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그런 일이 있던 다음 날이었지만, 아침부터 날씨가 쨍하게 맑았다.
“룰루, 으흐흠.”
이란은 좋은 날씨를 한 번 보고 콧노래를 불렀다.
시간을 확인한 그녀가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무슨 옷을 입는 게 좋으려나?”
기분 좋게 옷을 살펴보던 이란이 아껴두었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었다.
똑똑.
화장대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며 화장을 하고 있는데 미림이 들어왔다.
“엄마!”
“어, 왜.”
미림은 양손에 옷을 각각 들고 들어오다가 이란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걸 보고 멈칫했다.
“뭐야? 엄마 왜 이렇게 기분이 좋아?”
미림이 입술을 쭉 내밀고 툴툴거리면서 이란의 곁에 와 앉았다. 이란은 미림을 한번 슬쩍 보고는 화장에 집중했다.
“엄마! 왜 그렇게 기분이 좋냐고. 강진 오빠가 결혼할 여자 데려온다는데! 그것도 그런 이상한 애로!”
“......넌 왜 들어왔어?”
이란이 미림의 투정을 못 들은 척하며 물었다.
“어? 아, 맞다. 엄마 엄마, 나 이 옷 어때?”
미림이 손에 든 푸른색 원피스를 제 몸에 두르고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이란이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미림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예쁘다. 잘 어울려.”
“그럼 나 이거 입는다? 근데 엄마 오늘 기분이 왜 이렇게 좋냐니까? 이 결혼 반대하는 거 아니었어?”
미림이 원피스를 입는 걸 도우며 이란이 슬쩍 대꾸했다.
“어차피 걔 못 와.”
“......어?”
옷을 입던 미림이 이란을 보았다.
“왜? 무슨 일인데? 왜 못 와?”
“있어, 그런 게.”
“엄마 뭐 아는구나! 그치?”
“엄마가 누구야. 어디서 감히 그딴 년을, 아니 그딴 계집애가 우리 집안을 넘보게 그냥 둘 거 같아?”
이란의 말에 미림이 손뼉을 쳤다.
“그래, 그럴 줄 알았어. 진짜 웃기지도 않는다니까? 걔 분명 우리 집 돈이랑 강진 오빠 보고 꼬리친 걸 거야. 꽃뱀 아닌지 몰라?”
“뭐 그럴지도 모르지.”
이란은 제 앞에서도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던 어린 여자, 지음을 떠올렸다.
‘애교가 많다거나 꼬리를 칠 줄 아는 성격은 아니게 보였지만 사람이야 모르는 거니까.’
그리고 그녀와 전혀 닮지 않은, 욕심 많은 두꺼비처럼 생긴 민자도 떠올렸다.
‘잘하고 있겠지?’
이란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미림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진짜 쌤통이다. 근데 엄마 어떻게 한 거야?”
“넌 몰라도 돼.”
“치.”
“희라랑 꼭...... 결혼시키고 말 테니까, 내가.”
“희라...... 언니? 아, 엄마! 나 희라 언니 싫어!”
조금 전까지 기분 좋게 방방 뜨던 미림이 희라 이름을 듣고 악을 써댔다.
이란이 그녀의 등짝을 가볍게 때리며 눈을 흘겼다.
“싫기는! 싫긴 뭐가 싫어? 너랑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아, 나 맨날 회사에서 희라 언니한테 눌리고 지내는 것도 짜증 나는데 집에서까지 그래야 한다고?”
“어차피 너랑 사는 것도 아닐 텐데 뭐. 그리고 걔가 결혼하고 나서도 회사 다닐 거래? 강진이 내조하느라 바빠질 거야.”
“그래도.......”
이란의 말에도 미림은 기분이 풀리지 않는지 툴툴거리고 앉아 있었다.
“우리 딸이 연애를 못 해서 이러나, 왜 이렇게 심술이 났어?”
“뭐래.”
“걱정 마. 너한테도 얼른 좋은 짝 찾아줄 테니까. 엄마가 봐 둔 사람 있어.”
“아, 무슨...... 됐어요. 나 그런 거 안 해.”
“안 하기는. 사람을 만나야 결혼을 하지.”
미림은 싫다고 하면서도 누굴까 궁금하긴 했는지 눈빛을 반짝 빛냈다.
***
약속한 시간이 되자, 이란은 차동구와 함께 한정식집의 예약석으로 향했다.
역시나 아직 방 안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 이쪽으로 앉으세요.”
“으음.”
동구와 이란의 뒤로 미림과 동기도 따라 들어왔다.
“뭐야? 우리밖에 안 왔어? 왜 이렇게 늦어? 엄마, 시간 아직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미림이 이란의 옆에 털썩 주저앉아 지음의 욕을 하기 시작했다.
“미리 와서 앉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요즘 애들 시간 개념도 없고....... 얘 회사에서도 이렇게 지각하고 그러니?”
“몰라.”
이란이 동구의 눈치를 보며 지음을 깎아내리려는 순간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며 강진이 들어왔다.
“양반은 못 되네. 강진이 왔니?”
강진 혼자 들어오는 거로 생각했는지, 이란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흥분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여자분은 왜 안 와? 어제 말한 사정 때문에 못 오기라도 했나?”
강진이 떡 벌어진 어깨를 슬쩍 옆으로 돌리며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요.”
“......?”
그가 몸을 틀어 비켜서자 강진의 뒤로 아담한 키의 여자가 들어섰다.
동구를 비롯해 이란까지,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동자가 지음에게 쏟아졌다.
이란의 얼굴이 금방 허옇게 질렸다.
“어, 어떠...... 어떻게 왔......! 아니 온정리엔 안 갔어?”
지음의 뒤에서 문을 닫던 강진이 지음을 자리로 안내하며 이란을 빤히 보았다.
“온정리요? 고모님, 온정리를 어떻게 아십니까?”
“온정리가 어딘데? 무슨 말이야?”
둘의 대화를 듣던 동구가 끼어들었다.
“그러게요. 무슨 말씀인지. 할아버지, 온정리는 지음 씨 고향입니다. 오늘 지음 씨 처음 보시는 거 아닙니까? 근데 고모님이 지음 씨 고향까지 어떻게 아십니까?”
“그, 그건.......”
강진의 말에 동구의 시선이 이란에게 향했다.
“아, 혹시 제가 누군가를 데려온다는 게 신경 쓰여서 사람이라도 붙이신 겁니까?”
“정말 그런 거야?”
동구가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이란을 보자, 그녀가 당황해서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그런....... 아니에요, 아버지! 얘는 무슨 그런 말을.......”
“으음. 자, 앉아라. 여기 앉아요.”
동구가 이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지음을 따뜻한 시선으로 찬찬히 보았다.
강진의 손길에 이끌려 지음은 동구와 그 주위 앉아 있는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사실 지음은 긴장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강진과 이란의 날 선 기 싸움을 보고 들으면서도 무슨 말이 오가는지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동구의 말에 자리에 앉고 나서도 다리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였다. 그녀 인생에서 한 번도 누군가와 이런 어려운 자리를 대면한 적이 없었으니까.
다행히 정갈한 음식이 놓이고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동구는 시종일관 푸근하고도 따뜻한 눈빛으로 지음을 보았고 그녀의 곁엔 강진이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동구의 옆에 앉은 이란은 시종일관 투덜거렸다.
“아무리 요즘 애들 다 그렇다고는 해도...... 강진이가 나이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인사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사회적 지위가 있습니까, 제가? 금시초문이군요. 나이가 어리지 않아서 신중하게 결정하느라 그랬습니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이란이 묻는 말에 강진은 동구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이란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지만 강진은 태연하게 물을 마셨다.
“그만들 해라. 사람 앞에 두고 뭐 하는 거야? 그런 얘기는 따로 하든지 할 것이지. 갑작스럽게 인사를 하면 좀 어때?”
“......네, 아버지.”
동거가 웬 말이냐며 한마디 더 얹으려던 이란은 동구가 끼어드는 바람에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래, 결혼식은 하지 않겠다고?”
동구가 강진에게서 들은 바를 떠올리며 지음에게 물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아니다, 죄송하긴. 그럴 수도 있지. 요즘이야 젊은 사람들이 그러지 않는다고들 하더구나.”
아쉬운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 동구는 강진이 함께 하겠다는 여자를 데려온 것만으로도 좋은 것처럼 보였다.
“그것도 좀 그래요, 아버지. 왜 결혼식을 안 해? 뭔가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첫 결혼에 왜.......”
“으흠!”
이란의 말에 동구가 경고를 하듯 헛기침을 했다.
“결혼식은 않더라도 날짜 한 번 더 잡자꾸나. 가까운 사람들 모시고 오늘처럼 다 같이 모여 밥 한 끼 먹기로 하자. 그래야 인사도 하고 그러지. 가족끼리 정도 들고.”
“네.”
“그래, 모셔 올 가족은.......”
첫 만남에 지음 혼자 덜렁 나온 걸 보며 짐작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에 동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음이 대답했다.
“없습니다.”
“없다고? 없는 게 확실해?”
지음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란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동구가 인상을 확 구기고 이란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뭐...... 입양을 했다거나. 가족이 없다니까 궁금하잖아요. 듣기로는 보육원에서 좀 일찍 나왔다고 하던데.......”
“그런 말은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이란의 선 넘는 말에 이번엔 강진이 매서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며 말을 잘랐다.
“이 사람이 없다고 하면 없는 겁니다. 고모님이 지음 씨 사정을...... 저나 지음 씨보다 잘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뭐, 뭐라고? 얘는...... 대체 너는 내가 뭐라고만 하면 그렇게 무안을 주니?”
이란이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당황한 듯 손부채질을 했다.
동구는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혀를 한 번 차고 지음을 찬찬히 보았다.
긴장한 기색이 보이긴 했지만, 주위에서 저를 두고 이런 말 저런 말이 나오는데도 차분한 여자.
강진이와 나이 차가 꽤 나는 어린 여자인데도 지음은 당황하지 않았다.
묻는 말엔 조곤조곤 대답하면서도 가볍지 않은 눈빛. 스물넷이라는 어린 나이인데도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여자.
“으음.......”
동구는 차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지음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차갑고 상처 깊은 강진의 짝으로 잘 맞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첫인사 자리는 숨 막히는 공방이 오가는 가운데 끝이 났다.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났는데 이란이 표독스럽게 지음을 보다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렇게 헤어지는 것도 아쉬운데, 오늘 집에 가서 차나 한잔하고 가지 그래요, 한지음 씨?”
그 순간 강진은 마치 이란이 지음에게 이란이 해코지라도 할 것처럼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음의 대답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강진이 이란을 보았다.
“약속 있습니다. 다음에 하시죠.”
“......!”
이란과 강진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누군가 시선을 조금이라도 돌리면 서로를 할퀼 것 같은 매서운 눈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