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94)

#37화

월급을 미리 달라는 말을 꺼내기까지 힘들었지만, 지음이 걱정을 했던 것처럼 희라는 따져 묻지 않았다.

미림과 함께 달려들어서 돈이 왜 필요하냐, 이제 갓 입사한 신입 주제에 무슨 소리냐 말도 안 된다 할 줄 알았다.

물론 미림이 득달같이 달려와 희라의 옆에 서서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 숙덕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안 된다고 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지음은 자리에 앉은 직후, 귀찮은 표정으로 결재를 올리며 짜증을 부리는 희라를 살피다가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가는 미림을 보았다. 그녀는 뭐가 그리 다급한지 발을 동동거리며 휴대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강진 씨 고모님께 전화를 한 거겠지.’

차이란의 귀에 들어간다면 강진에게도 바로 들어갈 것이다. 지음이 가장 걱정하는 건 그거였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결재가 올라간다면 회사의 대표인 강진 씨도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서류를 보던 지음이 멈칫했다.

그런 거라면...... 미리 강진에게 말을 했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강진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복잡한 마음에 지음이 펜으로 종이에 의미 없는 낙서를 하는데 동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뭐야? 한지음 씨, 회사에서 휴대전화 진동으로 해 놓는 것도 못 해? 그 정도 매너도 없나? 이래서 사회 경험 없는 사람을 받으면 안 되는 건데.”

“......죄송합니다.”

아침부터 돈 문제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진동으로 해 두는 걸 깜빡했다.

“뭐 해? 안 나가? 받든지 꺼두든지 해야 할 거 아냐?”

“.......”

지음이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전화를 손으로 감싸듯 들고 밖으로 나갔다.

“뭘 봐?”

사무실 코앞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미림이 지음을 노려보며 한마디를 꺼냈고, 지음은 아예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 나야.”

-지음아.

“응”

-어디야?

“나 회산데 왜?”

다행히 옥상엔 아무도 없었고, 지음은 높은 곳에 시원하게 부는 바람을 맞으며 숨을 골랐다.

-그게.......

무슨 일인지 동희는 평소보다도 더 망설이고 있었다.

“그냥 얘기해, 나 다시 들어가 봐야 해.”

-후, 그게...... 너 내일 아침까지 안 내려오면.......

“.......”

누구의 말인지 단번에 알아챈 지음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 서울로 찾아오시겠대, 아줌마가....... 어쩌지?

“여길 어떻게 알고?”

지음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겨우 돈을 마련할 방법이 생겼는데 그새를 못 참고 서울로 올라오겠다니.

“혹시 동희 네가 말했어? 나 서울에 있는 거?”

-어? 나 아니야! 진짜 절대 아니야!

그래, 홧김에 말하긴 했지만 그랬을 리가 없다. 동희는 겁이 많아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돈. 보낼 거야.”

-어어, 말했지. 말했는데, 무조건...... 아줌마가 네가 직접 와야 한 대. 널 좀 봐야겠대, 꼭.

“.......”

지음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강진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었지만 그녀에게 답답한 마음을 표출할 방법이 별로 없었다.

-근데 거짓말이 아닌 거 같아.

“......?”

-그, 그러니까...... 네 주, 주소를 알아.

“뭐?”

지음이 그녀답지 않게 소리를 질렀다.

가슴이 미친 듯 뛰었다.

그럴 리가 없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떠나왔는데, 온정리에서. 민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조심했는데.

지음은 가슴이 철렁했다.

“어떠...... 어떻게 안다는 거야? 너랑 나밖에 모르는 일인데.......”

심지어 구체적인 주소는 동희조차 알지 못했다. 몇 호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

지음과 강진만이 아는 집 주소를 어떻게 민자가 알 수 있었다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정말 그랬어. 내일 4시까지 병원으로 오, 오지 않으면...... 아줌마가 직접 서울로 오시겠대.

“......알았어. 이제 끊어.”

-지음아?

그녀를 부르는 다급한 동희의 목소릴 들으면서 지음은 눈을 감았다. 서둘러 휴대전화를 끊고 고개를 푹 숙였다.

***

회사에서 일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참 더디게 흘렀지만 어쨌거나 퇴근 시간이 되었다.

희라와 미림은 먼저 퇴근했고, 지음은 마지막까지 멍하니 사무실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버스를 타려는데 뒤에서 정후가 그녀를 불렀다.

눈에 익은 차가 스르륵 지음의 옆에 섰다.

“지음아.”

“.......”

“타, 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지음은 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정후의 차에 올랐다.

“지금 가는 거야? 좀 늦었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더니.”

“사무실엔 아무도 없어요. 정리하느라 조금 늦게 나왔어요.”

“응. 강진이는...... 들었겠지만 오늘 외부 회의가 늦어져서 많이 늦을 거야.”

“네.”

지음은 그러려니 했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앞에 열린 가시밭길을 어떻게 건너야 할지 고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잠시 달리던 정후가 그녀를 힐끔 보았다.

“내일...... 인사드린다며?”

“......네.”

“혹시 가족이나 집안 사정에 대해 모르는 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

“가서 밥 먹을 때, 어차피 회장님은 강진이랑 결혼할 상대라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여실 거라 좋으실 테니 걱정이 없는데, 고모님만 좀 조심하면 돼.”

“.......”

“어차피 강진이 있으니까 알아서 잘하겠지만....... 지음아?”

내일 집안 인사할 때 주의사항을 얘기해주던 정후는 지음이 전혀 집중하지 못하는 걸 보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지음아? 왜 그래?”

“......네? 뭐라고 했어요?”

창을 바라보던 지음이 정후를 보며 되물었다.

“혹시 너...... 무슨 일, 있니? 말 못 할?”

“무슨...... 말이에요?”

지음이 깍지 낀 두 손을 꽉 잡았다.

“아니 뭐...... 돈이 필요하다거나 곤란한 일이 있다거나 그런 거.”

“.......”

들어갔구나, 정후의 귀에도.

그 얘긴 강진에게도 얘기가 들어갔을 수도 있다는 건데.

‘왜 강진 씨는 아무 말 하지 않는 걸까.’

정후는 계속 지음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지만, 그럴수록 지음은 더욱 입을 꾹 다물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강진이한테.......”

정후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지음이 흠칫 놀랐다.

“얘기해, 지음아. 아니면, 아직 좀 어렵다면 나한테라도.”

“.......”

“이제 곧 둘이 부부가 될 건데. 어쨌거나 강진이는 알고 있어야지. 아니, 강진이가 제일 먼저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음은 속으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제 와 그런 얘길...... 어떻게 해요. 내가 입양된 곳, 그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날 아직까지 붙들고 있다는 거. 그래서 내 인생을 담보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를 어떻게 해.......’

***

정후의 차가 떠나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난 말 못 해요, 강진 씨한텐.”

우두커니 보고 있다가 지음이 돌아서서 집으로 올라가려는데 동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지음아.”

“.......”

지음이 동희를 쳐다봤다.

“퇴근해?”

“응. 왜?”

“어? 아니 그냥.......”

그냥 집으로 향하려던 지음이 멈춰서서 그를 보았다.

“또 전화 왔었어?”

“응? 아.......”

그래서 이렇게 집 앞에서 지음을 기다리다가 또 아무 말도 못 하고 쭈뼛대다가 돌아가려고?

지음이 동희에게 성큼성큼 다가섰다.

“내놔.”

“뭐, 뭘......?”

“휴대전화.

지음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동희에게 손을 내밀었다.

동희는 할 얘기가 있어서 와 놓고도 지음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잔뜩 겁을 먹어선 눈만 끔뻑거리고 있었다.

“휴대전화 내놓으라고.”

“.......”

지음은 뒤로 물러나는 동희의 손목을 꽉 붙들고 휴대전화를 뺏어 들었다.

통화 기록을 보니 민자에게서 전화가 미친 듯이 와 있었다.

정말 미친 거라고밖엔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자신도 아니고 자신의 친구인 동희에게 몇 수십, 수백 통을 할 수 있는 걸까. 거기에 폭언으로 메시지까지.

“하.......”

지음이 팔을 축 늘어뜨리자 동희가 조심스럽게 휴대전화를 가져갔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이번엔 정말...... 오실 거 같아서.”

“.......”

지음이 고갤 들어 동희를 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제가 왜 미안해하고 있는 건지.

지음은 입술을 꽉 깨물고 돌아서서 어디론가 향했다.

“지, 지음아? 어디가?”

잘못은 동희에게도 지음에게도 없었다. 그 여자와 그 여자 남편에게 있었지.

지음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하루 종일 회의에 시달리던 강진은 머리가 아팠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월급을 가불해달라고 요청했어요.」

강진은 그때 희라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저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자세한 사정까지 저는, 모르죠. 개인적인 사정인데.」

아니,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비웃고 있었다.

결혼하겠다고 직원들 앞에서 공표한 주제에 한지음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제 막 입사한 회사 상사에게 그런 요구를 할 정도로 개인적인 사정이 뭔지...... 너는 모른다.

“그랬단...... 말이지.”

“네? 대표님, 무슨......? 왜 그러십니까?”

강진의 혼잣말에 회의하던 직원들이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아, 죄송합니다.”

더는 회의는 의미가 없었다. 그의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머릿속은 온통 한지음 그 여자 생각으로 가득했다.

“아무래도 오늘 회의는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시간도 늦었으니 이만 마치고 다음에 일정을 잡으시죠.”

“아, 그럴까요? 그럼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강진이 서류를 들고 일어났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다음에 뵙죠.”

“네, 대표님.”

강진은 갸웃거리는 사람들을 뒤로한 채로 회의실을 뛰다시피 나왔다.

나오면서 휴대전화를 확인했지만, 지음에게서는 한 통의 전화도 메시지도 와 있지 않았다.

함께 집에 있고 회사에 출근하고, 그러면서 전화나 메시지까지 할 일이 뭐 있겠나 생각해 왔던 건 강진이었지만,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 걸까.

왜 꼭...... 마치 강진 혼자 지음에게 안달이라도 난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꼭...... 짝사랑하는 사람처럼.

강진이 얼른 지음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받지 않았다.

“대체 왜 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는 건데? 왜?”

한지음 진짜.......

강진은 넥타이를 신경질적으로 풀어 헤치고 집으로 달렸다.

제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는 한지음에게로.

희라에게 그런 요구를 할 정도로 다급한 일이 있으면서도 제게는 일언반구 내색조차 하지 않은 한지음에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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