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1/94)

#40화.

지음은 병원 앞에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울고불고 떼를 쓰듯 매달리는 민자 때문에 결국 그녀가 이끄는 곳으로 향해, 병원 근처에 있는 식당에 민자와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마주 앉는 순간부터 후회를 했다. 그녀가 바닥에 드러눕는다고 하더라도 함께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왕 온 김에 밥이라도 먹고 가자며,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게 떠올라 음식을 시키려 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민자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좋지 않았다.

“.......”

막차 시간은 열 시.

지음은 민자가 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시계를 보았다. 지금은 아홉 시. 먹는 걸 보고 부지런히 가면 시간 내에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어차피 그 전에 가봤자 마냥 기다려야 할 뿐이었다.

“왜?”

“.......”

지음이 계속 시계를 보는 게 못마땅한지 밥을 먹던 민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아까부터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자꾸 시계만 봐. 네가 그렇게 안 먹으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옛날부터 너는 꼭 그랬어. 입도 짧고 어찌나 까탈스러운지 주는 대로 복스럽게 먹는 법이 없었어.”

지음은 민자의 타박에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말에 타격을 입기엔 지음이 너무 커버렸다.

그냥 그녀가 빨리 밥을 먹었으면, 그래서 어서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얘. 좀 자고 가면 안 되니?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 없이 봉투만 달랑 내밀고 가는 거야?”

지음은 식사가 다 끝나갈 무렵 들린 민자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랑 같이 잔 적 있어요? 밥 먹는 것도 처음 아니에요?”

저도 모르게 날카로워지는 목소리에 지음이 숨을 한번 골랐다.

“그러니 하는 말이지. 사람이 밥도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그래야 정이 드는 건데 원.”

언제부터 그렇게 나랑 정이 들고 싶었다고. 지음이 눈썹을 찡그렸다.

“......빨리 드시기나 해요. 막차라도 타고 가야 하니까.”

“응? 오늘 가려고? 그러지 말고, 지음아 오늘 천천히 밥 먹고....... 아니다. 그래, 아예 자고 가라.”

민자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게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든 참아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지음이 두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 일어났다. 놀라는 민자의 얼굴을 보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려놓았다.

“......나는, 당신들이랑...... 연 끊고 싶은 사람이에요.”

“지음아.”

말을 듣는 민자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건 심한 거 아니니. 안 그래? 우리가 같이 산 세월이.......”

“먼저 일어날게요, 차 시간이 있어서. 드시고 가세요.”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을 만큼 역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지음은 이럴 걸 알면서도 시간 때울 겸 밥이라도 먹자는 생각을 한 스스로를 나무라고 싶었다.

그녀가 식당 문을 나서려다가 문을 잡고 돌아봤다.

“아, 그리고 다시는 찾아온다 어쩐다 전화하고 하지 마세요, 알아서 입금해 드릴 테니까. 그 얘기 하러 온 거예요, 오늘도.”

그녀가 나가는 걸 보고 민자 역시 숟가락을 놓고 지음을 따라나섰다.

급하게 가느라 신이 벗겨질 뻔했지만, 간신히 발을 질질 끌면서 지음의 손을 붙들었다.

“지음아, 얘!”

“이거 놓으세요.”

붙잡는 이와 떠나려는 이의 의미 없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지음은 민자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병원 앞까지 가게 됐다. 어찌나 손에 힘이 세고 우악스러운지 붙잡고 매달린 손길을 뿌리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아무것도 먹지도 못하고 먼 길을 온 지음은 지치고 피곤해서 떨칠 힘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지음아, 얘. 그럼 자고 가라고는 하지 않을 테니까 병원 가서 아버지 얼굴이라도 좀 보고 가. 병원에 저러고 누워있은 지가 몇 년인데 어떻게 한 번 와 보지도 않아. 참 매정도 하다, 너도. 생긴 건 안 그렇게 생겨서 어쩜 그렇게 독.......”

“아버지는 무슨 아버지! 나한테 그 사람 얘기하지 마세요!”

지음이 민자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한 번쯤 돌아볼 만한 큰 소리였다.

“어머 얘가...... 왜 이래?”

모여드는 주변의 시선에 당황한 민자가 그녀에게 다가서려 하자 지음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흔들었다.

울고 싶었지만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분이 풀리지 않아서 이렇게 민자와 마주하고 서 있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한구석에 남아 있는 죄책감 때문에, 재진이 병원에 누워있는 게 어느 정돈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해서 참고 버틴 건데.

“그래도 너한테 아버지잖아. 넌 어쩜 애가.......”

“왜! 왜 그 사람이 내 아버지야! 대체 나한테...... 뭘 해줬다고!”

“......!”

지음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어쩐지 입 안에서 약하게 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

강진은 차를 세우고, 건물을 올려다봤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OO 요양병원이요.」

동희의 말에 오긴 왔지만.

‘여기에 누가 있다는 거지?’

강진이 차를 멀찍이 대고 내려서 병원으로 들어가려는데 입구에서 지음이 웬 여자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한......지음?”

이렇게 바로 찾게 될 줄 몰랐기에 강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래도 너한테 아버지잖아.”

“왜! 그 사람이 왜 내 아버지야! 나한테 뭘 해줬다고!”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다가서려던 강진이 지음의 악쓰는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췄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렇듯 감정을 폭발시키는 사람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지음과 마주하고 있던 여자가 다짜고짜 지음의 얼굴을 갈기는 게 아닌가!

지음의 몸이 휘청하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대체 그 말버릇이 뭐야! 너, 너 때문에! 너 때문에......!”

“.......”

지음은 말없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손을 툭툭 털었다.

그런 지음을 보며 여자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도 치미는 감정을 다스리느라 숨을 고르다가 간신히 말했다.

“일단, 어차피 막차도 끊겼으니 ......자고 가라. 자고 내일 얘기해.”

떨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지음이 그녀를 노려봤다.

“당신도...... 내 엄마 아니야. 한 번도 엄마였던 적 없었잖아.”

“.......”

“그때는 당신도 무서운 거, 무서웠던 거 나도 알아. 당신한테 나 대신 맞아달라고 안 했어. 그냥.......”

지음은 감정이 북받쳤는지 떨리는 말을 차마 잇지 못했다.

“됐어요. 걸어서라도 갈 거니까 걱정 마요.”

쓰러질 때 날아간 가방을 찾으려 몸을 돌리는데, 강진이 가방을 집어 들어서 툭툭 털었다.

지음은 이어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몸이 굳은 듯 서 있었다.

“당신이 왜 걸어서 가. 내가 있는데.”

“......!”

강진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지음을 보다가 그녀의 손을 잡고 제 뒤로 살짝 끌었다.

항상 따뜻했던 지음의 손이 아주 차가웠다. 그녀의 여린 손바닥엔 아직도 작은 돌멩이, 흙 따위가 묻어 있었다.

손을 떼려던 강진이 지음의 손을 빤히 내려다봤다.

“손이...... 엉망이네.”

‘괜찮아요.’

지음이 말을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강진을 보니 마음이 더 나약해지는 것 같고, 안에 꽉 들어찬 슬픔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강진이 그녀의 손바닥을 살살 털어주었다. 혹시라도 상처가 있는 건 아닌지 꼼꼼하게 살펴보기도 했다.

“아무렇지 않아요.”

지음이 강진에게 잡힌 손을 뺐다.

“너무 어둡다, 여기. 이따 멍든 곳은 없는지 제대로 살펴봐.”

“그럴게요.”

그녀의 손을 살펴본 강진이 지음을 자신의 뒤로 보냈다.

지음은 강진이 이끄는 대로 강진의 뒤에 숨어 서 있었다.

지음보다 더 놀란 얼굴로 강진을 보던 민자가 뒤로 멈칫 물러났다.

“근데...... 누, 누구세요?”

민자가 지음에게 도움을 구하려는 듯 그녀를 보았지만, 강진이 그 사이를 가로막아 섰다. 마치 민자의 시선이 지음에게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완전히 지음을 뒤에 세운 후에야 민자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차강진입니다.”

“예?”

“지우 문화재단 대표 차강진입니다. 아, 이렇게 말씀드리면 잘 모르시겠군요.”

강진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민자에게 건넸다.

“한지음 씨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이미 저희가 동거 중인데...... 인사가 늦었습니다. 경황이 없어서 따로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민자는 강진이 건넨 명함과 그를 번갈아 보며 머뭇거렸다.

강진은 제 뒤에 숨은 지음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걸 느꼈다. 살짝 떨어져 있는데도 그녀가 숨을 몰아쉬며 떨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강진이 지음을 슬쩍 돌아보다가 민자에게 말했다.

“오늘은 아무래도 길게 말씀드리지 못할 거 같습니다. 일이 진행되기 전에 미리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순서인데,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질 못했습니다. 다음에 정식으로 찾아뵙고 인사드리려고 하는데.......”

“예? 아.......”

“그래도 괜찮을까요?”

“네, 뭐 그, 그러세요.”

민자가 더듬더듬 답을 잇자,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고 차로 향했다.

문을 열고 지음을 보았다.

“......타.”

“.......”

지음은 저를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는 민자를 보다가 힘없이 차에 올랐다.

지음을 태운 강진은 차에 타지 않고 민자에게 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차 안에 앉아 한참이나 둘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데 몸이 자꾸 떨렸다.

그리곤 이내 시트에 머리를 기댄 지음이 지친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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