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창국의 이마 주름은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체 어쩌다 이랬어요?”
“......그냥 좀 넘어졌어요.”
창국은 아프다, 화가 난다는 감정을 아예 분출하지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이 상황에서도 담담한 지음에게 신경이 쓰였다.
마음이 괜히 묘해서 그녀의 맑은 눈동자를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얼른 시선을 피했다.
“우선 내 선에서 응급처치는 했는데...... 잠시 기다려봐요.”
“네.”
지음은 그가 왜 허둥지둥하는지, 자신에게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눈치채지도 못했고, 상관할 생각도 없었다.
창국이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어, 김민지 쌤, 지금 혹시 바쁘세요? 아, 다른 게 아니고 아는 분이 눈썹 쪽이 찢어져서 꿰매야 하는데. 네.......”
지음은 창국의 목소릴 들으면서도 가방 안에 넣어둔 휴대전화, 자신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강진을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었다.
“꽤 심하게 찢어졌어요. 스무 바늘 이상 될 거 같아요. 네.”
-아 그래요? 오케이. 지금 오세요. 조금 기다리긴 해야 할 거예요.
창국이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음 씨, 같이 갈까요?”
지음이 그를 따라 일어서는데 정후가 곤란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어, 어디 가?”
“지음 씨, 성형외과에서 꿰매야 할 거 같아.”
“아, 그래요? 어쩌지, 지금 난...... 회사에 좀 들어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정후의 말에 창국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였다.
“걱정 마. 이후로 진료는 없으니까 내가 같이 있어 줄게.”
“그래 줄래요?”
정후와 창국의 말에 지음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혼자 있어도 돼요.”
“안 돼.”
“안 돼!”
“.......”
둘이 동시에 대답을 하고 어색하게 마주 보았다.
결국 지음은 창국과 함께 성형외과 진료실로 향했고, 정후는 그 둘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
강진은 결국 샤워도 하지 못하고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었다.
지음에게 연락해 봐도 받지 않고, 이젠 정후마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대체...... 뭐야.”
답답한 마음에 호텔 거실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순간 정후에게서 전화가 울렸다.
“어, 정후야. 어떻게 됐어.”
-응, 지음이랑 연락됐어. 회사에 있었더라고, 아직. 휴대전화를 못 보고 일을 했나 봐.
“무슨 업무? 퇴근은 했어?”
-어, 그게.......
강진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얘기해.”
걱정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떨리자 정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좀 다쳤어.
“......뭐?”
사정이라고 해 봤자 바쁘다거나 희라와 미림이 무슨 일을 시켰다거나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쳤다니.
강진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듯한 느낌에 옆에 있는 소파를 꽉 붙들고 섰다.
“어디...... 어디를 어떻게 다쳤어?”
숨이 차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그게...... 계단에서 넘어져서 좀 찢어졌어.
“.......”
-근데 걱정하지 마. 지금 병원이고, 괜찮을 거래.
강진은 소파에 올려둔 주먹을 꽉 쥐었다. 마치 가죽이 찢어질 것처럼 강한 소리가 났다.
“......바꿔봐.”
너무 놀라기도 했고 숨이 막혔지만, 그녀의 목소리라도 들으면 좀 나을 것 같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정후의 실망스러운 대답이었다.
-아, 난 그 프랑스 계약서 건 때문에 확인할 게 있어서 회사로 왔어.
“......어느 병원이야?”
강진은 정후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킷을 잡아채듯 들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지선 병원. 창국이 형이 응급조치했어.
“알았다, 가서 보자.”
-뭐? 강진아......!
놀란 정후의 목소리는 금방 휴대전화 너머로 끊겼다.
강진은 나가서 차에 오르자마자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면서 소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 네. 대표님.
“접니다. 저녁 시간에 죄송합니다. 내일 회의는 다음에 하시죠. 급한 일 때문에 다시 올라갑니다.”
-아, 그렇습니까? 늦었는데 바로 가십니까? 피곤하셔서 어쩝니까, 대표님.
“괜찮습니다. 그럼 올라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마무리하고 강진은 휴대전화를 보조석에 내던진 채 속력을 냈다.
***
예약을 하고 성형외과로 가긴 했지만 이미 미리 온 환자들이 많아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지음은 미안해하는 창국과 대기실에서 삼십여 분 이상 기다리다가 진료실로 향했다.
진료실에서 간호사가 먼저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확인을 하고 난 이후에도 더 기다려야 했다.
먼저 온 환자들이 좀 빠지고 난 후에야 지음이 수술실로 향할 수 있었다.
“오래 기다리셨죠? 오늘 환자가 좀 많아서. 이쪽으로 누워보세요.”
김민지는 지음을 눕혀 놓고 긴장할까 하는 마음에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권 쌤이 직접 모시고 오기까지 하고. 친분이 있으신가 봐요?”
“네, 제가 아주 잘 아는 분이니 잘 꿰매 주세요.”
창국이 옆에서 응답하듯 가볍게 말했다.
“아프진 않아요? 아이고 많이 찢어졌네요. 어쩌다 이랬어요?”
“그냥...... 넘어졌어요.”
“눈 안 다쳐서 다행이긴 한데, 생각보다 많이 찢어져서 스무 바늘 정도 꿰매야 할 거 같아요.”
“네.”
지음은 살짝 긴장했지만 마취할 때 살짝 뻐근한 감이 있었던 거 말고는 아프지도 않았다.
기다린 거에 비하면 수술은 금방 끝났다.
얼마 안 있어 민지가 방긋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다 됐어요.”
“벌써요?”
“네. 제가 좀 잘해요. 그래서 인기가 많아서 환자분들이 많이 오세요.”
민지가 일어나는 지음을 보며 말했다.
“그래도 워낙 상처가 심해서 나중에 레이저 시술은 받는 게 좋겠어요. 안 그러면 흉지니까.”
“네.”
“진료실로 가실까요?”
지음은 민지와 창국과 함께 진료실로 향했다.
민지가 앉아 지음의 상처를 살펴보며 말했다.
“잘 꿰매지긴 했어요. 그래도 당분간 물, 수영, 땀은 금지에요.”
“아, 네? 그럼 씻는 건 어떻게......?”
민지가 웃으며 책상 위에 놓인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지켜야 할 수칙 같은 게 적힌 메모였다.
“상처 부위는 최소 일주일은 씻지 마시고 물 조심하셔야 해요.”
“.......”
지음은 메모지를 받아들고 난처한 표정이 되었다.
씻는 것, 수영, 과도한 운동 따위도 전부 금지였다.
일주일이나 씻지 말라니. 회사도 나가야 하고 강진과도 함께 지내야 하는데.......
“상처가 심했으니까 이틀에 한 번씩은 와서 소독하고 상태 보고 가시면 돼요.”
“네.”
“약은...... 약이 어디 있더라.”
민지가 두리번거리자, 창국이 끼어들었다.
“이따가 제가 약 받으면 설명해 드릴게요.”
“그러실래요? 권 선생님이랑 엄청 친하신가 봐요. 이렇게 챙겨주시는 환자분은 처음이네요. 그럼 내일모레 뵐게요.”
“네, 감사합니다.”
지음이 민지와 인사를 나누고 일어났다.
진료실에서 나오자, 창국이 지음에게 손짓을 했다.
“잠시 제 사무실로 가요.”
“아, 저...... 그러면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럴래요? 그럼 내가 지음 씨 약 받아 놓을 테니까 내 진료실로 와요. 어딘진 알죠?”
“네.”
지음은 창국에게 고갤 끄덕이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제야 작은 손거울로 잠시 상처를 본 거 제외하고 제 모습을 처음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엉망이네. 강진 씨가 봤으면 걱정했겠다.......”
블라우스엔 핏물이 보기 흉하게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얼굴도 얼룩덜룩, 손은 까져 있었다.
스무 바늘이나 꿰맨 이마는 눈과 귀까지 욱신거렸다.
지음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얼굴과 옷, 손에 묻은 피를 찬찬히 닦아내기 시작했다.
***
지음이 창국의 진료실로 들어가자, 그가 일어나서 의자를 내어줬다.
“여기 앉으세요.”
“.......”
그가 지음의 손바닥보다 작은 약병을 꺼내 면봉에 두어 번 펌핑을 했다. 투명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창국은 지음에게 면봉을 보여주며 흔들었다.
“이 약을 상처 부위에 바르고 5분 정도 기다리시면 살짝 굳거든요. 그 후에 선크림으로 상처 위를 발라주시면 돼요.”
“아, 선크림도요?”
“네, 그래야 흉이 좀 덜 생기니까 꼭 그렇게 하세요.”
“네.”
지음이 창국의 손에서 약을 받아 들고 살펴보았다.
창국이 빙그레 웃다가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것도 약.”
“......네?”
“먹는 약이에요.”
“......먹는 약도 있어요?”
지음은 봉투에 든 약을 꺼내 보았다. 드링크 하나랑 알약이 들어 있었다.
조제된 약이 아니다?
지음이 의아하게 창국을 보는데 그가 부드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음 씨 오늘...... 어떻게 다친 건진 말 안 하실 거죠?”
“.......”
“모르긴 몰라도 많이 놀랐을 텐데....... 그쵸?”
“아니......에요. 별로 안 놀랐는데.”
그러면서도 지음은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두근거렸다.
층계에서 구른 것도, 창고에 갇힌 것도......, 모두 두려웠으니까.
“지음 씨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몸은 놀랐을 거 같아서요. 그럴 때 먹는 약입니다.”
“.......”
지음은 약병을 손톱으로 살살 긁었다.
강진에게도 약을 받아본 적이 있었고, 창국에게도 이렇게 챙김을 받았다. 참 고마운 일이었다.
“왜요? 아, 부담 갖지 마요. 그냥 난 지음 씨 놀랐을까 봐.......”
“부담이 아니라.......”
“?”
“예전에 더 놀랐을 때도 이런 약 같은 건...... 먹어본 적이 없었는데.......”
지음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랬어요? 에이, 그때도 내가 있었으면 이렇게 챙겨줬을 텐데.”
“.......”
창국이 지음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자 가벼운 장난을 했다.
잠시 약을 보고 있던 지음이 고개를 들었다.
창국은 그녀의 상처를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뭐라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따뜻하게 보고 있는데 지음이 말했다.
“고마워요.......”
“......아닙니다. 얼른 나으셔야죠.”
“네.”
지음이 그가 건넨 약을 봉투에 넣어 챙기는데 창국이 그녀를 지그시 보다가 손을 뻗었다.
지음의 상처 난 곳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한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