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94)

#51화.

지음은 강진이 출근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잘 쉬고 있어.”

“출근해도 되는데요.”

재킷을 걸치던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한 달이나 빠지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가서 크게 힘들게 하는 일도 없는데요.”

지음의 말에도 강진은 단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내가 대표야.”

알죠, 당신이 대표인 건.

지음은 희라와 미림의 날카로운 목소리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두려운 건 아니었지만, 다시 출근을 하는 날엔 귀찮을 거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할까 봐?”

“......아뇨.”

강진이 지음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자, 지음이 물러났다.

“대신 괜찮아지면 바로 회사 나가게 해 주세요. 한 달 전이라도.”

“눈을 그렇게 해서?”

안 그래도 오늘 거울을 보고 놀란 참이었다. 상처가 난 부위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어서 왼쪽 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았다.

강진의 말에 지음이 손을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바로 강진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자꾸 만지지 마.”

“.......”

“게다가 씻지도 못하잖아, 혼자. 회사를 어떻게 가겠다는 거야.”

지음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어제 일이 떠올라서.

시간이 오래 걸려도 조심스럽게 샤워를 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강진이 갑작스럽게 들이닥치지 않았더라면.......

샤워를 하던 중에 욕실 부스에서 서서 섹스를 하다니.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한 일이었던가.

지음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지자, 강진이 놓치지 않고 피식 웃었다.

“왜. 뭐 생각나는 게 있나 봐?”

“......다녀오세요.”

“이상한 소리 말고 회사에나 가라?”

“그런 말 안 했어요.”

지음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강진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발 물러났다.

“그래. 혹시라도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해.”

“네.”

“내가 못 받을 수 있으니 그럼 정후한테 연락하면 돼.”

지음이 그러겠다고 하는데도 강진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몇 번이나 집 안에 혼자 서 있는 그녀를 돌아봤다.

아쉬운 표정으로 문을 열던 강진이 또 뭔가 떠올랐는지 지음을 보았다.

“아, 병원은 정후 보낼 테니까.......”

“괜찮아요. 저 혼자도 갈 수 있어요. 문제 있으면 정후 오빠나 강진 씨한테 꼭 전화할게요.”

“......그래.”

강진이 밖으로 나가며 무거운 문이 쿵 닫혔다.

지음은 그제야 몸을 돌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강진을 배웅했지만,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해도 어제 일이 떠올랐다.

부스에 지음을 밀어 넣고 그녀의 다리를 잡아 올리고 아래가 화끈할 정도로 박아 올렸다.

몸이 들린 채로 그의 어깨를 악물며 얼마나 소리를 질러댔는지.......

생각할수록 부끄러워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몸이 뜨거워졌다.

몸이 어제 강진의 손길, 그의 몸을 기억하는 걸까.

“아...... 왜 이러지.”

지음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손등을 댔다가 손부채질을 했다.

순간 뒤에서 띠리릭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지음이 돌아서는데 방금 출근했던 강진이 성큼성큼 거실 안으로 들어섰다.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이를 꽉 다물고 다급히 들어오던 강진이 순식간에 지음의 앞에 우뚝 섰다.

그의 커다란 손이 지음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그대로 강진의 긴 속눈썹이 스르르 감기고 그의 입술이 지음의 입술에 내려앉았다.

“으읍.......”

강진의 혀가 지음의 입술을 핥고 당황해서 벌어지는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왔다. 내뱉는 지음의 숨결을 삼키고 그녀의 혀를 얽으며...... 짙은 키스가 이어졌다.

***

불꽃처럼 뜨거웠던 아침 출근 시간이 끝나고 지음은 병원에 나가려고 준비 중이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가려는데 정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음아, 집이지?

“네.”

-내가, 어...... 좀 이따 회의 마치고 갈게. 같이 병원 가자.

“올 거 없어요.”

-뭐? 왜? 병원 가야 하잖아.

지음이 소파에 올려둔 가방을 집어 들었다.

“혼자 갈 수 있어요. 사실 지금...... 병원이에요.”

-뭐? 벌써?

“네, 그럼요. 병원이에요.”

지음은 현관문이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닫으며 목소릴 높였다.

-아...... 그럼 이따 끝날 때 데리러 갈게.

-박 비서님.

지음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저 휴대전화 건너에서 희라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후가 정신없는 틈을 나서 지음이 얼른 말을 마무리했다.

“아녜요. 괜찮아요, 저. 진료받아야 하니까 오빠도 일 보세요. 걱정 말아요.”

못 미더워하는 정후의 말을 자르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안 그랬다간 정말로 병원으로 올 것 같았다.

밖으로 나간 지음이 편의점으로 향했다.

방수되는 밴드를 고르고 있는데 동희가 그녀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너...... 괜찮아?”

“뭐가.”

“얼굴이 왜 그래? 다친 거야?”

“응.”

“어휴, 어쩌다가! 멍도 많이 들었고...... 아프겠다.”

아프겠다는 동희 얼굴이 더 아파 보여서 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고 상품을 고르는데도 동희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자, 지음이 멈춰 섰다.

“왜 이렇게 쫓아다녀? 뭐 할 말 있어?”

“그게.......”

“?”

동희가 풀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푹 숙였다.

“......차강진...... 그 사람이 찾아와서 어쩔 수 없이...... 얘기했어.”

“알아.”

그랬으니 강진이 병원 앞까지 왔겠지. 그 병원은 정후에게도 말하지 않은 건데.

“아니, 나 진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정후 형이랑 같이 왔어. 너 어딨냐고 엄청 무섭게 물어봐서...... 어쩔 수 없이. 진짜 말 안 하려고 했어, 진짜야. 그래도, 다른 얘긴...... 안 했어.”

“.......”

“그냥 아줌마랑 아저씨가 어디에 있다, 병원에 있다 정도만.......”

“알아.”

“응. 미안해, 지음아.”

미안하긴.

지음이 동희에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을 해 주지 못해서 그렇지 항상 고마운 마음이 컸다.

“괜찮아. 그보다 그 후로...... 연락 안 왔어?”

“아줌마?”

스치듯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 말만으로도 동희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응, 아직. 아직 안 왔어. 연락 와도 내가 절대 너 연락처는 말 안 할 거야.”

“......그래.”

지음은 물이 들어가지 않게 붙일 수 있는 큰 방수밴드 몇 개를 사서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지음아, 너...... 정말 괜찮은 거지?”

지음은 동희의 말에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담아둔 봉투를 들고 나갔다.

***

정후는 양팔에 서류를 잔뜩 들고 지음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그럼 이따 끝날 때 데리러 갈게.”

이미 병원이라니, 집에 데려다주기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강진의 말로는 얼굴도 많이 부었다는데.

그때 정후의 뒤에서 또각또각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희라였다.

“박 비서님.”

-아녜요. 괜찮아요, 저. 진료받아야 하니까 오빠도 일 보세요. 걱정 말아요.

“뭐? 아니.......”

정후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음이 얼른 말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희라가 다가와 정후를 살폈다.

“뭐야?”

“......뭐가요, 실장님?”

정후는 전화를 끊고 주머니에 넣으며 모른 척했다.

희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야? 데리러 가고 어쩌고 하던데. 한지음 걔지?”

“......실장님.”

“왜?”

희라는 정색을 하는 정후의 얼굴을 보며 멈칫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표정, 오랜만인데.

“여긴 회삽니다. 아무리 계약직에 막내 사원이라도 한지음, 걔......는 좀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정후의 말에 희라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정후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알지, 네가...... 그러게 생긴 거.’

“대체, 어? 바빠서 일하라고 뽑아 놓았더니 뭐? 한 달을 안 나와? 아, 정말 짜증나 죽겠다고!”

“.......”

정후가 방방 뛰며 소리를 지르는 희라를 보다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목을 꽉 붙들고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아, 아파! 왜 이래!”

희라가 소리를 높이자 정후가 그녀의 손목을 놓고 팔로 벽을 짚었다.

순식간에 희라를 제 팔 안에 가두는 꼴이 되었다.

“솔직히 말해, 김희라.”

“뭐, 뭘?”

“네가...... 지음이 다치게 했지?”

“뭐, 뭐? 하, 아니야! 얘는 무슨 그런....... 진짜 아니야!”

“.......”

정후는 희라가 당황하거나 거짓말할 때의 눈빛, 부산스러운 움직임 따위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토록 방방 뛰는 게 더욱 의심스럽다는 것도 안다.

정후가 끄응, 괴롭다는 듯 신음을 뱉었다.

“대체 왜 그랬어? 미림이랑 짜고 같이 그랬지? 하...... 왜들 그렇게 유치하게 구는 거야. 그러지 마, 창피하지도 않아?”

“야! 너는...... 너는 왜 사람 말을 안 믿어? 내가, 내가 무슨 수로.......”

“사용하지도 않는 창고에 사람을 두 번씩이나 보내 물건을 옮겨라 어쩌라 했지, 그것도 엘리베이터는 사용하지도 못하도록. ......설마 계단에서 민 게 너는 아니겠지?”

“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지가 계단으로 가다가 넘어졌......!”

희라는 정후의 말에 술술 대답하다가 얼른 제 입을 막았다.

“강진이한텐 말...... 안 했다. 근데 어차피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한 번만 더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굴면 그땐 다 불어버릴 테니 그렇게 알아.”

“......!”

정후의 말에 희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꾹 다물었다.

정후가 굳어있던 표정을 탁 풀며 손가락으로 희라의 이마를 튕겼다.

“이렇게 쫄 거면서.”

바닥에 내려놓았던 서류를 챙기고 가려던 정후가 희라를 돌아보며 웃었다.

“이제 결혼할 애들인데 마음도 그만 정리하시고. 응? 나한테 오라니까?”

“......아후, 저게 진짜.......”

희라가 약이 오른다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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