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6/94)

#35화.

창국이 세상 반가운 얼굴로 지음에게 다가왔다.

“지음 씨, 어제는 잘 들어갔어요?”

“네. 아 옷...... 고마웠어요. 옷은 빨아서 다음 진찰일에 돌려 드릴게요.”

“아녜요. 지음 씨 가지세요.”

“네? 다른 분 옷이라고 하셨잖아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창국을 보았다.

“아, 그건 괜찮아요. 그리고 그냥...... 지음 씨한테 잘 어울리는 거 같아서. 공교롭게 옷도 딱 맞고.”

“......아니에요. 돌려 드릴게요.”

“지음 씨가 불편하시면 그래요, 그럼. 참, 나도 지음 씨가 두고 간 원피스 가지고 있는데....... 다음에 오실 때 돌려 드릴게요.”

그녀가 뭐라 대답하려는데 누군가 창국을 불렀다.

“권창국 선생?”

“......?”

지음에게만 집중하던 창국이 뒤를 돌아봤다.

지음 역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만나도 그다지 반갑지 않을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연히도 이란이 병원에 들렀다가 나가는 길에 창국을 발견하고는 다가왔다. 민준의 친구인 그가 워낙 훤칠하게 잘났다는 걸 알고 있어서 인사나 해 둘 겸 아는 체를 했는데.

“안녕하세요.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어디...... 안 좋으세요?”

창국이 그녀를 보며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아니, 나 말고. 여기 아는 사람이 VIP실에...... 암튼 오랜만이야, 권 선생. 몇 년 됐나?”

“네, 민......준이 그리되고 나서 처음 뵙습니다.”

이란은 창국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곁에 있는 지음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치자, 지음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란은 그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코웃음을 치며 창국에게 말했다.

“근데 권 선생이 여기서 뭐 하나? 이 애랑 권 선생이 어떻게 알아? 알 만한 수준도 아닌데.”

“.......”

이란이 팔짱을 끼며 지음을 무시하는 게 느껴졌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 당황한 창국이 지음을 보았는데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창국은 얼굴이 굳은 채로 이란을 보았다.

“아...... 한지음 씨는, 제 환자이십니다.”

“흠, 그래?”

창국이 뭔가 더 말을 얹으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Rrr-

“......네, 권창국입니다. 아, 그래요? 알겠습니다. 지금 가죠.”

“왜, 권 선생 바빠요?”

“아....... 네, 급한 환자가 생겨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일 봐요.”

창국이 이란에게 고개를 숙이고 지음을 바라봤다.

“지음 씨, 그럼...... 다음에 봐요.”

“네, 안녕히 가세요.”

창국은 지음을 보고 있는 이란의 눈빛이 날카로워 살짝 걱정이 되긴 했지만, 사람 많은 병원 로비 한복판에서 무슨 일이 있겠나 싶어 발을 돌렸다.

창국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지음 역시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사람들이 더 많아지기 전에 진료를 보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한지음 씨?”

“.......”

인사도 채 맺지 못하고 지음이 이란을 마주 보았다.

창국이 있었을 때도 그녀를 무시하는 표정이던 이란은 그가 사라지고 나자, 지음을 아예 벌레 보듯 쳐다봤다.

“일부러 이 병원으로 온 건가? 권 선생은 어떻게 알고?”

“......그냥 의사와 환자.......”

“그리고 이번 주에 우리 집에 온다며? 아니, 온다면서요, 한지음 씨?”

“.......”

질문해놓고 대답을 듣지도 않을 거면서 왜 물어본담.

지음은 제가 입을 열어봤자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입술을 물었다.

이란은 그녀가 대답을 하든 말든 인상을 쓰고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말이 안 들려요?”

“들립니다.”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

이란이 지음을 한껏 노려보다가 또각또각 발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귓가에 입술을 붙일 듯 가까이 다가와서 목소릴 낮췄다. 주변에 들리지 않을 만큼 낮춘 서늘한 음성이 지음의 귀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네까짓 게...... 우리 강진이 짝으로 가당키나 할 것 같아?”

이란이 이내 한 발 물러나 의기양양한 얼굴로 지음을 보고 있었다.

지음은 그녀의 표정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무시를 하고 갈 건지,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하는지.

예전 같으면, 차강진을 만나러 서울로 오기 전의 지음이었다면 그저 무시를 했겠지만.......

“강진 씨도 그렇고 저도...... 서로가 필요하니 함께 있는 것뿐이에요.”

“뭐, 뭐라고?”

“가당할지 아닐지 저는 잘 모르겠.......”

이란은 지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노여움 가득한 얼굴로 그녈 노려보다가 손을 들어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아......!”

때릴 것까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지음은 이란의 손바닥에 맞아 바닥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머, 무슨 일이야?”

“병원에서 왜 저러는 거야?”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지나는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지음의 귀에도 들렸지만, 정작 지음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천천히 일어나서 옷을 툭툭 털었다.

지음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오히려 당황하고 놀란 건 이란이었다.

별로 타격을 입지 않은 듯한 지음의 얼굴에 이란은 더 열이 올랐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이번 주에 뵙겠습니다.”

“뭐, 뭐라고? 야!”

지음은 이란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어머머, 뭐 저딴 게 다 있어?”

때린 건 이란 자신이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람들이 다 있는 곳에서 따귀를 맞아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사라지는 지음을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한참 씩씩대던 이란이 정 비서에게 전화를 했다.

“나야! 계속 알아보라던 건 어떻게 됐어?”

이란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로비에서 소리를 질러댔다.

***

시간은 잘도 흘러 강진과 약속한 주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날도 지음은 레스토랑에서 동희와 밥을 먹고 있었다. 주로 먹는 쪽은 동희였지만.

그가 입 안에 고기를 잔뜩 넣고 말했다.

“아줌마...... 전화 왔었어.”

지음이 인상을 쓰자, 동희가 얼른 음식을 삼키고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나한테 연락 온 거.”

“.......”

지음은 동희의 휴대전화를 보았다. 보지 않아도 대충 무슨 말이 오갔을지 모르진 않았다.

지음이 그가 내민 휴대전화를 제대로 보지 않고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기만 하자, 갸웃거리던 동희가 들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액정을 켰다.

메시지를 주고받은 내용을 펼쳐 그녀의 앞에 도로 내놓았다.

“여기. 아줌마가 나한테 보내신 거.”

“.......”

살펴보니 메시지를 꽤나 여러 번 주고받았다. 주로 민자가 일방적으로 보낸 거지만.

[어디로 숨은 거야? 니가 숨겨줬니?]

[도망이라도 간 거야? 이 좁은 땅덩이에서 숨어 봤자지.]

[지 아버지를 그리 만들어 놓고 세상에...... 어쩜 그렇게 뻔뻔한지 모르겠네.]

매번 지음에게 했던 얘기였다.

그나마도 지음은 민자에게 돈을 쥐여주니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했지만, 동희는 힘이 없다는 걸 알고 매번 막 대하는 걸 지음도 알고 있었다.

아주...... 못된 사람들.

지음이 얼굴을 찡그렸다.

[거기 어디야, 글쎄! 내가 직접 만난다니까.]

[당장 돈 안 보내면 내가 어떻게든 찾아갈 테니 그렇게 알아.]

지음은 휴대전화를 동희에게 도로 내밀었다.

그가 지음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떻게 하지? 내가...... 내일 다녀올까?”

“네가 왜.”

지음이 동희를 보았다. 착하고 순하고, 남한테 피해 주는 일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하나뿐인 친구.

말은 하지 않고 있었어도 그 어린 시절부터 제 곁에 있어 준 동희에게 항상 고마워하고 있었다.

“내가.......”

자신이 가겠다고 말을 하려던 지음이 멈칫했다.

내일모레 주말엔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그녀의 마음도 모르고 동희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지음아, 어떻게 할까?”

“.......”

지음이 포크를 꽉 쥐었다.

***

아침 회의가 끝나고 나오는 희라를 보던 지음이 얼른 그녀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서 희라의 자리로 향했다.

“......뭐야?”

희라가 그녀를 올려다보자, 지음이 그녀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어? 내가 좋아하는 거네?”

“......네.”

희라가 코웃음을 치곤 얼른 커피 한 모금을 마시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아, 회의 끝나고 마시는 커피는 정말 꿀맛이야.”

“.......”

희라는 커피를 마시며 미소 짓다가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서 있는 지음을 올려다봤다.

“뭐야. 왜 안 가고 거기 서 있어? 뭐 할 말 있어?”

“네, 저...... 부탁이 있습니다, 실장님.”

“부탁? 뭔데?”

희라가 커피잔을 집어 올리며 그녀를 보았다.

“......월급을 미리 좀 주실 수 있을까요?”

“풉! 쿨룩쿨룩! 뭐, 캑캑, 뭐......라고?”

“.......”

“그러니까 미리 지급을...... 해 달라는 말이야?”

“네.”

희라가 커피잔을 탁 내려놓았다.

“왜?”

“사정이...... 있습니다.”

“무슨 사정?”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그것까지 말해야 하나요?”

“하, 개인적인 사정,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부탁하는 게 말이 돼? 여기가 무슨 동네 구멍가게인 줄 알아?”

희라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미림이 그 앞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게? 왜 돈이 그렇게 필요하실까? 무슨 돈?”

“.......”

지음이 별 대꾸 없이 희라의 앞에 가만히 서 있자, 희라가 그녀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알았어, 가 봐.”

어차피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는다면 강진에게 달려갈 게 뻔했으니.

‘그 꼴은 못 보지, 내가.’

“저.......”

귀찮은 듯 희라가 손짓을 했지만, 지음이 가지 않고 말끝을 흐렸다.

“또 뭐?”

“좀 빨리...... 부탁드려요.”

“뭐라, 뭐라......고?”

“급한 거라서요.”

희라와 미림이 동시에 지음을 보았다.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지음을 보던 희라가 인상을 썼다.

“알았으니까, 가 봐.”

“감사합니다.”

그녀가 몸을 돌려 가고 나자, 미림이 몸을 굽혔다.

“실장님, 무슨 돈이요? 무슨 돈이 필요한데 월급을 미리 달래요?”

“내가 어떻게 알아. 일단 나 대표님한테...... 아 참, 회의 중이시지. 정말 귀찮아 죽겠어.”

희라는 신경질적으로 키보드를 붙잡고 회계팀으로 결재를 올렸다.

미림은 그런 희라와 제 자리에 가 있는 지음을 번갈아 보다가 얼른 휴대전화를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엄마 엄마!”

-왜. 넌 왜 자꾸 회사에서 자꾸 전화야?

“대박 뉴스야!”

미림이 사무실에서 떨어진 휴게실로 향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