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지음이 버스에서 내렸을 땐 이미 시간이 많이 늦은 뒤였다.
피하고 싶었고, 지금껏 잘 피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순 없단 걸 잘 알았다.
지음은 병원으로 향했다.
흰색으로 깨끗하게 올라간 병원을 한참 올려다봤다. 차마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꽉 쥔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쉼 없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지만 그게 다였다.
“하....... 들어......가야 해.”
그러면서도 지음은 멈칫거리며 병원을 보다가 돌아섰다가를 반복했다.
커다란 병원을 뒤로하고 서서 마음을 가다듬는데 누군가 병원에서 나오며 구시렁거렸다.
“도대체 언제 온다는 거야? 시간이 몇 신데, 대체!”
“......!”
지음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다신 듣고 싶지 않았던 이민자의 목소리였으니까.
“내가 기어이 올라가야.......”
열받아서 못 참겠다는 듯 구시렁대던 민자는, 뒤돌아 서 있던 지음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지음이 몸을 돌려 그녀를 보자, 뿔났던 표정을 얼른 감추고 들고 있던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마치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얼굴을 얼른 바꾸고, 그녀 특유의 불쌍한 목소리와 말투로 바꾼 채 지음에게 다가섰다.
“어, 지음아! 언제 왔어?”
“.......”
웃으면서 다가오는 민자를 보고 있으니 소름이 끼쳤다.
저도 모르게 지음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났다.
민자는 지음의 반응을 보며 눈썹을 찡긋거렸지만, 그녀를 자극할 생각은 없었는지 다시 표정을 관리했다.
“왔으면 전화를 좀 하지. 난 또 안 온 줄 알고 걱정했잖아. 세상에 이 밤에 여자애가 겁도 없다, 참. 어떻게 이렇게 늦게 올 생각을 했어, 그래? 엄마한테 전화라도 하지. 그랬으면 내가 저 터미널 앞으로 데리러라도 가잖니.”
역겨운 거짓말.
더구나 이렇게 지음을 불러들인 것도 민자 자신이면서....... 제정신인가? 아니, 아무래도 그녀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지음은 저를 학대하던 재진이 역겨운 것만큼, 민자 역시 그렇다고 생각했다.
지음이 아프고 힘들 땐 방관자 역할을 자처해 놓고 매번 돈까지 뜯어가면서, 엄마......? 걱정을 했어?
하지만 그녀와 길게 얘길 해 봤자 입만 아팠다. 얼른 할 말, 할 것만 하고 가는 게 낫다 싶었다.
“나 서울에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응, 그거. 그럼 내가 뭐 그것도 모를 줄 알았니? 네가 그렇게 도망치듯 가 버리면 내가 영영 못 찾을 줄 알았냐고.”
온정리의 그 누구도, 민자와 접점이 있는 사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지음이었다. 심지어 그동안 자신을 받아준 정후의 할아버지께도.
그분껜 죄송한 일이지만 차라리 모르는 게 더 편할 거란 생각을 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민자가 알 수 있었는지, 그것도 주소까지.
“......말해요. 누구한테 들었어요?”
“알 거 없어, 넌.”
비아냥거리듯, 마치 지음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다 이긴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는 민자에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지음은 포기를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알 거 없으니.”
지음이 가방을 열고 봉투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돈은...... 입금해 드린다고 했잖아요.”
마치 미저리처럼 동희에게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내 놓은 민자에게, 지음은 온정리로 달려오기 전에 전화를 했다. 물론 지음의 전화가 아닌 공중전화를 찾아서.
지금 당장 입금해 줄 테니까 앞으론 동희에게 그런 협박성의 메시지 따위는 보내지도 말고 전화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민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무조건 얼굴을 봐야 한다며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자신이 서울 집으로 쳐들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그녀가 전화기 너머에서 소리를 높여 말한 집 주소는, 지금 강진과 지음이 함께 살고 있는 그 집이 맞았다.
지음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래서 이렇게 당장 민자에게 달려와야만 했다.
“대체 왜 굳이 이렇게 받아야 한다는 거예요? 나랑 서로 얼굴 마주 봐서 뭐 좋은 일이 있다고?”
탁!
지음이 가방에서 종이봉투를 꺼내자마자 민자는 손이 얼얼할 정도로 아프게 봉투를 채갔다.
“그거야 뭐...... 필요하니까.”
“.......”
그녀는 봉투를 열어보지도 않고 품 안에 고이 넣으며 웃었다.
“온 김에 아버지 보고 갈래?”
“아......버지?”
그 단어가 나오자 지음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나가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았다.
지음은 폭발할 것 같은 제 마음을 다스리느라 머리를 쓸어올리며 숨을 후 내뱉었다. 속에서 썩은 내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돈은...... 매달 꼬박꼬박 입금해 드릴 테니, 앞으로는 절대 동희한테 전화하지 마세요. 사람이...... 양심도 없어요? 걔가 무슨 죄라고 그렇게.......”
“그거야.”
민자가 지음의 말을 툭 잘라먹었다.
“네가 통 연락이 안 되니 그렇잖아. 내가 얼마나 걱정을 하겠어. 그래도 얼굴도 예쁘장한 계집앤데. 요즘 세상 흉악스러운 거야 다 아는 거고.”
“......언제부터 그렇게 내 걱정을 했다고요.”
“얘가, 너 그렇게 말하면 서운하다. 내가 물론...... 좋은 엄마는 아니지만 그래도 널 얼마나 걱정하는데.”
민자가 훌쩍이는 것처럼 보이자, 지음은 기가 막혀서 입을 떡 벌렸다.
“뭐가 됐든 동희한텐 연락하지 마세요.”
“너 아직도 휴대전화 없니?”
“네! 없어요! 누구 좋으라고요?”
지음이 민자를 노려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아니 얘가...... 왜 소리를 질러? 그럼 어떻게 해. 걔 아니면 너랑 연락을 할 수가 없잖아, 급한 일도 많은데.”
“앞으로, 평생......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꿈 깨요.”
“뭐, 뭐라고?”
지음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민자에게서 휙 돌아섰다. 원하는 대로 돈을 줬으니 최소 오늘만큼은 더는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았다.
“얘! 지음아!”
민자가 불러도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지음의 앞으로 쪼르르 달려와 지음의 양팔을 붙들었다.
“같이...... 여기까지 오느라 저녁도 못 먹을 텐데, 밥이나 먹고 가.”
“내가 왜 그쪽이랑 밥을 먹습니까?”
“왜냐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네 엄마잖니. 요 며칠 너랑 연락도 안 되지, 병원비는 올랐지, 갚을 건 많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오늘 여태껏 한 끼도 못 먹고.......”
“하.......”
민자가 티 나게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내며 울먹거렸다.
***
일찍 잠에 들까 하던 정후는 출출한 생각에 라면을 먹으며 티비를 보고 있었다.
쾅쾅쾅!
-박정후!
“캑! 콜록콜록!”
아무 생각 없이 후루룩 라면 국물을 마시는데 문을 부술 듯 들리는 소리에 놀라 기침을 했다.
“저건...... 강진이 목소린데......?”
정후가 라면 면발을 후루룩 삼키며 몸을 일으켰다.
“강진이냐?”
문을 열자 화가 잔뜩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강진이 서 있었다.
그 기세가 평소와 비할 데 없이 너무 세고 무서워서 정후가 뒤로 물러나는데 강진이 들어올 생각도 않고 문을 붙잡았다. 얼마나 문을 꽉 붙들고 있는지 손가락이 허옇게 질렸다.
“한지음 어딨어?”
“......응?”
“.......”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닌데 지음이를 왜 여기서 찾아? 집에 같이 있는 거 아니었어?”
“사라졌어. 전화도 안 받고.”
“어디 뭐 잠깐 바람 쐬러 나간 거 아냐? 아, 잠깐. 내일......?”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정후는 내일이 무슨 날인지 깨닫고 눈이 커졌다. 내일은 지음이 강진의 집에 인사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하.......”
강진이 비틀거리며 문에 기대섰다.
괴로워하는 강진을 보던 정후가 그의 옆에 나란히 벽에 기대섰다.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어렵게 입을 뗐다.
“알 만한 애가...... 하나 있는데.”
“알만한 애?”
정후의 말에 강진이 몸을 일으켜 그를 보았다.
“무슨 말이야? 지음이가 갈 곳을 알 만한 애가 있다는 거야?”
“......말해야 하나 모르겠.......”
“박정후!”
“.......”
말하기를 망설이자 강진이 정후를 벽에 붙이고 다가섰다.
***
강진은 정후와 함께 다시 아파트 앞으로 향했다.
“......그런데 걔도 모를 수도 있어, 강진아.”
“.......”
“그냥 친구라서.......”
정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를 태운 강진의 차가 아파트 앞에 섰다.
“내려.”
“어? 어, 그래.”
잠시 후 강진과 정후의 앞에 동희가 불려와 있었다.
동희는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정후의 전화를 받고 급하게 달려온 듯했다.
“동희야.”
“......네, 형.”
동희는 강진의 얼굴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후가 긴장한 동희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이쪽은 지음이 고향 친구 김동희, 여긴...... 지음이랑 결혼할 분. 인사해.”
“아, 안녕하.......”
“차강진입니다. 혹시 지음이, 어디 갔는지 아십니까?”
“에?”
동희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다가 얼굴을 들었다.
“지음이가 지금 이 시간까지 연락도 없고, 집에도 없는데 혹시 어디 갔는지 아시면 알려주시죠.”
“아, 그게.......”
동희가 정후와 강진을 번갈아 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황한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정후가 끼어들었다.
“아, 괜찮아, 동희야. 그냥 지음이랑 연락이 안 돼서, 너무 걱정돼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혹시 아는 게 있으면.......”
“오, 온정리에.......”
“온정리? 온정리에 갔습니까, 그 사람?”
“.......”
강진의 말에 동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긴 왜 갔습니까? 그것도 이 밤에?”
“사정이 좀...... 있다고.......”
강진이 동희의 말을 자르며 그에게 말했다.
“온정리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그게.......”
“어디로 가면 됩니까!”
강진의 말에 동희가 울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