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강진의 차에 올라서야 지음은 편히 숨을 쉬었다.
강진과는 계약서라는 종이 한 장으로 묶인 사이라고는 해도 그와 있을 때가 편한 모양이었다.
강진이 그녀가 안도감으로 숨을 고르는 걸 보고 말했다.
“오늘 고생했어.”
“아녜요.”
동구와 이란의 차를 뒤로 하고 지음을 태운 강진의 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강진 씨 집에 가서...... 차 마시고 왔어도 괜찮았어요, 난.”
“피곤하지 않아?”
어제도 온정리까지 갔다가 집에 늦게 도착했고, 그의 몸에 매달려 새벽까지 울먹였으니.......
지음은 어젯밤의 뜨거운 열기를 떠올리자니 얼굴이 확 달아올라서 그의 시선을 피해 창밖을 보았다.
“......괜찮아요. 다녀와서 쉬어도 되고. 강진 씨 가족들이랑 밥 먹은 거고 강진 씨 집에 가는 건데. 괜찮아요.”
“.......”
그녀의 말이 묘하게 들려서 강진이 지음을 바라봤다.
강진의 가족들, 강진의 집. 그러니 괜찮다.
꼭 그렇게 들려서 괜히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지음을 보는 이란의 표정과 눈초리가 썩 곱지 않아서 가지 않겠다고 한 거였는데, 앞으로의 1년을 생각하면 다녀올 걸 그랬나 싶기도 했고.
그의 시선이 느껴지자, 지음이 얼른 말을 이었다.
“다음엔 초대하시면 같이 가요.”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음은 마지막 말은 애써 눌러 삼키느라 무릎 위에 올려둔 가방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그래, 그러자.”
“근데 강진 씨, 우리 지금...... 어디 가요?”
집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지음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데이트.”
“.......”
나직한 강진의 목소리에 지음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데이트라니.
그런 말에 두근두근 반응하는 제 심장도 이상했고, 그런 말을 해 놓고 편안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는 강진도 이상했다.
‘자꾸 기대하면...... 안 돼.’
지음이 저도 모르게 속 입술을 꽉 물었다. 얼마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에서 아릿한 통증이 일었지만, 그래서 곱게 휘어진 눈썹이 일그러졌지만, 꽉 다문 입술을 풀지 않았다.
아직 1년이라는 계약 결혼 기간을 채우려면 몇 번이나 계절이 바뀌어야 하는데, 벌써 강진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면 안 되는 게 아닌가.
지음은 괜히 미련이 남은 채 성공보수를 받지도 못하고 시간만 버리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일었다.
그래서 자꾸 심란했다. 속마음이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
한정식 식당에서 나온 동구는 먼저 집으로 출발하고, 이란과 미림, 동기가 남아 있었다.
동기는 뭐가 그렇게 바쁜지 모임 내내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었고, 이란은 뾰로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미림과 동기를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속에선 부글부글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한지음이 오늘 나타난 것도 그녀의 계획엔 없었던 일이었다.
‘다들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건지 원. 답답하기는.’
거기다 혹시라도 그 여자가 붙잡는 걸 실패하면 어른들에게 인사도 하기 전에 둘이 동거를 한다는 둥 소문은 어떻게 된 건지 물으려 했지만 묻지도 못했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반박하는 강진의 모습도 신경질이 났다.
동구가 자신의 편에 서서 따끔하게 충고라도 해 주길 바랐지만, 그는 강진이 마음을 두고 있다는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그의 짙은 눈썹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걸 보고 이란은 더욱 불안하기만 했다.
“얼른 타라, 집에 가자. 지쳐서 여기 더 있고 싶지도 않다.”
이란이 끓어오르는 속을 달래며 동기와 미림에게 말했다.
“아, 난 따로 갈게.”
“......뭐?”
동기가 뒤로 한발 물러나며 말하자, 이란이 그를 휙 돌아봤다.
“왜? 어딜 가려고?”
“뭐 그냥...... 주말이잖아. 집에 가 봤자 뭐 해. 약속 있어요, 나.”
“너...... 또 사고 치는 거 아니야?”
“아, 엄마는 내가 애예요? 무슨 사고야.”
동기의 말에도 이란은 못 미더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얌전히 있어. 안 그래도 할아버지가 너 요새 주시하고 계신 거 몰라? 너도 곧 짝 찾아줄 테니까.......”
“아, 됐어, 엄마. 나 가요.”
“박동기!”
동기는 이란에게 등을 돌리고 손짓만 하며 차에 올랐다.
“저게 정말.......”
“엄마, 우리도 가자. 나 피곤해.”
미림이 이란의 팔을 붙들고 흔들자, 마지못해 차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이게 뭐야. 나 그렇게 어린 애한테 언니라고 불러야 해? 아니, 민준 오빠도 그렇고 강진 오빠도...... 왜 그렇게 어린 여자애들을 좋아해?”
미림이 조잘조잘 이란의 옆에서 떠들었지만 이란은 그녀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이란이 인상을 쓰며 혼잣말을 했다.
“대체 어떻게 온 거야?”
“.......”
정 비서는 이란의 눈치에 숨도 쉬지 못했다. 이란과 미림의 말을 들어 짐작해 보건대 이란은 지음이 오지 못하도록 했음에도 기어이 자리에 왔고, 그래서 이란과 미림의 심기가 심히 불편한 거다.
“그러니까. 엄마, 걔 못 온다며? 어떻게 된 거야?”
“......분명 제대로 잡아두라고 했는데. 일을 어떻게 한 건지, 대체.”
이란은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미림은 그런 이란을 보다가 휴, 한숨을 쉬고는 시트에 몸을 묻었다.
“여보세요?”
-네, 사돈.
사......돈?
저쪽에서 들리는 민자의 뻔뻔한 목소리에 이란은 잠시 멍할 정도로 기가 막혔다.
“그건 그렇고......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요?
민자는 뻔뻔하기까지 했다. 이란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걸 꾹 참고 물었다.
“대체 왜 당신 딸, 못 붙잡아 둔 거냐고요! 내가 준 돈이 얼만데!”
-아, 지음이가 갔어요? 걔도 참. 아니 어제 늦게 여길 찾아왔더라고요.
“.......”
이 여자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건가.
한지음을 오늘의 약속 전에 붙잡아두라고 했던 건 이란과 민자의 약속이었다.
이란이 두통이 이는지 눈을 감고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와서는 뭐 다시는 엄마니 아빠니 그렇게 부르지 말아라, 어째라. 하여간 어린 게 그렇게 싸가지가 없이.......
“그래서 그걸 그냥 보냈단 건가요? 그래요?”
-아니 누군 공으로 돈을 받으려고 한 줄 아세요? 같이 밥 먹자, 같이 자자. 내가 생전 안 해본 소리까지 했는데. 근데 걜 데리러왔는데 어쩌겠어요.
“데리러 왔......, 누가요?”
-누구겠어요. 신랑이요.
“뭐, 뭐요?”
민자의 말에 갑자기 이란이 눈을 반짝 떠서 소리를 질렀다.
-신랑이요, 신랑. 곧 결혼한다고 하던데? 차강진이라던가.......
‘어...... 어떻게 알았지......? 강진이가 어떻게......!’
이란은 심란한 마음에 휴대전화를 귀에서 툭 떨어뜨리고 인상을 썼다.
***
지음을 태운 강진은 뷰가 볼 만한 산책로로 향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지음은 긴장이 좀 풀리는 모양이었다. 간헐적으로 떨던 몸도 가라앉았다.
강진이 창밖을 보고 있는 지음을 슬쩍 보며 물었다.
“배는 안 고파?”
“네?”
“아까 보니까 제대로 못 먹던데.”
“괜찮아요.”
그 상황에서 제대로 먹을 수 있을 리가.
아무리 호의적인 눈빛이더라도 할아버지는 끈질기게 지음을 살펴보고 있었고, 이란의 도끼눈도, 미림과 동기의 호기심 어린 힐끔거림도 견뎌야 했으니까.
강진은 계약으로 얽힌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음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느새 지음을 태운 차는 한적한 산책로에 도착했다.
“잠시 내려서 걸을까?”
“네.”
“산책하다 보면 답답한 게 좀 풀릴 거야.”
강진이 제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지음은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내리니 햇살도 좋았고 바람도 좋았다.
“앞으론 이런 일은 없을 테니까 긴장 풀어.”
“이젠...... 괜찮아요.”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산책로는 걷기에 더할 나위 좋았다.
주말인데도 사람이 없어서 지음은 강진과 둘이 나란히 걸을 수 있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그와 보폭을 맞춰 걷는데 강진이 물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볕만큼이나 따뜻한 목소리로.
“나한테 할 얘기 없어?”
“네?”
“그냥...... 그동안 하고 싶었는데 꺼내기 어려워서 하지 못했던 말이 있다거나.......”
“.......”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가족을 만나기 전날 갑자기 온정리로 사라져 버리고, 강진이 알지 못했던 양부모가 나타나고.
잠시 머뭇거리던 지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는, 보육원......에서 지내다가...... 입양됐어요.”
지음이 고개를 살짝 떨궜다.
강진은 어제 민자에게 뺨을 맞던 지음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녀와 요양병원에 대해 더 묻고 싶었지만,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여기서 그가 끼어들었다간 지음이 입을 다물 것 같았다.
지음은 강진이 그런 복잡한 고민을 하는 줄은 모르고 천천히 말했다, 재진과 민자에 관한 얘기는 빼고.
강진은 그녀의 말을 끊지 않고 듣다가 문득 과거에 들렀던 보육원이 떠올랐다.
“보육원.......”
“네?”
“혹시 무슨 보육원이었어? 당신이 있던 곳.”
“.......”
지음이 걸음을 멈췄다.
사실 지음이 강진을 처음 본 건, 온정리의 정후네 펜션에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오래전, 자신이 지내던 보육원에서 지음은 강진과 처음 만났다.
그때 지음의 나이 여덟 살.
강진은 가끔 서울에서 보육원으로 봉사를 오는 어느 부잣집 아들이었다.
봉사하는 사람들이 오는 날엔 맛있는 것도 많이 먹을 수 있었고, 평소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
그날도 다른 아이들은 선물을 받고 보육원 건물과 운동장에서 신이 나 있었다.
선물이나 음식 따위에 관심이 없었던 지음은 혼자 보육원 건물 뒤로 돌아 걷고 있었다.
「아......!」
앞에 사람이 있어서 돌아가려던 지음의 귀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벽을 짚으며 걷다가 손을 다친 모양이었다.
지음은 그냥 하던 대로 피해서 돌아갈까 하다가 그에게 다가섰다, 차강진이라는 남자에게로.
「......여기 벽이 날카로워요.」
「......?」
지음은 엄마가 줬던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가 피가 맺힌 강진의 손가락에 손수건을 묶었다.
그날을 강진은 잊었을지도 모른다. 워낙 오래전 일이었으니까.
지음이 강진에게 대답을 하려고 그를 올려다보는데, 강진이 시선을 피했다.
“아냐. 말...... 하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