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94)

#33화.

지음과의 통화가 되지 않자, 강진은 휴대전화를 보조석에 던져두고 차를 몰았다.

출발하기 직전, 때마침 희라에게서 미노 화백의 주소가 메시지로 도착했기에, 강진은 바로 지음이 비를 맞으며 기다리고 있을지 모를 그의 집으로 향했다.

차들 사이로 시원하게 내달리던 그가 운전대를 쾅 쳤다.

“대체 왜 전화를.......”

휴대전화를 사 주면 뭐 하냐고. 그동안 휴대전화 필요 없었다고 하더니, 지금도 그 버릇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분명 내가 연락만 되면 된다고 했는데도 말이지.”

다시 한번 확실하게 얘길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강진은 머리가 지끈거려서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다행히 출발하고 얼마 안 있어 비는 그쳤다.

‘죽죽 잘도 퍼붓더니 이제 그쳤네.’

목적지에 다 와서 신호 대기에 걸려 멈춘 강진이 하늘을 보다가 창문을 내렸다.

무심코 시선을 둔 곳에 익숙하다 싶은 차가 보였다. 아는 사람이 있겠나 싶어 고갤 돌리려는데, 그 차에서 창국이 내렸다.

“.......”

어딜 가는 모양이라 생각하고 무심히 지나치려던 강진은 누군가의 인영을 보곤 멈칫했다.

차에서 서둘러 내린 창국이 비에 흠뻑 젖은 채 서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더니 그녀를 차에 태웠다. 사실 창국이 여자를 차에 태우든 업고 가든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상대가.......

“한......지음?”

한지음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한지음이 왜 창국의 차에 오르는 거지?

지금 창국은 병원에 있어야 할 시간이 아닌가?

설사 휴진일이라고 쳐도, 한지음이 여기 있다는 건 어떻게 안 거지?

저 여자는 왜 창국의 차에 아무런 거부감 없이 오르는 건가.

거기에다.......

강진은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었다.

“대체 저 꼴이....... 설마 오늘도 비를 다...... 맞은 거야?”

지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어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 있었다.

미노 화백 집으로 갔다더니. 결국 그 화백이라는 작자는 만나지도 못하고, 또 문전박대에 비까지 맞았다?

“그...... 얘기인 거야, 지금?”

알 수 없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꽉 잡았다.

그러는 사이 창국과 지음은 차에 올라 강진으로부터 멀어졌다. 어느새 창국의 차는 강진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강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평소 조급증이 이는 사람은 아닌데, 내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강진이 차 운전대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차를 돌려 지선 병원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뒤늦게 병원에 도착한 강진이, 그 앞에 차를 아무렇게나 세웠다. 이곳에 세우면 안 된다고 제지를 받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이미 창국의 차는 곱게 주차 장소에 주차되어 있었고, 주변에 사람이라곤 도통 없었다.

그에 강진이 병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정형외과로 향한 강진은 창국의 진료실을 찾을 때까지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어지간히 급해서는 뛰는 법이 없는 강진이었는데 스스로도 낯설만큼 서두르고 있었다.

“하아, 하.......”

숨이 차는 게 고작 병원 앞에서 진료실까지 뛰어서는 아닐 텐데.......

이 안에 지음이 창국과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강진이 후, 숨을 내쉬고 진료실 문을 잡았는데 간호사가 다가왔다.

“누구세요? 진료 보러 오신 거면 잠시 기다려 주세요.”

“.......”

강진은 그녀를 보면서도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당황한 간호사가 그를 말리려고 따라 들어가며 소리를 높였다.

“어머, 환자분 그렇게 막 열고 들어가시면 안 돼요!”

그러거나 말거나 강진은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밖에서부터 들려온 소란에 안에 있던 창국이 몸을 일으키고 강진과 김 간호사를 번갈아 보았다.

“강진아? 아...... 김 간호사님, 됐습니다. 아는 동생이에요. 고마워요.”

“네, 알겠습니다.”

간호사는 별꼴이라는 얼굴로 강진을 한 번 노려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창국이 강진에게 다가섰다.

“여긴 어떻게......? 무슨 일로 왔어, 강진아?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강진은 그의 말에 안 그래도 어두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연락하고 오면 뭐가 달라집니까?”

“......응?”

그의 적의를 느꼈는지 창국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강진은 창국에겐 시선도 두지 않고 창국의 진료실을 둘러보았다.

분명 강진이 바로 창국의 뒤를 따라온 거니 지음이 다른 곳으로 갔을 리가 없는데.......

창국이 뭐라 말을 얹으려는 순간 지음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

“강......진 씨?”

“당신이 왜...... 여기 있......!”

지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과 창국을 번갈아 보았다.

왜 차강진이 여기에 와 있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됐다.

처음엔 지음을 보고 인상을 쓰던 강진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보지 못할 걸 보기라도 한 것처럼.

지음이 정말로 창국의 진료실에 있었다는 것도 화가 났지만, 아침과 다른 옷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것도 은주의 옷을.......

강진은 말문이 막히고 속에서 불길이 훅훅 이는 것 같았다.

그와 지음이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자 창국이 당황해서 앞으로 나섰다. 그제야 강진이 창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 ......어디 한번 말해 봐.”

“아 그게...... 지나가는 길에 지음 씨가 비를 맞고 있더라고. 회사 간다기에 내가 바래다주려고만 했는데...... 너무 흠뻑 젖어서.......”

“.......”

말을 할수록 강진은 이글이글 불타는, 적대감이 담겨 있는 눈빛으로 창국을 보았고, 창국은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저....... 권 선생님, 오늘 고맙습니다.”

불편한 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는지 지음이 창국을 향해 인사를 건네는데, 강진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자.”

“아......!”

지음은 손목에 전해지는 강진의 손힘이 너무 세서 살짝 통증이 왔지만, 그의 얼굴이 너무 심각하게 굳어져 있어서 손을 뺄 수도 없었다.

그가 창국에게 고개만 까딱하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지음이 창국을 한 번 돌아봤지만 강진은 그와 인사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

진료실에 혼자 남아 있던 창국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걸 보면서도 지음과 강진을 잡을 수 없었다.

쾅. 강진의 얼굴만큼이나 문이 매섭게 닫히자 창국은 씁쓸한 마음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아, 지음 씨 옷......!”

창국은 지음이 들고 나와 내려놓았던, 다 젖은 원피스를 챙겨 들었다.

“옷도...... 못 가지고 갔네.”

어쩌나 고민하던 창국이 은주의 옷이 들어 있던 종이 가방을 꺼내 들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젖은 옷을 한 손에 들고 가방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아까...... 옷 입었을 때.......”

정말 놀랐다.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완전히...... 은주 같았으니까.

“한은주, 한......지음....... 설마.......”

창국이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젖은 옷을 든 팔을 툭 떨어뜨렸다.

***

지음은 강진에게 손목을 잡힌 채로 병원 밖까지 끌려 나갔다. 그가 차 앞에서 도착해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

지음은 손바닥이 저릿한 느낌이 들어 잡혀있던 손을 내려다봤다. 어찌나 세게 잡혔던지 손목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지만,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여 별말은 하지 않았다.

강진을 슬쩍 올려다봤지만 그 역시도 별다른 얘길 하지 않았다.

그가 지음에게 시선을 두지 않은 채로 차 문을 열었다.

“......타.”

“.......”

지음이 조심스럽게 차에 오르자 문이 닫혔다. 강진이 옆자리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하고 달리면서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지음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다.

어떻게 그 병원, 진료실에 온 거예요? 어떻게 날 찾았어요? 지금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창밖을 보았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한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한적한 공원이었다. 지대가 조금 높았는데 산책로를 잘 만들어 두었다.

강진을 따라 차 밖으로 나가자, 그가 지음을 등진 채로 한강을 보고 서 있었다.

지음이 강진에게 다가서는데 그가 돌아봤다.

화가 잔뜩 난 강진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사람이 왜 이렇게 미련하고 답답해?”

“.......”

“그 비를 다 맞고 미노 화백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아, 그가 화가 난 게 그것 때문이었나. 역시 전화를 잘 보고 받았어야 했는데.

병원까지 온 걸 보면, 설마 창국의 차에 올라 병원으로 간 걸 보기라도 한 걸까.

흥분한 강진과 달리 지음은 담담하게 말했다.

“......온다고 했.......”

“안 왔잖아! 왔어?”

“......그렇지만, 그건.......”

“하.......”

강진이 손을 허리에 올리고 한숨을 쉬었다.

“비가 오면 피하는 게 당연한 거야! 그 정도도 모르나?”

그가 놀랄 정도로 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없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이목을 끌었을 거다.

지음이 큰 눈을 깜빡거리며 강진을 빤히 보았다.

“근데...... 강진 씨는 왜 이렇게...... 화가 났어요?”

“뭐?”

“그냥....... 비는...... 우산이 없었고, 마땅히 피할 곳이 없었어요.”

“.......”

“자리를 피하면 혹시라도 미노 화백을 못 만날 것 같았어요. 못 만나면 이렇게 또 기다리고 따라다녀야 하니까. 그래서 그런 거예요.”

“.......”

지음이 또박또박, 덤덤하게 말을 잇자 강진은 당황한 듯 보였다.

“정말 그것 때문에 화가 났어요?”

“......뭐?”

“권 선생님은...... 우연히 만난 거예요. 그냥 회사로 가기엔 비를 너무 많이 맞았다고 수건 주고, 옷...... 이거 갈아입으래서 갈아입은 것뿐이에요.”

지음이 티셔츠를 손가락으로 들어 보이며 말했다.

“.......”

“왜인진 모르지만, 강진 씨가 화가 난 게...... 그것 때문인 거 같아서요. 내가...... 권 선생님 진찰실에 간 거.”

“무슨...... 말이야?”

“아닌 거면 됐어요....... 그냥 내 생각이에요.”

강진은 괜히 마음이 뜨끔해서 인상을 썼다.

괴롭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지음의 말이 맞았다. 그냥...... 창국이, 한은주를 아는 사람들이 한지음을 보는 게 싫었다.

무슨 마음인지 알 수가 없어서 복잡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는데, 온전히 마르지 않은 머리에서 물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

그가 지음에게 천천히 다가서자, 지음이 고개를 살며시 떨구고 말했다.

“다음부터는 조심...... 읍!”

강진이 그녀의 턱을 살며시 들어 올리고 말이 내뱉어지는 지음의 입술을 그대로 삼켰다.

부드럽고 촉촉한 지음의 입술, 달콤한 숨결이...... 강진을 미치게 했다.

강진은 지음의 마른 몸을 당겨 안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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