
강진의 말대로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다녀야 한다면 동희가 적격이었다.
불안한 지음과 달리 강진은 동희를 찬찬히 보다가 말했다.
“그 일을 계속할 생각이 없다면 그만두는 건 어떻습니까?”
“......네?”
“동희 씨가 지음이 기사가 되어줬으면 좋겠는데. 월급은 기존에 받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겁니다.”
동희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강진과 지음을 번갈아 보았다.
“그게...... 편의점을 그만두면 제가 지낼 곳이 없어요. 편의점 사장님께서 숙직실에서 지내라고 해 주셔서.......”
“아, 그건 걱정 마십시오. 정후에게 말해둘 테니. 그것 말고 이 일을 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강진의 말에 동희가 넋이 나간 채 고갤 저었다.
“아......니요.”
“좋습니다. 그럼 이번 달까지만 편의점에서 일하고, 앞으론 지음이 기사로 일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보통 기본적으로 회사 출퇴근은 나랑 하겠지만, 피치 못한 사정으로 내가 함께하지 못할 땐 동희 씨가 챙겨주면 됩니다. 오늘처럼 병원에 다녀온다거나 일이 있을 때도. 이 사람의 발이 되어주면 됩니다.”
강진이 품에서 명함을 꺼내 동희에게 건넸다.
“.......”
그러겠다, 아니다 대답을 하면 좋으련만. 동희는 그의 성격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다행히 명함은 받아들었다.
잠시 그의 답을 기다리던 강진도 동희가 파악이 됐는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하는 걸로 알겠습니다.”
“......네!”
강진이 일어서자 지음과 동희 역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난 좀 씻어야겠는데.”
강진이 지음을 보며 말하자, 동희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 그럼 전...... 안, 안녕히 계세요.”
지음이 작게 한숨을 쉬고 강진을 보았다.
“배웅......하고 올게요.”
“그래.”
지음의 손이 동희의 어깨를 툭 밀었다.
그녀의 손에 떠밀린 동희가 어정쩡하게 밀려나고 둘은 이내 나란히 뒷모습을 보였다.
“.......”
씻으러 가겠다던 강진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둘이 투덕거리며 가벼운 스킨십을 하고 대화를 나누면서 가는 모습을 보는데, 뭔가 기분이 좀...... 이상했다.
강진은 밀려드는 묘한 감정을 뒤로 한 채 얼른 욕실로 향했다.
***
집 밖으로 나가자 동희가 크게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었다.
“우와, 진짜...... 떨려서 죽을 뻔했다!”
“.......”
지음은 쯧쯧 혀를 차고 천천히 걸었다.
동희가 가슴을 치며 얼른 지음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너무 무서웠어. 사장님 진짜...... 잘생겼더라.”
무서운 건 모르겠고 잘생긴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 또 너 병원 갔을 때 말리지 않은 것 때문에 부른 줄 알고 엄청나게 긴장했잖아.”
건물을 빠져나오자 지음이 동희를 보았다.
“네가 해.”
“응?”
“기산지 뭔지 하는 거 말이야. 네가 하라고.”
“내가......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난 지금 편의점에서도 맨날 혼나는데.......”
동희는 말하면서도 거의 울 것처럼 보였다.
“바보야, 그게 왜.”
뭐가 그렇게 두려운 게 많은지. 지음은 동희가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한 번도 안 해 본 일이라서.”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도전이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지금 지음이 강진의 곁에서 제 마음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채 서 있는 것처럼, 동희도 그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냥 운전하는 거야. 그리고 뭐 딱히 여기저기 다닐 것도 아니고.”
“응, 알았어. 지음이 네가 하라면 할게.”
지음의 말에 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할게, 가.”
“응, 그래. 간다.”
동희가 지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음은 그냥 그곳에 서서 동희가 사라지는 걸 한참이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돌아서는데.
“하아, 하.......”
“......?”
저쪽에서 강진이 성큼성큼 지음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약간...... 다급하게 나온 것처럼 보였다.
지음은 굳은 듯 서서 그가 제게로 가까워지는 걸 보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에 맞춰 심장이 점점 크고 빠르게 뛰었다.
쿵쿵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