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지음이 자리로 돌아가는 걸 본 미림이 얼른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희라와 지음이 각자 볼일을 보는 걸 살피던 미림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Rrr-
-어, 왜?
“엄마 엄마!”
-왜? 너는 회사에서 왜 자꾸 전화를 해?
“엄마도 하면서.......”
-안 그래도 너 선 자리 알아보는 중인데.
“선? 아, 무슨 선이야. 내가 몇 살인데 벌써 무슨 선을 봐.”
미림이 자신이 하려던 말도 잊고 짜증을 냈다.
-너도 이제 서른이야.
미림이 입술을 삐죽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엄마, 지금 내 선이 중요한 게 아니야. 완전 대박 뉴스야!”
-뭔데 이렇게 또 호들갑이야?
“지음이 걔, 가 오늘 회사에 와서 희라 언니한테 뭐라고 한 줄 알아?”
-......뭐라고 했는데?
“미리 월급을 달래! 가불을 해 달래, 글쎄.”
-뭐, 가......불?
“어어, 그렇다니까? 무슨 개인적인 사정으로 돈이 필요하다면서 그러더라. 참나, 여기가 무슨 동네 슈퍼인 줄 아나 봐. 그리고 강진 오빠가 돈이 얼마나 많은데. 왜 우리한테 부탁을 해?”
그러게.
대체 무슨 생각이면 회사에서 그랬을까, 겨우 계약직 직원 나부랭이가.
이란은 조잘거리는 미림의 말을 들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
누워서 마사지를 받으며 쉬고 있던 이란은 미림의 얘기를 듣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가불? 돈이 필요하대?”
-그렇대. 암튼 엄마, 대박이지? 정말 걔 들어오고 별일이 다 생겨. 암튼 나 지금 일하고 이따 집에 가서 봐.
“어, 그래.”
이란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돈? 돈이...... 필요하다고?”
회사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낙하산으로 입사한 것도 어이없는 일인데 대체 뭐 하는 애야.
이란의 얼굴이 쉴 새 없이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반복했다.
“무슨 돈이 필요할까? 강진이와 정말 만나는 사이라면.......”
스물넷의 어린 여자애, 가족도 없는 여자애가 돈이 필요하면 뭐 얼마나 필요할 것이며. 미림의 말처럼 강진이 돈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지. 뭐 만난다고 강진이가 돈을 주는 건 아닐 테니까.”
무슨 원조교제도 아니고 말이야.
이란이 방 안을 서성이며 혼잣말을 했다.
“아냐, 아냐. 다닌 지 한 달도 안 된 회사에 말할 정도면 급하다는 얘긴데, 그걸...... 강진이한테 부탁을 안 한다고?”
이란은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이거 분명...... 뭐가 있다. 뭐가 있어.”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는데 정 비서에게 전화가 왔다.
“어, 그래, 정 비서. 나야. 알아보라는 건 그 뒤로 어떻게 됐어?”
-양부모를 찾았습니다.
“양......부모? 보육원에 있다가 입양이 됐단 말이야?”
이란은 마사지하던 걸 집어던지고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거기 어디야? 내가 직접 가 봐야겠어. 정 비서, 집으로 와.”
***
잠시 후, 이란이 정 비서와 함께 온정리의 OO요양병원에 도착해 조용히 차를 세웠다. 같은 시각, 민자는 병원 앞에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재진이 있는 병원 앞에서 민자는 팔을 걷고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래서?”
저쪽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들리자 민자는 더 화가 올랐다.
그녀는 전형적인 강한 상대에게는 약하고, 약한 상대에게는 강한 스타일이었다.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지음에겐 소리 한번 못 지르면서 순한 동희는 매번 잡아대는 민자였다.
“아니 왜 지음이 전화번호를 안 알려주는 건데? 어?”
-사실...... 저도 잘 몰.......
“말이 돼? 맨날 붙어 다니면서. 내가 걔 엄마라고. 근데 왜 전화번호를....... 참, 기도 안 막혀서. 대체 어디 가서 처박혀 있기에.”
-.......
“응? 말해 봐, 어디! 어디 가서 저 혼자 잘 먹고 잘살겠다고 그러는 건지. 지 아버지는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민자가 소리를 질렀다가 울먹이거나 한숨을 쉬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란은 하는 양을 차 안에서 가만히 지켜보다가 정 비서에게 턱 짓을 했다.
“저 여자야?”
정 비서가 얼른 자료에 첨부되어 있는 사진과 민자를 비교했다.
“네, 맞는 거 같습니다.”
둘이 얘길 나누고 있는 사이 민자는 아직도 화를 참지 않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거기 어디냐니까? 얘는 왜 말을 안 해! 내가 당장 찾아갈 테니까 얼른 불어!”
한참 보고 있던 이란이 차에서 내렸다.
민자는 이란의 눈엔 허름한 옷차림, 한번 훑어만 보아도 빈티가 줄줄 흐르는 여자였다.
이란이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악을 써대는 그녀에게 다가섰다.
“어디야! 내가 너 가만, 아, 깜짝이야.......”
민자가 돌아서다가 제 바로 뒤에 누군가 서 있자,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이민자 씨?”
“그런데요? 잠깐...... 여보세요! 너, 내가 다시 전화한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알아놔. 알았어?”
민자가 동희에게 낮게 소리를 지르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고 이란을 올려다봤다.
“누구시죠?”
“한지음 씨 아시죠?”
“......지, 지음이요?”
민자가 뒤로 물러났다.
혹시 전화하는 소리를 들었나. 들었다 하더라도 그걸 물어볼 이유는 없지 않나.
“한지음 씨, 아시죠? 이민자 씨.”
“네. 근데...... 대체 누구세요?”
민자가 이란의 고급스러운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
똑똑.
“네.”
강진은 서류를 보며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희라가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왔다.
“대표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김 실장님. 마침 잘 왔습니다.”
“네?”
당황하는 희라를 보며 강진이 정리된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미노 화백 대신 전시회 들어올 작가들 명단입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진이 고갤 끄덕이고 이내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로 고개를 돌렸다.
희라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데 정후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JN 재단 대표와 오찬 후 미팅 있습니다.”
정후가 희라를 힐끔 보며 말했다.
“JN 미팅이 오늘이었던가.”
“네.”
정후에게 기다리라는 듯 손짓한 강진은 희라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김 실장님은 할 말이 뭡니까?”
“아, 그게.......”
희라는 정후 앞에서 얘길 해도 되나 생각하다가 차라리 잘 됐다고 마음을 바꿔먹었다. 지음을 뭉개버리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으니까.
“한지음 씨 말이에요.”
“......?”
신경 쓰지 않던 강진이 멈칫하고 희라를 올려다봤다.
“월급을 미리 지급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뭐? 왜?”
“자세한 사정까지 저는, 모르죠.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라고만 하더라고요.”
“.......”
자세한 사정을 희라가 알 리도,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차강진 당신은 알아야 하지 않느냐, 비웃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나 다를까 강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흥, 그러면 그렇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거 보면 분명 둘 사이 뭐가 있어. 그러지 않고서야 강진 씨가 그런 애한테 마음을 줄 리가 없어.’
“얘길 안 하니 알 수 없죠.”
“......처리해 줬습니까?”
“네. 재무팀에 얘기해서 일단 처리는 했습니다.”
“그래요....... 나가보세요.”
“네? 아, 네. 알겠습니다.”
희라가 나가는 걸 본 강진이 후, 짙게 한숨을 쉬었다.
문이 닫히고 나자 강진이 천천히 정후를 올려다봤다.
정후는 그 무서운 눈매에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방금 들은 말이 대체...... 무슨 상황이지?”
“아...... 그게.......”
정후는 지음에게서 들은 말이 있는지 그동안의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서 마구 넘겨 보았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건 저도 잘...... 모르겠....... 하지만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일자리 필요하다고 했을 때 정말 무료해서, 라고 했어?”
“아.......”
정후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강진은 희라에게 월급을 미리 달라는 얘기를 할 지경인데, 자신은 지음에게서 아무것도 들은 바가 없다는 게 미친 듯 화가 났다.
“대표님, 우선 오찬 시간에 늦어서 출발하셔야겠습니다.”
“.......”
“한지음 씨 사정은...... 제가 바로 알아보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정후가 시간이 없다는 듯 조급하게 말했다.
강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두르며 이를 악물었다.
“......다녀와서 보자.”
“......예.”
***
“한지음 씨 아시죠?”
“네....... 근데 누구......세요?”
이란이 손짓을 하자, 정 비서가 다가와 차 문을 열었다.
“할 얘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내가 누군진 가서 얘기하죠.”
“네?”
제 할 말만 하고 이란은 다시 차에 올랐다.
놀라서 눈만 크게 뜨고 있는 민자에게 정 비서가 손짓을 했다.
“타시죠.”
민자는 자리를 옮겨 이란과 함께 병원에서 조금 떨어진 카페로 향했다.
앞에 놓인 커피를 벌컥벌컥 마시던 민자가 이란의 말을 듣자마자 캑캑, 기침을 했다.
그녀의 입에서 커피 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란이 더럽다는 듯 인상을 확 쓰자 민자가 얼른 소매 춤으로 닦으며 멋쩍은 표정이 되었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너무 놀라서....... 그러니까, 지, 지음이 그게...... 아니, 아니지. 우리 지음이가 서울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났다는 거예요?”
“......같은 말 하게 하지 말죠.”
이란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정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정 비서가 얼른 손수건을 건넸다.
“그런데도 이년이...... 이달에 돈을 아직도 안 보냈어......? 내가 이걸 그냥.......”
민자가 웅얼거리며 혼잣말을 했다.
민자는 이란이 정 비서가 건넨 손수건으로 튄 커피 방울을 닦는 걸 보며 앞으로 다가앉았다.
“혹시...... 우리 지음이 사는 곳 아세요?”
“뭐요?”
“아니, 얘가...... 돈을, 병원비를 보내야 하는데 연락이 잘 안 돼서....... 아니, 됐고. 어디 살아요, 우리 지음이?”
당당한 민자의 태도에 이란은 짜증이 올라왔지만 써먹을 데가 있어서 찾아온 거니 참자, 생각했다.
“돈이 필요한가 봐요?”
그녀의 말에 민자가 정신이 든 듯 엉덩이를 쭉 빼고 뒤로 앉았다.
“아 뭐....... 돈이야 다...... 필요하죠. 이런 거 한 잔 사 먹을라 쳐도 다 돈인데.”
“큰돈. 벌어보고 싶지 않아요?”
이란이 다리를 꼬아 앉았다.
“......네? 돈......이요? 어떻게요?”
민자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엉덩이를 빼 앉았던 민자가 도로 앞으로 주섬주섬 나와 앉으며 물었다.
이란은 그녀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한숨을 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일 하나 해줘요.”
“무슨 일인데요?”
“뭐 딱히 그리 어렵지도 않아.”
이란은 민자가 누굴 만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천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