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지음은 뒤에서 그녀를 안타깝게 부르는 동희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했다.
“지음아! 어, 어디가?”
“.......”
그는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올 때까지 지음을 계속 따라오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지음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길로 터미널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이용하는사람이 없어서 온정리로 향하는 버스에 자리가 남아 있었다.
버스에 올라 지음이 창밖을 보았다.
창밖엔 어느새 밤이 내려 있었다.
지음은 서울로 올라오던 날처럼 창에 후, 입김을 불어 넣고 뿌예진 창문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순식간에 밖이 또렷하게 보였다.
‘대체...... 어떻게 안 걸까.’
창은 이렇게 손가락으로 닦으면 또렷하게 보이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민자가 자신의 주소를 아는 건...... 알 수가 없었다.
지긋지긋했고, 벗어나고 싶었다.
도망치듯 서울로 오면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월급이 나오면 또...... 얼마나 보내야 하는 걸까.’
답답하고 징글징글했다.
평소 감정적인 것에 둔한 지음이 답답하다는 마음을 처음 갖게 된 것도 민자와 재진 때문이었다.
그날도 재진에게 죽도록 맞고 정신이 흐릿해질 즈음이었다.
재진은 도망가려는 지음을 붙잡았다.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그녀의 옷이 어딘가에 걸려서 찢어지고 말았고.......
「이년 보소? 벌써...... 이렇게 컸어?」
어깨와 그 아래까지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지음의 살결에 닿은 재진의 눈빛이, 소름 끼칠 정도로 더럽고 싫었다.
그가 손에 집은 부지깽이를 던져버리고 천천히 다가왔다.
흐흐흐 추접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드러난 지음의 발목을 붙잡아 당기는 순간.
「아......!」
순식간에 지음의 몸이 흙바닥에 쓸리며 재진의 앞까지 끌려갔다.
재진이 그녀의 몸 위를 덮치려는 순간 지음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마당에 아무렇게 잡히는 돌멩이를 들어 재진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억! 아이고야!」
재진이 이마를 움켜잡으며 옆으로 쓰러졌다.
그가 이마에 댄 손, 그 손가락 사이로 핏물이 흐르는 걸 본 순간 지음은 어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옮겨 간신히 기다시피 대문을 나서서 도망치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어느 순간 얼굴을 세차게 때리는 차가운 감촉에 눈을 떴다.
비를 다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던 지음에게 동희가 우산을 씌워주며 옆에 앉아 울고 있었다.
「.......」
「어헝, 지음아....... 너 피, 피 많이 나.」
지음은 동희의 말에 제 손과 몸을 내려다봤다.
얼굴도 몸도....... 어디 성한 곳 하나 없이 퉁퉁 붓고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동희의 부축을 받고 몸을 일으켜 봤지만, 여기저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어서 저도 모르게 끄응 신음 소리를 냈다.
「아.......」
「아파? 괜찮아? 벼, 병원 가자.」
「......너 돈 있어?」
「아니.」
「바보야. 병원 가려면...... 돈 있어야 해.」
지음이 이를 악물고 말했지만, 울고 싶었고 주저앉고 싶었다. 다 포기하고 죽어버렸으면...... 싶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하지만 지음은 악착같이 살았다. 죽고 싶고 주저앉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니까.
그 집에서 벗어났다고 해 봤자 그녀가 지낼 수 있는 곳은 고작 온정리였지만, 재진을 보지 않는 것만으로도 숨은 쉴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시간이 아주 오래 흘러 겨우 상처에 연약하게 딱지가 앉으려는 순간 민자가 찾아왔다.
「......!」
지음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보고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그녀의 반응이 이상하다고 느낀 민자 역시 지음을 알아보고 한걸음에 달려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는 듯.
「너! 지음이구나! 세상에, 잘 컸구나. 그날 이후로 오랜만이지?」
「.......」
어린 여자아이가 아버지라는 작자에게 맞고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겨 도망쳤는데, 한 번 찾아오지도 않다가.......
자신이 돈을 벌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딱 나타났다고?
아니나 다를까 이어지는 민자의 말에 지음의 입이 다물어졌다.
「네가 그렇게 아버지를 돌로 내리치고 나서 곧장 병원에 입원하셨다. 의식도 없고 지금은.......」
민자는 재진이, 지음이 휘두른 돌멩이에 뇌를 심하게 다쳐 인간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게 되었다고.
「그동안이야 내가...... 너도 어리고 해서, 어찌어찌 내가 끌고 왔지만 따지고 보면 네가 책임져야 하지 않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내가...... 내가, 왜요? 내가 왜!」
지음이 악에 받쳐 소리를 치자, 민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에 질 새라 지음 역시 민자를 똑바로 올려다보는데 민자가 지음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이거...... 놔요!」
「인정 못 하겠다면 네가 봐, 직접. 네 눈으로 직접 보고 얘기해! 내가 왜?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민자는 싫다고 버티는 지음을 끌고 병원으로 향했다.
지음은 그를 두 번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저를 밤마다 죽일 듯 때리고 발로 차고, 끝내는 여자로서의 인생마저 망가뜨리려던 남자를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민자의 우악스러운 힘이 지음을 병원, 재진이 누워있는 침실 앞에 데려다 놓았다.
죽은 듯 누워있는 재진의 모습은 지음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냥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지음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지음의 귀에 민자의 비난 섞인 목소리가 쏟아져 들렸다.
「봐! 네가 해 놓은 꼴을 보라고! 네가 네 아버지를 어떻게 했는지!」
「.......」
보고 싶지 않다.
「이래도 모른 척할 거야? 저게 산 거야? 저건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 죽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눈 뜨고 보라고! 보라니까!」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무도 알아준 적이 없는데, 왜 이 사람이 이렇게 된 걸 자신이 알아야 하고, 책임도 자신이 져야 한다는 말인가.
「보, 보고 싶지 않.......」
「왜? 까딱 잘못했으면 죽을 뻔했다고! 제 아버지를 저리 만들어 놓고 발뺌을 하려고 해?」
「.......」
「배은망덕에 불효막심한 년. 내가 지금까지는 봐줬지만 살인자 년까지 되고 싶지 않으면 병원비는 앞으로 네가 대.」
지음은 병원 밖으로 터덜터덜 걸어 나왔다.
「이 못된 년아!」
등 뒤로 민자의 악의 섞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지음은 어떠한 대응도 하지 못했다.
밖으로 나와 숨을 후, 고르는데 그제야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울지......마. 뭘 잘 했......다고.」
지음은 입술을 꽉 물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때부터였다, 자신에게 자꾸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으면 입술을 무는 버릇이 생긴 게.
지음은 잊고 묻으려 해도 꼬리표처럼 떨어지지 않는 과거가 지긋지긋했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한숨을 쉬는데 강진에게서 끊임없이 전화가 왔다.
‘받을 수가...... 없어요, 강진 씨. 미안해요.’
지음은 휴대전화의 전원을 꺼 두었다.
***
“하아.......”
강진은 불 꺼진 집 안에 덩그러니 서서 지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진이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어딜....... 아는 게...... 없군.”
아무리 계약으로 만난 일 년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일 년 이후면 끝나게 될 만남이라 하더라도.......
여태껏 지음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미치도록 답답하게 만들었다. 씁쓸하고 쓰리고.......
어딜 가서 찾아야 하나 고민하던 강진의 머릿속에 퍼뜩 스치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차이란.
“혹시......?”
강진은 제가 모르는 사이에 이란이 뭔가 손을 쓴 건가 하는 생각이 미치자, 곧장 본가로 달려갔다.
그 시각, 이란과 미림은 서로의 얼굴에 팩을 붙인 채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모님, 여ㅤㄱㅣㅆ습니다.”
아주머니가 테이블 위에 비스킷과 차를 내려놓았다.
이란과 미림이 간식을 먹으며 얘길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응? 누구야, 이 밤에?”
이란의 말에 아주머니가 얼른 확인하고 문을 열었다.
“사모님, 차 대표님 오셨는데요?”
“누구? 강진이?”
“오빠가 왔다고?”
이란과 미림이 얼굴에 붙은 팩을 떼고 소파에서 일어나는데 강진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얼굴이 잔뜩 굳은 채로 예의 차릴 것도 없이 이란을 향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음이한테 찾아가셨습니까?”
“뭐...... 뭐라고? 밤늦게 찾아와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란의 뒤에서 미림은 눈이 동그랗게 뜨고 서 있었고, 이란은 황당한 얼굴로 강진을 마주하고 있었다.
강진이 이란에게 다가서며 다시 말했다.
“저 몰래 지음이한테 찾아가셨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대체, 뭐라고 하셨기에 이 밤에, 이 밤에......!”
“그러니까, 걔가 이 밤에 사라지기라도 했다? 그 얘기야? 그게 나 때문이고?”
“.......”
강진이 대답을 못 하자 이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었다. 그녀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강진에게 다가섰다.
“말해봐, 강진아. 그러니까 너랑 결혼할 사람이 이 밤에 어디로 잠적이라도 한 거야?”
“말 가려서 하시죠.”
“내일 이런 집에 인사라도 오려니까 복잡한가 보지. 그러기에 집구석이 어떤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사랑이며 결혼이야?”
강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지음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에 흥분하고 찾아왔지만, 이란의 말이 틀린 것도 없었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소란이야? 강진이 너는 언제 왔어?”
할아버지가 나오며 인상을 쓰자, 강진이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쉬세요.”
그를 보고 고소해하는 이란을 보던 강진이 그녀에게 다가섰다. 할아버지에겐 들리지 않게 조용히, 이란을 향해 몸을 숙여 말했다.
“한 번만 더...... 저 없이 그 사람 만났다가는 고모님이라도 가만 안 둡니다. 명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뭐, 어머어머!”
강진은 이란에게 경고를 하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미쳤나봐, 쟤가.”
이란은 정말 무슨 일이라도 벌일 것 같은 강진의 음성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이란이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쓸모 있는 여자네.”
“엄마, 무슨 일이야, 대체?”
“넌 몰라도 돼.”
***
그의 등 뒤로 대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집 밖으로 나간 강진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한지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자신에게, 이렇게 그녀가 사라지자 어쩔 줄 몰라 하는 바보 같은 자신에게.......
“어디야.”
강진은 차에 올라 곧바로 정후에게 전화를 했다.
-어? 나? 집인데. 왜?
뚝.
강진은 대답도 않고 전화를 끊고 정후의 집으로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