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46/94)

#45화.

주말 데이트는 서로의 마음이 심란한 채로 끝이 났다.

아침에 출근 준비를 하던 강진이 지음을 보고 말했다.

“오늘 출장인 건 알고 있지?”

오늘은 강진이 다른 지역으로 출장을 가는 날이었다. 지음도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네.”

바로 떠나는 거로 알고 있었는데 강진이 차 문을 열고 눈짓을 했다.

하지만 지음은 차에 오르지 않고 머뭇거렸다.

“오늘은 굳이 데려다주지 않아도 돼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괜찮아.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타.”

차에 올라 회사로 가는 동안 평소와 다르지 않게 사소한 얘기를 나눴다.

아직도 지음은 어제 강진이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모른다.

어느 보육원에 있었냐는 질문에 대답하려는데 손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고개를 숙인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지 말라고도 했다.

한참이나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가 진정시키고 돌아왔지만. 그 후로도 그때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날 때까지도 그 주제에 대해서는 다시 묻지 않았다.

지음은 다행히 오늘은 편해 보이는 강진의 얼굴을 힐끔 보며 조용히 있었다.

회사 앞에 도착하자, 지음은 혼자 내려갈 생각이었지만 강진이 그녀보다 먼저 차에서 내려선 문까지 열어주었다.

“나 없어도 밥 잘 챙겨 먹고.”

“네.”

지음은 그의 말을 들으며 괜히 울컥해졌다. 계약으로 묶인 사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게 어색하면서도 좋았다.

그녀에겐 없었던 가족이 생긴 것 같아서.......

강진이 지음에게 다가와 이제 제법 선선한 기운을 지닌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지음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언제...... 와요?”

“빠르면 내일. 혹시라도 늦어지면...... 연락할게.”

“......네.”

서로를 마주 보고 부드러운 눈빛을 교환하는데 누군가 곁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

출근하던 희라가 얼굴이 굳은 채로 강진과 지음을 번갈아 보았다.

“대표님, 오늘 출장 가시죠?”

강진의 대답은 가벼운 고갯짓이 다였다.

그러고는 희라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지음을 보며 말했다, 세상에 더 없을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녀올게.”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바로 옆에 희라가 있었지만 묻는 강진도, 대답하는 지음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곳엔 오로지 둘만 있는 것처럼.

지음과 인사를 나눈 강진은 희라에게는 다시 눈길도 주지 않고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버렸다.

멀어지는 차를 보다가 회사로 들어가려고 지음이 몸을 돌리는데, 그곳엔 잠시 잊고 있었던 희라가 부들부들 떨면서 서 있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가방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색하고 할 말도 없어서 지음은 희라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서 희라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탁. 손목에 가해지는 힘이 서늘하고 날카로워서 지음이 그녀를 돌아봤다.

지음이 희라를 향해 몸을 돌리자, 그제야 손을 놓고 팔짱을 꼈다.

“아주...... 얼굴이 폈네, 한지음 씨?”

“네?”

비아냥거리는 걸 알았지만 그런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희라를 보았는데, 그녀의 얼굴이 사납게 변했다.

“너 같은 게 강진이랑 어울린다고 생각해? 진짜 어이가 없어서.......”

“.......”

자기 말에 점점 화가 치솟는지 희라가 선을 넘기 시작했다.

지음에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툭 밀었다.

“적당히 하고 나갈 줄 알았는데, 자신에 대해 잘 모르나 봐? 지음 씨는?”

대답하기도 입 아픈 얘길 듣고 있자니 지음도 슬슬 지칠 때쯤 설상가상으로 미림까지 합세했다. 출근하던 미림이 희라와 지음이 맞서있는 걸 보고 그곳으로 다가왔다.

“실장님.”

“어, 미림 씨 왔어?”

“근데 여기서 뭐 하세요?”

“아니...... 사람이 낯짝이 너무 두껍잖아.”

희라의 말에 미림이 깔깔 웃었다.

“그렇긴 해요, 지음 씨가. 지음 씨도 그렇지. 이력서 없이 낙하산으로 들어와 놓고도 이력서 한 장 보강할 생각도 없어?”

“.......”

“그런 생각을 할 수나 있겠어? 그리고 오늘 대표님 출장이 얼마나 중요한 줄 알아, 몰라? 아무리 결혼할 사이라지만 그런 날은 지음 씨 스스로 회사에 와야겠다, 뭐 그런 생각 안 들어?”

희라와 미림은 쉴 새 없이 번갈아 지음에게 핀잔과 질문을 퍼부었지만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하고 싶었던 화풀이가 끝났는지, 지음을 뒤로한 채 둘이 숙덕거리며 회사 안으로 들어갔다.

지음은 새삼스럽지도 않은 그런 취급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희라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강진에게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강진의 차가 이미 사라진 도로에 시선을 한 번 두었다가 사무실로 향했다.

***

지음은 평소처럼 일을 했다. 출근할 때부터 희라와 미림이 자신을 보며 숙덕이고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조금 빈도가 잦을 뿐이지 평소에도 그랬으니까.

피로감이 쌓일 오후 시간. 퇴근이 가까워지자, 희라와 미림이 한참을 속닥이다가 지음에게 손짓을 했다.

“한지음 씨? 잠깐 와 볼래요?”

“네.”

지음은 정리하던 서류를 놓고 희라의 자리로 향했다.

희라가 의자에 한껏 등을 붙인 채로 지음을 올려다봤다. 그 옆엔 미림이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짚은 채 서 있었다.

지음이 희라의 앞에 서자, 희라가 미림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미림이 팔짱을 풀고 희라 자리 옆에 커다란 상자를 발로 툭 찼다.

“지음 씨, 이거 지하 2층 창고에 좀 가져다 놔요.”

“창고요?”

“응. 아 모르나? 비상계단 쪽으로 가면, 물론 거기 잘 안 쓰긴 하지만 엘리베이터 있잖아. 그거 타고 내려가면 돼.”

“아, 네 알겠습니다.”

창고가 있다는 것도 몰랐지만 건물 끝부분에 비상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지음은 제가 혼자 들기엔 좀 커 보이는 상자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 봐.”

희라와 미림이 전시회 일정을 의논하는 걸 보며 지음은 상자에 손을 댔다.

어떻게든 들어보려 했지만 생각보다 무거워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쩌지, 생각하며 희라를 보았지만, 그녀는 지음을 힐끔거리면서도 모른 체하며 미림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거구나.’

지음은 그제야 희라가 아침에 강진과 제가 함께 회사로 온 걸 보고 여느 때 같은 괴롭힘의 일환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숨을 쉬고는 상자를 질질 끌며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비상계단 근처 엘리베이터까지 가는 것만으로도 지음의 얼굴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오늘따라 밀차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지하 2층으로 내려가니 미림의 말대로 커다란 철문으로 된 창고가 있었다.

지음이 땀을 뻘뻘 흘리며 상자를 간신히 창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아.......”

상자 하나를 옮기는 데에만 온 힘을 다 쓴 것 같아서 지음은 잠시 상자 위에 앉아 잠시 땀을 고르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옮겨 놨습니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희라가 다시 손짓을 했다.

“벌써?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그게 아니라 이건데.”

희라가 난처한 표정으로 머뭇거리자, 미림이 다시 자리 옆에 놓여 있는 상자를 발로 툭툭 쳤다.

“.......”

방금 지음이 가져다 놨던 것보다도 커 보였다, 보기에도 더 무거운 것도 같고.

“미안한데, 지음 씨. 이거 가져다 놓고, 아까 그건 다시 가져다 놔요.”

“.......”

“그러고 나서 퇴근해.”

“......네.”

그 말이 끝나자 희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림 역시 희라의 팔짱을 끼고 따라나섰다.

“우린 가요.”

“그래, 가자.”

미림이 희라에게 착 달라붙어 지음이 들으라는 듯 목소릴 높였다.

“언니 우리, 요 앞에 레스토랑 생겼던데 거기 갈래요? 분위기 예술이래.”

“그럴까? 그러자.”

도움을 바랄 생각도 없었지만 멍하게 둘의 뒷모습을 보던 지음이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괴롭히려고 고의로 이런 짓을 꾸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 무거운 상자를 잡았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사무실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지만, 지음은 복도 끝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두고 힘을 내기로 했다.

끙끙거리며 엘리베이터 앞으로 향했는데, 지음은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아.......”

아까는 분명 잘 다녀왔는데, 갑자기 이렇게 고장이 났다고?

엘리베이터 앞엔 [고장 수리 중]이라는 글자가 쓰인 종이가 붙어 있었다.

지음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할 수 없이 그녀가 비상구 문을 엉덩이로 열고 상자를 당겼다. 계단 밖으로 나오는 것도 힘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상자가 커서 계단 하나하나 짚고 내려가는 것도 힘을 써야 했다.

계단에서 상자가 굴러버리면 수습하기 어려울 테니 내려가는 내내 조심하느라 힘이 들어갔다.

끙끙거리면서 간신히 지하 1층까지 다 내려 온 지음이 허리를 펴고 숨을 골랐다. 아직도 한 층을 더 내려가야 한다니.

이맛살을 찌푸리다가 빨리 처리해버릴 생각으로 상자에 손을 짚었다.

좀 빨리 내려가고 싶은 욕심에 두 칸을 내려서서 상자를 힘껏 잡아당겼는데, 우려했던 대로 삐끗하던 상자가 지음의 다리를 묵직하게 치고 덜컹덜컹 아래로 구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상자가 구르면서 지음의 발목을 치고 지나갔고, 그 바람에 지음 역시 그 옆으로 굴러떨어졌다는 거.

“아......!”

다행히 계단이 길지 않았지만 그녀는 중간에 짚고 멈출 정신이 없었다.

결국 박스가 계단이 끝난 바닥에 닿으며 쿵 소리를 냈고, 지음 역시 그 옆으로 구겨지듯 떨어졌다.

너무 아파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게 떨어지면서 이마를 부딪친 모양이었다.

지음은 눈을 깜빡거리면서 주변이 보일 때까지 누워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얼얼한 손바닥을 찬 바닥에 대고 일어나려고 힘을 줬는데, 이마에서 뭔가 주르륵 흘렀다. 땀인가 싶었는데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액체가 끈끈했다.

“어?”

바닥을 확인해보려 일어나려다가 발목이 너무 아파서 다시 주저앉으며 이마를 짚었는데, 손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묻어났다.

다친 곳이 이마인지 눈두덩 쪽인지, 전체적으로 왼쪽 머리가 지끈거려서 정확하게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거울이 없어서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었던 지음은 일단 대충 손바닥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천천히 벽을 짚고 일어났지만 어지러워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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