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3/94)

#52화.

희라에게서 돌아서서 강진의 사무실로 향하는 정후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정말 김희라, 박미림...... 짓이었어. 후...... 대체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나 아는 걸까.’

정후가 미간을 찌푸리다가 심호흡을 하고 강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대표님.”

“어, 박 비서.”

오늘도 여전히 강진은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그러다 정후가 들어오는 걸 보고 잠시 고개를 들었다.

“지음이는? 병원 지금 가나?”

“아뇨.”

“?”

곧바로 이어지는 정후의 부연 설명이 없자, 강진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한발 늦었더라고요.”

“......역시 내가 갔어야 하는데.”

강진이 일어나자, 정후가 다가와 책상 위에 서류를 올려놓았다.

“놔두십시오. 이미 병원이래요. 오늘 오후에 대표님 미팅도 있습니다. 잊으신 건 아니죠?”

“......알아.”

“출장에서도 그냥 오셨잖습니까. 지금.......”

정후가 앞에 쌓아 둔 서류를 툭툭 두드렸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이만큼입니다. 아십니까?”

강진이 가볍게 인상을 썼다.

“많이 다친 거 같던데, 어쩌다 그랬는지 들었어? 어디서 넘어졌어?”

“어....... 지음이가 말...... 안 해요?”

“응. 얘기할 시간도 없었고.”

강진의 말을 듣던 정후가 멈칫했다.

“왜 얘기할 시간이 없어요?”

집에서 아침 출근 전까지 함께 있으면서 그거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는 게 말이 되나?

정후의 호기심 가득한 눈빛을 보며 강진은 어제의 섹스를 떠올렸다.

처음엔 순수한 마음이었다, 씻는 게 불편할 테니 돕겠다는 마음.

하지만 들어가자마자 후회했다. 옷을 흠뻑 적신 채 서 있는 그녀를 보자마자 허벅지 사이가 뻐근해졌다.

결국엔 샤워부스 안에서 그녀를 탐하고 말았다.

“.......”

강진의 미간이 일그러지자 정후가 질문을 접고 대답했다.

“지하창고에...... 뭐 가지러 갔다가 계단에서 넘어진 모양입니다.”

“앞으론 지하창고에 있는 서류나, 필요한 건 언제건 다 올려놔. 괜히 지음이 보내게 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강진이 정후의 말을 곱씹다가 그를 보았다.

“근데 엘리베이터는...... 어디에다 두고 계단에서 넘어져?”

“아, 그게.......”

정후는 그날 엘리베이터 앞에 붙어 있던 종이를 떠올리며 미림이나 희라가, 아니면 둘이 합작해서 했다는 걸 알았지만.......

“그때 뭐 좀...... 문제가 있었나 봅니다.”

“무슨 문제?”

그가 머뭇거리자 강진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제대로 얘기해, 너 아니어도 알 방법은 많아.”

강진의 목소리가 낮게 내리깔리자, 정후는 어쩔 수 없이 더듬거리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듣는 동안 강진의 얼굴은 카멜레온이 된 것처럼 시시각각 변했다. 두려움이 떨며 말을 끝냈는데 강진이 담담하게 화제를 돌렸다.

“지음이 부모님...... 한 번 만날 시간 약속 좀 잡아. 지음이 모르게.”

“아, 알겠습니다.”

“한 가지 더.”

“네?”

“지음이가 타고 다닐 차 한 대 알아보고.”

“차요? 지음이 면허 없을 건데, 자전거 면허는 있어도.”

강진은 웃지 않았다. 정후가 민망한 듯 슬쩍 웃었다.

“......농담인데 안 웃으시네.”

“알아봐. 기사야 붙이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강진이 재킷을 집어 들고 일어났다.

“어디 가시게요?”

정후의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그는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그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향한 곳은 기획팀 사무실이었다.

강진을 본 희라와 미림의 얼굴이 환해졌다.

“어머, 대표님!”

희라가 벌떡 일어나서 강진에게로 다가섰다.

한껏 기대감에 차오른 얼굴로.

희라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선 강진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김 실장님, 한지음 씨는 당분간 못 나옵니다.”

“아...... 네. 들었어요.”

오자마자 그의 입에서 지음의 이름이 나오자, 희라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그랬다간 미림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강진이 알아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괴롭힐 때는 그런 생각도 않고 저지르고는 이제 와 걱정하는 꼴이라니.

자신이 한심했지만 그만큼 한지음이 싫었다.

“안 그래도 들었습니다. 많이 다쳤나요? 걱정이네요.”

“지하창고에는 뭘 가지러 보낸 겁니까?”

“네? 아...... 그게.......”

강진이 그렇게 물을 거라는 생각을 못 하고 있던 희라가 당황해서 머뭇거리자, 그가 미림을 향해 손짓을 했다.

“박미림 씨도 이리 오시죠.”

“......네, 대표님.”

“다시 묻겠습니다. 어차피 기획팀엔 한지음 씨 포함 세 분이니, 두 분 중 한 명은 알고 있겠죠. 아니면 둘 다 알거나.”

“.......”

“지하창고, 평소에 잘 쓰지도 않는 창고엔 대체 뭘 가지러 보낸 겁니까?”

“그게.......”

희라와 미림이 서로를 마주 보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두 분, 한지음 씨한테 실수하는 일, 없도록 하라고.”

“.......”

“내가 모르는 중요한 서류가 창고에 있었나 봅니다? 생전 쓰지도 않던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고, 그러다 창고 문이 저절로 잠기고?”

강진은 전부 다 알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희라와 미림의 얼굴이 점점 새하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앞으로 창고에서 뭔가 필요하다면 제게 직접 말씀하시죠. 아시겠습니까?”

“.......”

“다시 말해줘? 한지음 씨, 건드리지 말라고.”

희라는 분하고 성질나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입술을 꽉 물고 참아내는데, 미림이 뭔가 억울함을 표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강진이 미림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박미림 씨, 할 얘기 있습니까?”

“......아뇨.”

미림은 차마 화가 치민 강진에게 뭐라 변명을 할 수 없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

정후와 전화를 끊고 곧장 병원으로 온 지음은 성형외과 진료실 침상에 누워있었다.

“물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세요. 격렬한 운동이나 수영도 당분간 참으시고요. 잘하고 계시죠?”

“......네.”

지음이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수영은 몰라도 격렬한 운동은...... 어제도 했으니까. 더구나 수증기 가득한 샤워실에서.

그녀의 걱정과 달리 민지는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다음 주엔 실밥 풀 수 있을 거예요. 예쁘게 잘했어요, 내가 꿰매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감사합니다.”

소독은 금방 끝났다.

“자, 다 됐어요.”

민지의 말에 지음이 몸을 일으켰다.

“연고는 가져갔죠?”

“네.”

“그건 실밥 풀고 나서 바르는 거니까 잘 가지고 계시고. 당분간은 땀, 물 조심하세요.”

민지가 지음을 향해 싱긋 웃었다.

“네, 감사합니다.”

몇 마디 더 나누고 진료실을 나섰다.

병원의 대기실을 지나 로비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지음을 불렀다.

“어? 지음 씨?”

“......?”

저를 부르는 소리에 지음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

잠시 후 지음은 창국과 함께 병원 휴게실로 향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데, 창국이 캔 음료를 테이블 위로 건네고 옆에 앉았다.

“소독하러 온 거예요?”

“네.”

“어디 좀 봐요. 아...... 역시 멍이 심하게 들었네요. 상처가 크더니.......”

창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음을 살폈다.

“아팠겠어요, 정말.”

“괜찮아요.”

“조심 좀 하시죠. 강진이가...... 많이 걱정하겠어요.”

“.......”

걱정하는 걸까.

지음은 캔에 맺힌 물방울을 손톱으로 긁으며 강진의 표정을 떠올렸다.

하지만 문제는 지음을 향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던 모습보다 어제 샤워부스에서 그녀를 잡아먹을 듯 달아오르는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는 거?

“아.......”

“왜요?”

저도 모르게 탄식이 터지자, 창국이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네. 그래도...... 강진이가 지음 씨 만나고 많이 밝아진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네?”

창국의 말에 지음이 시선을 들어 그를 보았다. 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참 신기한 일이에요.”

“아...... 그럴 리 없는데.......”

“네?”

지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녜요. 원래 강진 씨는 잘...... 안 웃더라고요.”

강진은 매번 지음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눈썹을 일그러뜨리거나, 고갤 숙이고 한숨을 쉬거나, 폭발하듯 화를 내거나, 이를 꽉 물거나.......

“아, 그게.......”

창국이 씁쓸한 표정으로 지음을 보았다.

“강진이도 예전엔 잘 웃기도 하고 그랬어요.”

“아.......”

“강진이 형이자 제 친구 민준이....... 민준이에 대해서는 들었죠? 민준이를 잃고 너무 힘들어했어요.”

창국의 말에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진이가 민준이를 많이 의지했거든요. 참 따뜻하고 좋은 사람이었는데, 민준이가.”

“.......”

“민준이랑 제수씨.......”

창국은 제수씨라는 얘길 하며 지음을 보았다.

강진의 형수 은주와 너무나 닮은 여자.

“형수와 형을 한꺼번에 잃은 충격이....... 하, 저는 사실 상상도 안 갑니다.”

지음은 말을 얹지 못했다.

정후에게 들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도...... 강진이 짊어져야 할 그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울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한동안 얘길 나누던 지음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제 전 가볼게요.”

“아, 너무 오래 붙잡아놨네요, 제가. 또 언제 와요?”

“모레요.”

“이 시간?”

“네? 아, 네.”

“알겠습니다.”

창국이 지음을 보며 웃는데 강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야?

“병원이에요.”

-거기 있어.

“네?”

-금방 가.

강진의 말에 지음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아니, 저기...... 오지 않아도.......”

하지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강진이에요?”

“네.”

“데리러 온대요?”

“......네.”

창국의 물음에 지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괜히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그것 봐요. 강진이...... 많이 변했어요, 지음 씨 덕에.”

그럴 리가.......

지음은 강진과 그녀가 계약으로 묶인 사이일 뿐이라는 걸 떠올리며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창국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빠져드리겠습니다.”

창국이 뒷모습을 보이며 멀어지는 걸 보면서도 지음의 머릿속은 강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음 때문에 변했을지도 모르는 차강진.

지음의 심장이 두근두근...... 조금은 빠르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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