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94)

#32화.

지음은 점점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조급해졌다.

비는 그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아무리 기다려도 화백은 나타나지 않았다.

벌써 집 앞에서 기다린 지 몇 시간이 지났는데.......

도로부터 미노 화백의 집까지 난 길은 하나뿐이었다. 비에 젖어가면서도 지음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미노 화백의 차와 스쳐 지나치기라도 할까 봐.

사실 기다리는 건 상관없었다. 내일도 또 오면 되니까.

다만 또다시 흠뻑 젖은 채 강진을 만났다간 난리가 날 게 뻔했다.

그렇다고 이 상태로 화백을 만나도 문제였다. 이렇게 흠뻑 젖은 채로 어딜 가서 앉아 얘기하기도 그렇고 서서 얘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됐고.

그렇다고 그가 수건을 건네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할 것 같지도 않았다.

‘그랬다면 이렇게 몇 번이나 약속을 어기고 나 몰라라 하진 않았겠지.’

지음은 얼굴로 들이치는 빗물을 손으로 훔치고 주섬주섬 휴대전화를 꺼냈다.

다시 미노 화백에게 전화를 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 여보세요! 화백님!”

저쪽에서 짧게 한숨을 쉬는 게 들렸다. 지음이 얼른 휴대전화를 귀에 딱 붙이고 소릴 높였다.

“여보세요, 저.......”

-나야.

“......!”

나직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지음이 멈칫했다.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강진이었다.

‘제대로 확인......해야 했는데.’

지음은 얼른 목소릴 가다듬었다.

“강진...... 씨.”

-아직도 그 집 앞에 있나?

자신이 이렇게 미련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그가 알고 있었다.

하긴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이곳으로 오는 길에 정후도 만나지 않았는가. 모르는 게 이상할지도.

“......네.”

-하...... 우산은? 우산은 가져갔어? 지금 비 오던데.

아뇨, 그럴 리가요.

지음은 온정리에서 이곳으로 왔을 땐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라 아예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

‘지난번에 비 맞았을 때 샀어야 하는데...... 또 올 줄 알았나.’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서 있는데, 전화가 들어오는 알림이 들렸다. 기다리던 미노 화백이었다.

다급해진 지음이 강진에게 소리쳤다.

“가, 강진 씨! 이따 전화할게요!”

-뭐? 이봐! 한지음!

지음은 당황한 그의 부름을 모른 척하고 전활 끊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다렸던 미노 화백의 전화를 받았다.

“여, 여보세요! 작가님!”

-왜 이렇게 전화를 늦게 받아, 그래? 바쁜데.

“......죄송합니다. 어디세요?”

지음이 대문 앞에서 도로로 한 발 나서며 주윌 둘러봤다. 길 끝까지 시선을 두었지만, 차는커녕 개미 한 마리도 없었다.

-어, 한...... 한 누구랬지?

“한지음입니다.”

지음은 빗물이 눈에 들어가는 걸 막기 위해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래, 한지음 씨. 오늘은 그냥 돌아가야겠는데?

“......네?”

지음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잘못 들은 거겠지. 벌써 이 빗속에서 몇 시간을 서서 기다렸는데.......

-아니, 밥을 먹다 보니까 내가 술을 한잔했어. 알죠? 요새 음주 운전하면 큰일 나. 술을 좀 깨고 가야지.

“기다......리겠습니다.”

지음이 빗물이 죽죽 떨어지는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도로로 향하던 지음이 얼른 몸을 돌려 미노 화백의 집으로 향했다.

-뭐요? 이 아가씨가 정신이 나갔군. 아, 지금 이렇게 비가 오는데 무슨 소릴 하는 거요?

이렇게 비가 오는데, 분명 집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이제 와 정신이 나갔다니.

“작가님, 제가 아까.......”

-아아, 됐어. 그러지 마요. 알겠어요?

“여, 여보세요? 여보세요! 작가님!”

전화는 끊겨있었다.

말도 안 돼......!

지음은 얼른 다시 그에게 전화를 하려고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배터리가 나가 버렸다.

“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게 익숙지 않아 충전을 해야 하는 걸 잊은 탓이다.

“어쩌지.......”

지음은 허탈한 마음을 가라앉힐 새도 없이 이렇게 된 거 일단 비를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너무 많이 맞아서 한여름인데도 한기가 올라올 정도였다.

어차피 본인 말대로 여기서 계속 기다려도 올 것 같지 않았으니.......

한참을 걷다 보니 큰 도로까지 나가게 됐다.

참 얄궂기도 하지, 버스정류장을 코앞에 두고 그제야 비가 그쳤다.

지음은 버스정류장으로 가다가 제 몸을 훑어보고 걸음을 멈췄다.

“......이래서 버스 타기엔 좀.......”

물은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옷은 몸의 라인이 다 드러나도록 달라붙어 있었다.

택시라면 모를까 사람들 많은 버스로 이동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사람들 보는 시선 때문이 아니라 버스에도,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지 모르니까.

지음은 때마침 지나가는 택시에 시선을 두고 팔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다른 사람이 같이 차는 건 아니라지만 택시를 타는 것도 민폐가 되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이 꼴로 탔다간 시트가 엉망진창이 될 테니.

‘그렇다고 걸어가기엔 너무 먼데.......’

온정리에서였다면 신경 쓰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달려갔을 텐데, 이젠...... 그때의 한지음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지음은 우선 옷이 조금이라도 마를 때까지 걸어보기로 했다. 뚝뚝 흐르는 물이라도 마르면 택시든 버스든 타야겠다고.

***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해 지음이 도로를 따라 하염없이 걷는데 웬 차가 그녀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천천히 멈춰 섰다.

강진이나 정후의 차도 아닌데 잘못 본 걸까, 싶어서 멈칫하며 물러나는데 창문이 내려갔다.

“지음 씨? 지음 씨 맞죠?”

“.......”

창문에서 얼굴을 내민 사람은 창국이었다. 일전에도 한 번 탄 적 있는 차였지만 눈여겨보지 않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근데...... 무슨 일이에요?”

창국은 지음을 혼자 걷도록 놔두고 갈 것 같지 않았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구구절절 설명하는 건 지음이 잘하지 못하기도 하거니와, 싫어하는 행동이었기에 그냥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자 창국이 대뜸 차에서 내렸다.

“아...... 안 내려도 되는데.”

말리지도 못하고 어물거리는 사이 그가 지음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 차로 향했다.

“아니, 선생님.......”

“어서 타요. 어디를 가든 바래다줘야겠어요, 지금 지음 씨 상태가.”

“.......”

“괜찮아요? 비...... 다 맞은 거예요?”

“시트 젖는데.......”

“아 신경 쓰지 마요. 내가 강진이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 갈아버릴 돈은 있으니까요.”

창국이 버텨보려던 지음을 보며 씩 웃었다. 지음은 그의 미소처럼 환하게 웃을 순 없었다. 결국 지음은 창국의 차에 올랐다.

그가 뒷자리로 팔을 뻗더니 지음에게 수건을 건넸다.

“이거로 우선 물기라도 닦아내요.”

“......고맙습니다.”

지음은 수건을 받아 얼굴, 팔, 드러낸 다리를 타고 흐르는 물을 꾹꾹 닦았다. 그리고 계속 물이 떨어지고 있는 머리도.

“어디로 가던 길이었어요? 회사로 가요?”

“네.”

“대체 우산도 없이....... 설마 아까 온 비를 다 맞은 거예요? 엄청 내렸는데.”

“.......”

“아, 이거...... 너무 젖었는데요? 안 되겠어요. 지음 씨 회사 가기 전에 잠시 어디 좀 들렀다 가요.”

“네?”

창국이 지음의 대답을 듣지 않은 채 곧장 차를 돌렸다. 지음이 당황해서 그를 보았지만, 이내 사람 좋게 웃기만 했다.

“이러고 회사에 갈 거예요? 걱정 마요, 뭐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

지음은 말없이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렀다. 어느 정도 물기를 제거하고 나자 수건이 흠뻑 젖어버렸다.

그녀가 젖은 수건을 무릎에 올려놓는 걸 보고 창국이 수건을 얼른 들어 뒷자리로 던졌다.

“춥진 않아요?”

“네, 괜찮아요.”

“지음 씨는...... 괜찮다는 말이 습관인가 봐요.”

창국은 아직도 시뻘겋게 남아 있는 지음의 손등 상처를 힐끔 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지음이 손을 바꿔 잡았다. 다행히 그는 더는 묻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그의 차가 지선 병원 앞에 주차를 했다.

“여긴...... 병원이잖아요?”

“네, 병원입니다. 내 진료실로 가죠, 잠시.”

“아.......”

지음은 다 젖어서 제대로 넘어가지도 않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창국이 긴장을 풀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웃으며 농담을 했다.

“왜요? 내가 우리 집에라도 데려가려는 줄 알았어요?”

“......내리죠.”

지음은 방금까지 긴장하던 것도 잊었는지 무슨 그런 농담을 하냐는 얼굴로 차에서 먼저 내렸다.

창국이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 내렸다.

그의 진료실로 간 지음은 환자들이 앉는 의자에 앉아 손을 내밀었다.

재킷을 벗던 창국이 크게 웃었다.

“......왜요?”

“아...... 미안해요. 지음 씨가 너무...... 귀여워서.”

“.......”

이해 못 할 말에 지음이 얼굴을 찡그리자, 창국도 미소를 거두고 아까 그녀에게 주었던 것보다 더 큰 수건을 건넸다.

“손 치료하자고 온 거 아니에요. 아,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창국이 서랍 아래를 열어서 곱게 갠 티셔츠와 청바지를 꺼내 들고 지음에게 건넸다.

사무실 뒤쪽에 커튼으로 가려진 곳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입던 거라 좀 그렇겠지만, 일단은 이거로 갈아입어요. 그러다 정말 감기라도 걸리겠어요. 여름 감기 무서워요.”

“그쪽...... 옷은 안 맞을 텐데요.”

“네? 아, 하하하!”

지음의 거절에 창국이 크게 웃었다.

지음이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얼른 진정을 하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지음 씨랑 얘기하다 보면 자꾸 웃게 돼서....... 이거 제 옷 아니에요.”

“.......”

“그냥...... 예전에 친구 와이프가 두고 갔던 옷이었는데.......”

“......?”

창국의 얼굴에 애틋한 그리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 암튼, 지음 씨한테 맞을 거예요. 이거로 갈아입는 게 좋겠어요.”

지음은 잠시 그가 건넨 옷을 내려다보다가 받아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

강진은 회사 밖을 나서며 지음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화는 금방 끊겼고, 바로 다시 했을 땐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음만 나왔다

“대체 왜 전화를....... 한지음, 전화 받아.......”

강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고 입술을 꽉 다물었다.

이내 휴대전화를 신경질적으로 옆자리에 집어 던지고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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