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강진이 지음을 처음 만난 건 3년 전 정우의 펜션으로 휴가를 갔던 날이었다. 그리고 유독 강진의 마음에 묘하게 남는 날이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그 해, 그날도 오늘처럼 날이 화창했다.
지우 그룹에서는 가끔 봉사활동을 다니곤 했고, 그날은 자주 가던 보육원으로 향했다.
그때 강진의 나이 열일곱. 봉사하는 게 좋은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나이 청소년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물건을 건네고 봉사를 하는 동안 강진은 보육원을 둘러보고 있었다.
강진의 형 민준이 함께 오긴 했지만, 형은 평소에도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았으니, 아마 그 시각에도 할아버지의 비서 이강구와 함께 보육원 아이들과 있을 게 뻔했다.
무료해 하는 강진에게도 함께 선물을 나눠주자고 했지만, 강진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시끄럽고 소란스러운 건 딱 싫었으니까.
그렇다고 운동장으로 가기엔 아이들의 소리로 가득했기에, 그곳으로도 나가지 않았다.
그 대신 강진은 아담한 보육원 건물을 돌아보며 담을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강진의 나이 또래도 없었고 시간은 느리게 흐르는, 날씨 좋은 휴일이었다.
무료한 마음에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담을 짚고 걷던 그가 갑자기 느껴진 통증에 손을 보았다.
울퉁불퉁 매끄럽지 않은 벽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린 손가락 살을 파고든 돌조각 때문에 피가 맺혀 똑똑 떨어졌다.
「아......!」
크게 다친 건 아니었지만 손가락 끝이 저릿하고 낯선 통증이 일어서 눈썹을 한껏 찡그리고 서 있었다.
짜증도 나고 아프기도 해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어떤 여자애가 다가왔다.
「다쳤어요?」
「......!」
강진은 혼자만 있는 거라고 생각해서 얼굴도 잔뜩 찡그리고 한숨을 내뱉고 짜증을 부렸는데, 갑자기 뒤에서 들리는 여자애 목소리에 놀라 얼른 뒤를 돌아봤다.
그의 앞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이나 했을까 싶은 어린 여자애가 서서 강진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햇빛을 보지 못한 것처럼 얼굴이 유난히 하얗고 작았다. 얼굴도 키도, 손도.......
보육원에서 살고 있는 여자애인가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고 시선을 돌리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엔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투명해서 가까이 다가서면 강진의 모습이 비칠 것만 같은 다갈색의 눈동자에 빛이 반짝거렸다.
작은 얼굴 가운데 자리한 콧날이 예뻤고, 그 아래 입술은 분홍빛을 띠고 있어 자꾸 눈이 갔다.
어린애를 보고 예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우습고 창피해서 강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군데, 너?」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고 강진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그녀가 내려뜨리고 있는 강진의 손을 슬쩍 보다가 핑크빛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여기 벽 날카로워요. 그렇게 손으로 벽 짚으면 안 돼요.」
「.......」
작은 입술이 움직이며 내는 소리가 귓가에 스치는 바람과도 같았다. 강진의 귀를 간질거리는 듯해서 그가 어깨를 올리며 인상을 썼다.
그러고 있느라 여자의 움직임을 놓치고 말았다.
어느새 강진의 코앞까지 다가온 여자애가 강진의 손을 들어 올려 살펴봤다.
「뭐, 뭐 하는...... 거야?」
「다쳤네.......」
손을 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여자의 손이 차가워서 흠칫 놀라, 빼는 것도 잊어버렸다.
잠시 망설이는 듯 보이던 여자애가 주머니에서 하얀색 손수건을 꺼내 들고 강진의 손가락에 가져다 댔다.
「뭐...... 하냐니까?」
강진이 한 번 더 물었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고 손수건을 다친 손가락에 대고 묶었다.
키는 강진의 절반만큼이나 되려나. 꼬맹이 주제에 다갈색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갈색 머리를 푹 숙인 채로 손가락 상처를 묶어주는 걸 보고 있으려니,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됐......어.」
하지만 강진이 손을 뺐을 땐 이미 여자애의 얼굴만큼이나 하얀 손수건이 손가락에 예쁘게 묶여 있었다.
제가 말도 걸고 다가왔으면서 여자애는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별말도 없이 몸을 돌려 가려는 게 아닌가.
기가 막히고 어이도 없고. 그러면서도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선 강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게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사랑이 그렇게 쉽게 시작될 거라는 것도.
여자의 갈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려는 걸 보며 강진이 얼른 다가섰다.
「잠깐!」
「......?」
「너...... 이름이 뭐야?」
그의 질문에 여자애가 돌아봤다.
강진의 물음에 여자애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한......은주.」
고민하는 듯한 표정으로 툭 던지듯 말하고는 금방 사라져 버렸다.
「한은주.......」
강진은 그때부터 그녀를 첫사랑으로 가슴에 품고 지냈다.
가끔 그녀가 보고 싶을 때면 보육원 앞까지 가보곤 했지만 그녀 앞에 나타나진 않았다. 지금에 와선 그 일이 후회가 되기도 했지만.
***
첫사랑의 기억이 흐릿해지고 고백 한 번 못해 본 자신을 자책하는 시간이 사라질 즈음.
그래도 여전히 손수건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던 강진은, 그가 믿고 사랑하던 형 민준과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일을 마치고 곧장 형이 초대한 근사한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한적하고 아담한 방에 민준이 웃으며 강진을 맞이했다.
「왔어? 일이 요새도 바빠?」
「그렇지 뭐. 근데 무슨 저녁이야? 집에서 보면 되는데.」
강진이 민준의 맞은편에 앉았다.
「할 얘기가 있어서. 너 요새 바빠서 집에서 같이 밥 한번 먹기 힘들잖아.」
「문화재단 일은 형이 다 크게 벌려놓고 내가 수습하느라 그렇지.」
「그러게.」
형제들끼리 가벼운 농담이 오갔다.
어느 정도 인사를 하고 나자 민준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강진아, 형 곧 결혼할 것 같아.」
「결혼?」
민준의 말에 강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갑작스러웠지만 그래서 그동안 민준이 바쁘면서도 밝아졌던 건가 싶었다.
「축하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러게. 뭐 그렇게 됐다.」
「갑작스러워서 놀라긴 했지만 잘됐다.」
「너한테 제일 먼저 소개해 주고 싶었어.」
「소......개? 누구, 여자분?」
「응. 지금 잠깐 화장실 갔는데 올 때 됐어.」
「그럼 미리 얘길 좀 하지. 준비도 못 했는데.」
「그럴 게 뭐가 있어. 그냥 인사나 하자는 건데 뭐. 너 엄청나게 보고 싶어 했어.」
강진은 그때까진 민준에게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는 게 제 일처럼 기쁘기만 했다.
「대체 누구기에 형이 이렇게 신이 났어?」
「그냥 예쁜 사람....... 네 눈에도 예뻤으면 좋겠다.」
「형이 좋다면 나도 좋지. 어련히 알아서 좋은 분으로 골랐을까.」
민준의 말에 강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강진의 뒤에서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민준이 반갑게 손짓을 했다.
「어 저기 온다. 은주야, 이쪽으로 와.」
「......은주?」
강진은 그때까지만 해도 형을 마주 보며 웃고 있다가 민준의 말에 뒤를 돌아봤다.
뽀얀 얼굴의 여자가 민준의 옆에 앉아 강진을 보며 웃었다.
「안녕하세요, 한은주예요.」
「......!」
그의 앞에 앉아 수줍게 민준의 손을 잡고 있는 사람은, 보육원에서 강진이 만났던 여자였다.
그의 다친 손가락에 덤덤하고 무심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묶어주던 그 여자.......
강진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시간은 야속하게 흘렀다.
어느새 강진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형 민준의 결혼식 날이 되었다.
민준은 아침부터 바빠 보였고, 행복해 보였다.
강진 역시 행복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형과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행복하다면.
드레스를 입고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은주는 눈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강진은 신부 대기실 앞에서 계속 고민하다가 품 안에서 새하얀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저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아, 도련님.」
강진이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가족이나 친구가 없는 은주는 결혼식 날의 떨리는 시간을 대기실에 앉아 오롯이 견디고 있었다.
강진이 들어서자, 반가웠는지 수줍게 웃었다.
강진은 하얀 드레스를 입고, 그날처럼 뽀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는 은주를 차마 볼 수가 없어서 비스듬하게 섰다.
손수건을 꼭 쥔 채로.
그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망설이는 걸 보고 은주가 물었다.
「도련님? 무슨 하실 말씀 있어서 왔어요?」
「.......」
강진이 심호흡을 하고 은주를 돌아봤다.
그녀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때, 담벼락 아래서 강진을 보고 있던 여자아이는 웃지 않았는데....... 그 여자가 이렇게 커서 형과 결혼을 하는구나.
만감이 교차했다.
강진은 말없이 꽉 쥐었던 흰색의 손수건을 은주에게 내밀어 봤다.
「......?」
은주는 어리둥절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이거.......」
「네? 이게...... 뭐예요?」
처음에 강진은 그녀가 모른 척한다고 생각했는데, 은주의 얼굴은 그 손수건을 정말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이 까만 거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거야 어릴 때였으니까 충분히 눈동자 색은 바뀔 수 있었다.
「......아닙니다. 오늘 예쁘네요.」
「네? 아, 고마워요, 도련님.」
결국 그날, 강진은 차마 은주에게 손수건을 돌려주지 못하고 나왔다.
지음이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강진을 올려다봤다.
“혹시 무슨 보육원이었어? 당신이 있던 곳.”
그녀의 맑은 다갈색 눈동자를 보고 강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
지음의 핑크빛 입술이 움직이려는 순간 강진이 숨을 참고 다급히 말했다.
“아냐. 말...... 하지 마.”
“?”
강진이 괴롭다는 듯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내뱉었다.
“말...... 하지 마.”
지음은 그의 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