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7/94)

#46화.

지음이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벽에 몸을 살짝 기댔다. 어지럽고 통증이 있어서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하아.......”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것조차도 어지러워 비틀거렸다.

얼른 올라가서 어딜 어떻게 다쳤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한 지음이 이를 악물고 상자를 짚었다. 한 손으론 이마의 상처를 막은 채였다.

움직이거나 몸을 숙일 때마다 왼쪽 이마를 중심으로 이와 턱까지 통증이 일었다.

물품 상자를 이런 곳에 방치할 수는 없어서 빨리 가져다 놓고 올라가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금 상자를 밀어보려 했지만 머리가 핑 돌아서 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음은 겨우겨우 힘을 줘서 상자를 창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상자 위에 걸터앉아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거울이 없더라도, 휴대전화 있었더라면 액정이 비춰볼 텐데.

“하.......”

아까부터 머리와 목이 욱신거려서 당장에라도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한숨 돌리려는데 창고에 불이 탁 꺼졌다.

“......?”

그러고 보니 처음 상자를 가져왔을 때도 창고의 불은 지음이 켠 적이 없었다. 불은 켜져 있었는데 지음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스위치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누가 끈 거지?

상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지음이 순간 어지러워서 잠시 숨을 골랐다.

닫힌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이...... 잠겼다?

“어?”

당황한 지음이 입술을 꽉 물고 두 손으로 문을 잡아 다시 돌렸다. 다치기도 했고, 힘이 빠져서 제대로 못 연 건가 싶어서.

하지만 상처를 누른 손까지 떼서 문손잡이를 잡아 돌려보았지만, 여전히 꼼짝하지 않았다.

“밖에 누구 있어요? 여기 사람 있어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지음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자, 장난치지 마세요. 사람이 갇혔어요! 문 좀 열어주세요!”

손이 아플 때까지 두드리던 지음이 문에 등을 대고 스르르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바닥의 찬 기운이, 등에선 딱딱한 문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머리 통증은 어깨까지 내려왔고 어지러운데다 당황하니 숨이 찼다.

왜 이런 일까지 당해야 하는지, 아프고 무섭고...... 서러웠다. 순간 지음의 잇새로 강진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강진 씨.......”

어떻게 해야 할지 냉정하게 판단이 서지 않아서 온몸이 떨렸다.

***

출장을 간 강진은 그 시간까지 연달아 회의를 하느라 피로가 잔뜩 누적되어 있었다.

끝나고 호텔로 돌아가자마자 회의 때 숙소에 두고 갔던 휴대전화를 찾아 연락이 온 내역을 확인했지만.

“연락 한 번이...... 없네.”

강진은 이런 걸 신경 쓰는 자신이 어이가 없어서 넥타이를 풀고 피식 웃었다.

소파에 앉아 지음에게 전화를 거는데 신호만 울리고 받질 않았다.

‘퇴근 시간이어서 집에 가는 길이라 받지 못하는 건가.’

평소에도 전화를 제대로 받지 않는 사람이라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는데...... 오늘은 느낌이 좀 달랐다.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피곤해서 그런가.”

이상하게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다시 한번 지음에게 전활 했지만 이번에도 받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강진이 정후에게 전화를 했다.

-네, 대표님. 오늘 가신 건 잘 되셨습니까?

“어, 정후야.”

편안한 호칭에 정후가 금방 말을 풀었다.

-응, 왜?

“한지음 씨랑 연락이 안 되는데.......”

-지음이? 지금 시간이...... 아, 퇴근 중이라 못 받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아까부터 서늘하고도 기분 나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알아, 아는데....... 그래도 네가 한번 가 봐. 퇴근은 잘했는지, 연락은 왜 안 되는지.”

-그래, 그래볼게. 걱정 마. 가보고 연락할 테니.

강진은 얼굴을 찡그린 채로 휴대전화를 잡은 손을 툭 떨어뜨렸다.

지금 당장이라도 내일 일정이고 뭐고 다 접고 지음에게로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퇴근을 막 준비하던 정후는 강진의 전화를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가며 지음에게 전화를 해 봤지만 역시 그의 전화도 받질 않았다.

“정말 안 받네. 퇴근하느라 정신없나.”

정후가 사무실로 지나가는데 불이 켜져 있었다.

“응? 희라야, 퇴근 아직...... 했네.”

사무실엔 아무도 없었고, 희라 자리 역시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단순히 잊은 건가 싶어 불을 끄려는데 안쪽 자리의 의자가 책상에서 밀려 떨어져 있었고, 의자 위엔 지음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이 놓여 있었다.

정후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지음의 의자를 책상 아래로 밀어 넣었다.

전화해보는데 책상 위에 엎어놓은 그녀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다 두고 어디 갔지......? 지음아?”

정후는 휑한 사무실을 살피다가 탕비실과 화장실까지 가 봤지만 역시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간 거지.”

강진의 말처럼 정후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고민하다가 제일 잘 알 만한 희라에게 전화를 했다.

-어, 왜?

“희라야, 난데 퇴근했어? 어디야?”

-나 집.

“어...... 한지음 씨가 안 보이네?”

정후가 사무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퇴근했나 보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그래, 그런 줄 알았는데 그렇다고 보기엔.......

“가방이 있는데. 혹시 뭐 따로 퇴근 전에 업무 시킨 거 없어?”

-......몰라.

정후는 희라가 살짝 망설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김희라, 얘기해.”

-아, 모른다니까. 아까 뭐...... 미림이가 지하창고에 뭐 하나 가져다 놓으라고는 하더라.

“창......고? 거기 사용 안 한 지 오래됐잖아?”

희라의 말에 정후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 몰라, 나도!

별말도 아니었는데 희라가 짜증을 부렸다.

전화를 끊은 정후는 이상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창고로 가려고 사무실을 나섰다.

복도 끝으로 향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이라고 되어 있었다.

“......고장? 누가 썼다고?”

정후가 종이를 뜯어내며 관리실로 전화를 했다.

“아, 네. 고장 아니라고요? 그래요? 네, 알겠습니다. 뭐야, 대체.”

정후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는 무리 없이 잘 작동했다.

지하 2층 앞에서 문이 열리고.

“지음아, 혹시 여기 있니?”

정후가 창고로 향하며 소리를 높였다.

창고 문을 잡으려다가 바닥에 보이는 핏자국에 시선을 돌리려는데, 안에서 미약하게 콩콩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이게 웬 핏자국이 있....... 지음아? 거기 있어?”

쿵쿵.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안쪽에서 분명 누가 두드리고 있었다.

“지음아! 기다려봐!”

정후가 다급하게 창고 문을 열어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

쓰지 않는 곳이긴 하지만 문을 잠가둔 적은 없었는데.

정후는 급한 마음에 사무실로 뛰어 올라가서 마스터키를 가지고 내려왔다.

문을 열자 지음이 그 안에 철문에 기대고 서 있다가 스르르 쓰러지는 게 아닌가.

“지음아!”

정후가 얼른 몸을 숙이고 지음을 부축했다.

어딜 어떻게 다친 건지 얼굴엔 말라붙은 피가 범벅이었고, 힘들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일단 병원으로 가자.”

정후가 지음의 몸을 안아 들었다.

***

병원으로 가는 정후의 차 안에서 지음이 천천히 눈을 깜빡거렸다.

“오빠가...... 어떻게 왔어요?”

“......물어볼 말이 산더미니까 그냥 지금은 쉬고 있어. 그나저나 괜찮아?”

정후의 말에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괜찮을 리가 없었다.

얼마 안 있어 지음은 정후와 함께 지선 병원 정문으로 들어갔다.

우연히 외래를 보러 지나가던 창국이 지음을 발견하고 다가섰다.

“어...... 지음 씨? 정후야?”

정후와 지음도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형? 오랜만이에요.”

“그래, 오랜만이다. 근데 여긴 어떻게......?”

정후와 인사를 하면서도 창국의 눈길은 지음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 지음이가 좀 다쳐서.......”

“어, 그래 보인다. 일단 진료실로 가자.”

잠시 후 지음은 진료실 창국의 앞에 앉아 있었다.

그가 소독액으로 흐른 핏물을 닦으며 상처를 살펴봤다.

“많이...... 찢어졌네요.”

정후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전화가 울리자 긴장을 했다.

“아, 나 잠시 전화 좀 받고 올게. 프랑스 제휴 관련해서 온 급한 연락이네.”

“어, 그래. 지음 씨는 상태 좀 더 봐야겠다.”

정후가 진료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는 지음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아 맞다. 강진이 걱정했는지 연락 왔더라, 너랑 연락 안 된다고. 일단 내가 전화할게.”

“오빠! 말...... 하지 마요.”

“......어?”

지음의 다급한 목소리에 창국도, 정후도 멈칫했다.

지음이 초조한 듯 두 손을 맞잡고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출장 갔잖아요. 괜히 걱정할까 봐....... 다녀오면 내가 얘기할게요.”

“아.......”

그러는 사이에도 정후의 휴대전화는 계속 울리고 있었다.

“정후야, 일단...... 나가서 전화 먼저 받아. 급한 거라며.”

“어? 아, 그럴게요.”

창국의 말에 정후가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지음 씨? 나 좀 봐요.”

“.......”

닫히는 문을 보고 있던 지음이 창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창국이 지음의 상처를 살펴보다가 손거울을 그녀에게 건넸다.

지음은 다치고 나서 처음으로 어디를 다쳤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자칫했으면 눈도 다칠 뻔했어요.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상처가 꽤 길고 커요.”

“아.......”

지음이 거울을 들여다봤다.

창국의 말대로 상처는 왼쪽 눈썹 중간부터 그리듯 아래까지 죽 찢어져 있었고, 눈 바로 위쪽 눈두덩에도 작게 찢어져 있었다.

두 상처가 이어지면 꽤 긴 상처가 될 것 같았다.

그랬으니 머리와 목까지 욱신거렸겠지.

“휴, 상처가 꽤 남을 거 같은데.......”

창국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지금은 내가 꿰맨 것과 같은 효과를 보도록 테이핑을 할 거예요. 내가 꿰맬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얼굴이니까 성형외과에 가서 꿰매는 게 좋겠어요.”

“아, 괜찮......은데.”

“아녜요. 아무래도 성형외과가 더 섬세하니까...... 안 그럼 흉 져요. 근데 대체 뭘 어쨌기에 이렇게 상처가 크게 났어요?”

“.......”

지음은 창국의 말에도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상처가 크든 아니든, 그래서 흉이 지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다만...... 밖에 나간 정후가 강진에게 전화를 할까 봐 그게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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