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차 시트에 머리를 기댄 지음은 가만히 강진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민자에게 다가서서 뭐라고 말을 건네는 걸 보고 있는 내내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떻게...... 강진 씨가 왔을까. 내가 여기 온 건.’
동희밖에 모를 텐데.
정후에게도 말하지 않고, 메모를 써두지도 않고, 동희와 만나서 얘길 나누다가 바로 출발한 거였는데.
궁금한 게 많았지만 그보다 몸과 마음이 더 지쳐서 몸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강진이 민자의 손에 들린 봉투를 보며 한참이나 얘길 하는데, 지음은 둘이 도대체 무슨 얘길 나누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마쳤는지 강진이 민자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차에 올랐다.
“.......”
지음이 그를 돌아봤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를 출발시키려던 강진이 차 뒷자리에 있는 담요를 꺼내 지음에게 건넸다.
지음이 제 무릎을 따뜻하게 덮는 담요를 보다가 강진을 돌아봤다.
“왜?”
“......왜 안 물어봐요?”
“뭘.”
강진의 목소리가 지친 듯 들리는 건 착각일까.
지음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여기에 와 있는 거냐, 연락도 없이 뭐 하는 거냐. 저 여자는 누구고, 왜 맞았냐.
묻고픈 말이 많을 텐데도 강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좀 자둬. 가서 깨워줄 테니까.”
“괜찮아요, 난.”
“당신 지금 얼굴이 어떤 줄이나 알아? 아주 엉망이야. 지쳐 보여. 더 말하기도 힘들고 무슨 말인가를 듣기도 힘들고. 온몸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자신을 힘들게 하지 마. 억지로 눈 뜨려고 애쓰지 말고, 무슨 말인가 꺼내려고 하지도 말라고.”
“.......”
“그냥 눈 감고 잠시 쉬도록 해.”
강진의 말에 지음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그녀는 강진이 담요를 끌어 지음의 몸을 덮어주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금방 잠이 들었다.
***
강진은 차를 천천히 몰았다.
가끔 험하게 차를 모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지음이 깰까 싶어 강진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방어운전을 했다.
잠들어 있는 지음을 보다가 강진이 집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전경이 좋은 산책로로 향했다.
이내 차의 엔진소리가 꺼지고 주위가 조용해졌다. 지음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강진이 어느새 흘러내린, 지음의 몸을 덮어 놓은 담요를 제대로 덮어주고 그녀를 가만히 보았다.
고개를 살짝 강진의 쪽으로 돌린 채로 색색 숨을 고르고 잠든 지음이 너무 작아 보였다.
지친 지음의 얼굴을 보며 강진은 정후와 함께 동희를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온정리 어디로 가면 됩니까?」
「그게.......」
「어디로 가면 됩니까!」
강진의 강압적인 목소리에 정후가 대신 나섰다. 정후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는 강진의 가슴을 진정시키듯 툭툭 치며 부드럽게 물었다.
「동희야, 얘기해봐. 걱정돼서 그런 거야.」
「OO 요양병원.......」
「병원? 요양병원이라니. 왜?」
「사정이 있어요.」
「무슨 사정?」
정후와 동희가 하는 말을 들으며 강진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게...... 사실 지음이가 양아버지 병원비를 대고 있어서요.」
「병원비?」
「네....... 부모라고 다 부모인가요. 그냥 다 말뿐이에요.」
동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돈이나 다 뜯어가고.......」
「그랬구나. 양부모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연락 안 하는 줄 알았어. 하도 오래전 일이고, 계속 우리 할아버지 댁에서 살고 있어서. 근데 병원비를...... 지음이가 대고 있었단 말이야?」
동희는 뭔가 할 말이 더 남았다는 듯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끝내 말을 꺼내진 못했다.
정후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구나.」
강진은 정후의 마지막 말에 지그시 이를 악물고 곧장 온정리로 달렸다.
처음부터 그랬다.
한지음은 가시가 달린 꽃과 같았다.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는 여자.
온정리로 향하는 내내 강진은 그녀에 대해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떠올라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지음이 보이지 않아 미칠 것 같은 마음으로 병원으로 달렸는데, 그 앞에서 양어머니라는 여자에게 맞는 걸 보니 눈이 휙 도는 것 같았다.
양부모고 뭐고 마음 같아선 다 망가뜨리고 싶었지만 주먹을 쥐며 가까스로 참아냈다.
뺨을 맞고 바닥에 쓰러지고도 지음은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강진은 더는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가서 지음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아니 그것도 부족해서 지음을 먼저 차에 태웠다.
당황하는 민자를 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음 씨랑 결혼할 겁니다. 미리 허락을 구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결혼을 이렇게 하는 법이.......」
「사정이 있다고 해 두죠. 병원비는 제가 해결할 테니, 앞으로 이런 식으로 지음 씨를 혼자 부르는 일은 피해주시죠.」
민자가 명함을 받아들고는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살펴보는 것을 보았다.
「지우 그룹......이면 그 큰 기업 아니에요? 돈 많겠네요?」
「네, 돈 많습니다. 그러니 뭔가 필요하면 지음 씨 말고, 저한테 연락하십시오.」
「정말 그래도 되나 몰라.」
강진의 말에 민자가 놀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해도 되나 싶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이 들었을 거다.
하지만 강진은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민자가 지음을 괴롭히는 걸 막고 싶을 뿐.
「네, 됩니다. 그러니 앞으론 저한테 연락하십시오.」
제대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민자는 돈이 많다는 강진의 말에 안심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진이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붙들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온 거야, 당신.”
그가 손을 들어 이마에 내려온 지음의 머리카락 몇 올을 올려주려고 하는데 그녀가 눈을 떴다.
“으음.......”
“정신이 들어?”
“아....... 강진 씨. 여긴 어디예요?”
지음이 몸을 일으키며 주위를 둘러봤다. 집 근처가 아닌 것 같았다.
“집...... 아닌 거 같은데. 깨우시죠.”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못 깨웠어.”
“아.......”
그의 목소리가 꽉 잠겨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강진이 지음을 잠시 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바람이라도 쐴까?”
그녀가 끄덕이는 걸 보고 강진이 먼저 차 밖으로 나갔다.
지음이 담요를 자리에 두고 그를 따라 밖으로 나갔는데,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예쁜 곳이네요.”
지음이 하늘과 바람과 불빛을 둘러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답답하던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마음에 들어?”
“네.”
“가끔...... 답답할 때 와 보던 곳이야.”
지음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강진 씨도 답답할 때가 있어요?”
그가 대답 없이 난간에 기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불빛이 반짝반짝했다. 하늘에 별 대신 자동차와 건물의 불빛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듯했다.
지음도 그의 시선을 따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름다움에 취해 저도 모르게 감탄을 하고 있는데 나직한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온정리에 갈 땐, 나한테 얘기하고.”
“.......”
“같이 가.”
지음은 입술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강진이 그녀를 마주 보았다.
궁금했다, 난생처음으로. 한지음이라는 여자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네.”
지음이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숙이는 걸 보며 강진이 그녀에게로 다가섰다.
가늘게 떨리는 지음의 어깨를 살며시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강진은 눈을 감고 지음의 꾹 닫힌 입술을 더듬더듬 찾았다.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이, 강진의 입술이 닿자 스르르 열렸다.
“으음......!”
지음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키스에 당황했지만, 이내 그의 숨결을 받아들였다.
그의 입술은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고, 그동안 아프고 상처 입었던 지음의 마음을 달래줄 만큼 부드러웠다.
지음은 분명 강진과 계약으로 맺어진 사이일 뿐인데. 그걸 알면서도 지음은 오늘의 키스가 어쩐지 다른 때와 다르다고 느껴졌다.
가슴이 뛰는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단단한 강진의 품에 안기기를 바랐다. 그의 몸을 두 팔로 꽉 안아보고 싶었다.
키스가 다른 게 아니라 강진에 대한 마음이 달라진 걸까.
숨이 찰 때까지 몰아붙이던 그가 입술을 뗐다. 지음의 입술 가까이에서 강진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네가 없어진 줄 알았어.”
강진이 몸을 일으켜 그녀를 내려다봤다.
“네?”
지음이 고개를 들어 강진을 보았다. 그 바람에 그의 입술에 지음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강진이 손가락으로 지음의 이마를 슥 문질렀다.
“전화도 안 되고 사무실에도 없고 집에도 없고.......”
“아, 그건.......”
“처음으로 무서웠다.”
“네?”
“네가 말도 없이 사라진 줄 알았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되고.......”
“미, 미안해요. 너무 경황이 없어서 연락을 한다는 게.......”
고갤 숙이고 목소리가 줄어드는 지음을 보며 강진이 그녈 당겨 안았다.
품 안에 지음이 쏙 들어와 안겼다. 따뜻하고 포근했고 자신에게도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안아주는 게 안아주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되는 일이라는 건 처음 알았다.
강진이 눈을 감고 지음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팔이 천천히 강진의 허리에 둘리는 게 느껴졌다.
“이렇게 만났으니 됐어. 앞으로는 그렇게 사라지지 말라고.”
“네.”
“전화는 받도록 해. 충전도 항상 해두고. 그래야...... 걱정을 안 하지.”
“......알겠어요.”
“다시는...... 어디 가서 나 없는 데서 소리도 치지 말고.”
“.......”
강진의 나직한 목소리에 지음의 입술이 점점 떨렸다.
“다시는 어디서 맞지도 말고.......”
지음의 보드랍고 통통한 입술이 떨리더니 이내 눈 밑이 간질간질했다. 코끝도 매워지고 목소리에 물기가 차올랐다.
‘그래요, 그럴게요.’
“그래, 그러자.”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다짐하는 강진의 품에서 지음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