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문이 열리며 누군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한지음!”
“......?”
지음과 창국이 문을 향해 돌아봤다.
‘꿈인가.’
지음은 문손잡이를 잡고 자신과 창국을 노려보듯 보고 있는 강진을 보고 천천히 눈을 끔뻑거렸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던 진료실은 들어온 사람이 강진이라는 걸 확인하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아.......”
깜짝 놀랐다는 듯 창국은 지음을 향해 어정쩡하게 뻗었던 손을 내렸다.
강진은 창국을 잡아먹을 듯 보다가 성큼성큼 지음에게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지음은 그가 얼마나 화가 많이 났는지 알 수 있었다. 숨을 몰아쉬는 강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왜...... 여기 있어, 일어나.”
말하는 것과 동시에 강진은 지음의 손목을 꽉 잡아챘다.
지음이 그 힘에 이끌려 일어나자, 맞은편에 있던 창국 역시 일어났다.
“다쳤다더니......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강진은 시선을 창국에게 고정한 채로 지음에게 물었다.
여기서 뭘 하냐니. 다쳐서 병원 진료실에 있는 건데.
지음은 갑자기 들이닥친 강진을 보고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느라 대답도 하지 못했다.
창국의 얼굴에 아차, 하는 표정이 스치듯 지나가더니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아, 강진아. 지금......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
강진은 창국을 노려보며 어디 한번 말해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긴장된 가운데 창국이 말을 이었다.
“지음 씨가 다쳐서 꿰매고 나서.......”
“형이 꿰맸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근데 왜 여기 있습니까? 여기서 꿰맸습니까?”
“아니.”
“근데 왜! 여기 있습니까.”
“.......”
강진의 높아진 소리에 창국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가 한발 물러나자 강진이 지음의 손목을 잡은 채로 밖으로 나갔다.
창국은 문이 닫히자마자 책상을 짚고 고갤 숙였다.
꾹 다문 입 안이 썼다.
처음엔 은주와 너무 닮은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다음엔 그런 지음이 강진과 아는 사람이라는 게 놀라웠고.
그리고 지금은?
‘왜 자꾸...... 지음 씨가 눈에 밟힐까. 왜.......’
창국은 아직도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 눈을 꼭 감았다.
***
강진은 병원 밖으로 나가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문의 회전문 밖으로 나가서야 지음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지음이 그제야 아픔이 느껴지는 손목을 비비려는데 강진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목을 살펴보았다.
“.......”
그녀의 손을 잡은 강진이 제가 꽉 잡았던 손목을 쓰다듬었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지음은 아픈 것도 잊어버렸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길이 내려앉는 게 좋아서 가만 보고 있는데, 강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목 뒤로 떨어졌다.
“어떻게...... 된 거야?”
강진이 지음의 이마, 약을 발라놓은 상처를 보며 얼굴을 한껏 찡그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지음은 차마 그렇게 말하진 못했지만,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다.
출장 간 사람이 빨라야 내일이라고 해 놓고 어떻게 지금 지음의 앞에 와 있는 건지.
“그냥...... 다쳤어요.”
지음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진이 그녀를 보고 쏟아내기 시작했다.
“왜? 대체 어떻게? 스무 바늘이나 꿰매? 스무 바늘 꿰맨 게 맞아? 대체 어떻게 다친 거야? 하...... 성형외과에서 꿰맨 거 아니었나? 정형외과에서 치료했어? 아니, 어디서 했대도 왜 그 진료실에 있었던 거지?”
강진의 말이 홍수처럼 쏟아지자 지음이 그에게 잡힌 손에 힘을 꼭 주고선 가만히 올려다봤다.
“안 도망가요. 하나씩 물어보세요.”
“.......”
그녀의 말에 강진이 손을 놓고 하, 숨을 몰아쉬었다.
“......출장, 빨라야 내일 온다고 했잖아요.”
“지금, 지금 그게 중요해? 하...... 대체 얼마나 다쳤기에 스무 바늘이나.......”
강진이 손가락으로 지음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요리조리 살펴보는 강진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그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지음이 얼른 입꼬리를 끌어올려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 ......어떻게 된 거야?”
“......넘어졌어요.”
“.......”
강진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말간 지음의 얼굴을 살피던 강진은 물어봤자 대답할 것 같지 않아서 정후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숨을 쉬던 그가 차 문을 열었다.
“타.”
차에 오르자 지음은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어도 오늘은 지음에게 너무 길고 괴로웠다. 강진이 오지 않았더라면 병원을 나서는 순간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지음이 슬쩍 강진을 보았다.
그 시선을 느꼈을까. 강진이 입을 열었다.
“창국...... 그 진료실엔 왜 있었던 거야?”
강진의 머릿속엔 진료실 문을 열었을 때 창국이 지음에게 손을 뻗어 그녀를 만지려고 했던 장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의사고 지음이 환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어도 눈에 아른아른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만 인상을 쓰게 됐다.
아픈 사람 앞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내가 이렇게 속이...... 좁은 놈이었나.’
강진의 머릿속은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엉망이었다.
지음이라고 편할 순 없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어떻게 설명하나 고민하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뭐라고 말할지 생각하지 말고 그냥 사실만 말해.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형이 손 뻗어서 당신 만지려고 한 거 떠올리면 진짜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저절로 강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운전대를 강하게 부여잡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음은 강진이 알아채지 못하게 한숨을 쉬고 입을 열었다.
“......지하에서 넘어져서 있다가 정후 오빠 차로 병원에 왔어요. 권...... 선생님이랑은 우연히 로비에서 만나서 응급처치를 해주셨는데 성형외과 선생님과 아는 사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가서 꿰매고 치료하고 나왔는데 약 받아다 주신다고 해서.......”
“약을 왜 받아다 줘?”
“.......”
지음의 말을 툭 자르며 강진이 그녀를 돌아봤다.
지음은 자동으로 입을 꾹 다물고 약봉지를 꽉 잡았다.
“불리하면 말 안 하시겠다?”
“.......”
“그 약은 뭐야?”
강진이 지음의 손을 슬쩍 보며 물었다.
“아, 놀랐을 때 먹는 약이라고.......”
“사다 줬어?”
“네.”
“하, 웃기네. 그걸 왜 형이.......”
“.......”
처음엔 나름 담담하게 시작한 대화였는데 점점 강진의 목소리에 불편함이 얹혔고, 지음은 점점 대답을 잃어갔다.
“그래서 먹었어?”
“네.......”
그 후로 강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인상을 쓰고 입술을 꾹 다물고 차를 몰았다.
얼마나 달렸을까. 강진이 갑자기 차를 세웠다.
“잠시 있어.”
“네? 아, 네.”
지음은 강진이 밖으로 내려 어디론가 가는 걸 보며 비상등 깜빡이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휴.......”
오늘 참 힘든 날이다. 그런 생각에 지쳐가는데 어느새 나타난 강진이 다시 차에 올랐다.
강진이 지음의 무릎에 무언가를 툭 내려놓았다.
“이게 뭐예요?”
“놀랐을 때 먹는 약이야.”
약을 건네준 그가 차를 출발시켰다.
“아까 먹었는데.......”
지음이 강진이 준 약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속삭였다.
그 소리가 들렸을까, 강진이 그녀를 슬쩍 보았다.
“그럼 뭐 내일 먹든가.”
“.......”
어쩐지 뿌루퉁하게 들리는 강진의 목소리에 지음은 운전하는 그를 보았다.
고맙기도 하고, 그 마음이 귀엽기도 하고.......
“......왜? 싫어?”
“고마워요.”
지음의 말에 강진의 표정이 탁 풀어지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눈썹과 입술에 힘을 주고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이던 강진이, 그 한마디에 마음을 놓은 것처럼 표정이 한껏 부드러워졌다.
“몸은 좀 어때.”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지음에게 묻는 강진의 목소리에도 봄바람이 불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내일이면 붓고 멍도 들고 그럴 텐데.”
그 정도는 괜찮아요.
예전엔 지금의 상처는 아무렇지도 않았을 만큼 더 심하게 다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어서 지음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있었어야 하는데.......”
강진은 집으로 가는 내내 혼잣말을 했다. 주로 자책과 후회의 말이었다.
지음은 예전이랑 비교하면 이 정도는 금방 괜찮아진다, 걱정 마라 하고 싶었지만 섣불리 말했다간 또 과거 얘기까지 탈탈 털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이미 어두운 아파트 단지로 강진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차가 어둠을 가르며 스르르 속도를 늦췄다.
“강진 씨, 근데.......”
단지 안에서 차가 멈추자 지음이 강진을 불렀다.
“출장 갔었는데 이렇게...... 그냥 와도 돼요?”
별일도 아닌데.......
어쩐지 그의 일을 방해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당신 몸이나 걱정하라고.”
강진이 딸깍, 지음의 벨트를 풀어주며 말했다.
차에서 내리자 밤하늘에서 쏟아진 어둠이 지음의 몸을 감싸 안았다.
순간 지음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지음.”
까만 하늘을 보고 있는데 뒤에서 강진이 그녀를 불렀다.
지음이 돌아보자, 그녀의 눈엔 지음을 향해 다가오는 강진이 보였다.
어, 하는 순간 어느새 그녀의 앞까지 다가온 강진이 지음을 당겨 안았다.
“......!”
순식간에 지음의 작은 몸, 오늘 하루 두려움에 떨고 힘들었을 그녀가 강진의 품에 폭 안겼다.
강진의 팔이 지음을 가두듯 꽉 안았다.
“......걱정했다.”
“.......”
“미치는 줄 알았어. 정말.......”
네가 어떻게 되는 줄 알았다. 그랬다면 난 어땠을까.......
강진이 우유 향기 나는 지음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눈을 감았다.
그랬다면 난...... 지금 네 앞에 있을 수 없겠지.
이토록 부드러운 네 머리칼을 느낄 수도 없었겠지.
강진의 팔이 지음을 더욱 꼭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