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정후가 얼굴에 곤란하다는 빛을 띠었다.
하지만 지음도 물러날 수 없었다.
한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자꾸 호기심이 붙어 눈덩이처럼 커졌고, 이젠 도로 집어넣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뭔......데요?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거예요?”
지음의 말에도 머뭇거리던 정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너도 어차피 알아야 하니까.”
“.......”
“사고로 죽었어, 강진이 형.”
“......네?”
머리를 뭔가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지음은 묻고 싶은 말 한 무더기를 꿀꺽 삼키며 입을 떡 벌렸다.
......몰랐다, 전혀.
정후가 자료를 정리해서 주지 않았다면 강진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얘기이다 보니, 자신은 형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원래는 강진이가 가기로 한 출장이었는데.......”
“.......”
정후의 말이 이어졌다. 말을 하다보니 그날의 일이 마치 드라마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강진은 그날 아침 일찍부터 출장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똑똑.
「네.」
누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도 한번 고개를 들어 보아 줄 여유조차 없었다.
「바쁘세요?」
「.......」
들려오는 목소리에 강진은 멈칫 서류를 잡고 있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은주였다, 그녀의 인상과 잘 어울리는 연한 연두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강진의 얼굴이 굳는 걸 확인하고, 은주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그게...... 오늘 출장, 저도 가면...... 안 될까요?」
「무슨 말입니까?」
은주의 말에 강진이 인상을 썼다.
그녀가 당황하는 찰나 아직 닫히지 않은 사무실 문이 다시 한번 열리고 민준이 들어왔다. 그가 은주 옆에 서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
「그게...... 거기 은주가 예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곳이기도 하고. 너 오늘 바쁘잖아, 정후에게 들으니까 회의 두 건이나 미뤘다던데.」
「......그래서 형이 가겠다고?」
강진이 은주의 어깨를 감싸 쥔 민준의 손을 보다가 들고 있던 서류를 힘없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응. 내가 대신 갈게, 대표님.」
「대표님은 무슨...... 지금 형이 대표거든.」
「이제 곧 대표 될 거잖아.」
문화센터 대표는 민준이었지만, 그가 결혼과 그림에 좀 더 마음을 두고 싶다고 했고. 회사에서도 강진의 일 처리가 좀 더 정확하고 깔끔하다는 걸 알았기에 그가 차기 대표로 거론되고 있는 중이었다.
「암튼 내가 대신 다녀올게. 대표 자리에서 처리하는 마지막 임무로. 간 김에,」
민준이 웃으며 은주의 몸을 당겨 안았다.
「우리 와이프랑 데이트도 좀 하고. 그동안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했어.」
「.......」
강진은 화사하게 웃는 민준과 그 옆에서 기대하는 듯한 눈빛으로 서 있는 은주를 번갈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들은 죽어도 몰랐을...... 탄식.
「......그렇게 해.」
강진이 넥타이를 풀었다.
지음은 정후의 얘기가 이어지는 동안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듣고 있었다.
“그런......데요?”
정후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하필 그날...... 사고가 있었어.”
“.......”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그 자리에서 둘 다 목숨을 잃었어.”
“......!”
지음은 순간, 기억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과거 상처를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짓씹었다.
“휴...... 사고였어, 안타까운.”
“.......”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강진이가 여전히...... 그걸 제 탓이라고 여기고 있어서 걱정이야.”
이어지는 정후의 말에 지음은 조용히 손을 가슴에 댔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그게 강진의 탓이라니.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었다.
“안 된다고,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면 사고는 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사고......잖아요.”
지음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지. 그래도 강진이 입장에선 그게 잘 안 되나 봐.”
“.......”
“3년 전, 기억하지?”
정후가 슬프게 웃으며 지음을 슬쩍 돌아봤다. 지음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때야, 사고로 강진이 녀석 엉망이 됐던 때. ......그러다 강진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무서웠어. 사람들 만나지 말고 편히 휴가라도 다녀오라고 온정리에 데려간 거고, 그때 너한테 부탁했던 거야.”
“.......”
그랬구나.
그제야 지음은 차강진 같은 남자가, 저처럼 아무것도 없는 여자를 안은 게 이해가 됐다.
비 오던 그날, 그의 품에 안긴 날을 떠올리면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가장 큰 의문점은 ‘왜 차강진처럼 모든 걸 다 가진 남자가...... 한지음처럼 볼품없는 여자를 안았을까.’ 였는데.
사고로 그의 마음이, 머릿속이 엉망이 된 거였다면...... 그래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었던 거라면. 그런 거라면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이 나약해진 인간은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일도 하게 되는 법이니까.
정후와 강진에 대한 말을 나누는 사이 차가 천천히 지하철역 앞에 섰다.
“다 왔다. 가는 데까지 데려다주면 좋겠는데.......”
“아녜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그래, 그럼. 조심히 다녀와.”
***
정후를 보내고 지음은 지하철에 버스까지 타고, 한참을 지나서야 미노 화백의 집에 도착했다.
여전히 높게 올라간 담을 보던 지음이 그에게 전화를 했지만 당연히 한 번에 전화를 받을 리가 없었다.
지음은 짐작했다는 듯 집 앞에 서서 그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다리고 있던 번호로 연락이 왔다.
-전화했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저 지우 아트갤러리 전시기획팀 한지음입.......”
-하, 거참 귀찮게 하네.
“.......”
짜증 섞인 화백의 목소리에 지음이 눈썹을 찡그렸다.
어쨌거나 그녀의 목표는 그를 집 앞에서라도 한 번 만나서 일정 얘기를 꺼내는 거니까 참아야지.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거든.
“아, 네.”
-가만있자...... 내가 그럼 밥 먹고 움직일 테니 그때 봅시다. 어디서 보는 게 좋겠어요?
“작가님, 제가 지금 댁 앞입니다! 점심 맛있게 드시고 오시면.......”
-응. 알았네.
지음이 무어라 말을 더 붙이기도 전에 제 할 말만 한 상대의 전화는 끊겨 있었다.
“......알겠습니다. 기다릴게요.”
그녀가 허공에 흩뿌리듯 힘없이 읊조렸다.
시간을 보니 12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문득 이런 자신이 낯설었다. 사람 눈치 보는 법도 모르고, 관계 맺는 것도 싫고, 그런 건 평생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신도 역시 닥치면 다 하게 되는 건가 싶고.
지음은 지난번에 왔을 때 무료했던 걸 떠올리고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그녀가 가방에서 혼자 앉을 수 있는 돗자리를 꺼내 바닥에 두었다. 그리고 팸플릿을 꺼내 들었다. 미노 화백의 전시회 자료를 확인해 보았다.
‘그동안 여기서 전시를 많이 하긴 했구나. 이번에도 일정 조율을 내가 잘해야 할 텐데...... 잘할 수 있을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팠지만 점심이 다 지나도록 화백은 나타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온종일이라도 기다리겠다는 맘으로 다시 자세를 바꾸려는데 갑자기 툭,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
지음이 손바닥을 뒤집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엔 시커먼 구름이 몰려와 있었고, 툭툭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물이 제법 커졌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음이 얼른 일어나 책자를 가방 안에 넣었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입술을 꽉 물고 도로로 향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곳은 작은 가게 하나도 없는 곳이었고, 비를 피할 곳은 없었으니까.
가는 동안 젖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아, 왜 매번 여기만 오면 비가 이렇게 올까.”
올여름은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도로에 닿지도 못했는데 지음의 얇은 옷이 흠뻑 젖어버리고 말았다.
***
강진은 오전 내내 연달아 회의를 진행하다가 처음 고개를 들어 시간을 보았다.
어느새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났겠군.”
오늘은 지음과 함께 점심을 할까 생각했던 강진이 몸을 의자에 묻고 숨을 골랐다.
어젯밤, 비밀의 화원에서 함께한 이는 분명 지음이었다. 은주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그녀에게 키스를 했을까.
왜 한지음의 몸, 그 다디단 살갗에 입술을 붙이고 핥고 싶다는 생각을...... 왜.
그래놓고 지음이 종국에는 기절까지 하도록 몰아붙였다.
눈물을 흘려대며 가녀린 몸을 떨던 그녀가 정신을 잃기까지 했다.
미안했다, 미안했지만.......
그녀를 향한 욕망을 제대로 분출하지도 못했으면서 텅 빈 가슴속이 채워지는 듯한 묘한 감정이 들었다.
오랜만에 악몽도 없이 푹 잘 수 있었다.
복잡해진 머리를 하고 창밖을 보았는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강진이 일어나 지음이 일하고 있을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에서 한창 일하고 있을 지음이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라도 간 건가, 그녀의 자리를 보고 있는데 사무실 밖으로 나오던 희라가 강진을 향해 다가섰다.
보통 희라에게 볼일이 있을 땐 내선 전화를 해서 불렀지, 사무실로 직접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강진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왔을 때 그녀에게 너무 매몰차게 대한 걸 사과라도 하러 왔을까.
아니다, 사과까지야....... 그냥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고 한마디만 해준다면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을 것만 같았다.
그런 기대감으로 희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어머, 대표님!”
“한지음 씨 어디 갔습니까?”
그를 보고 환하게 웃던 희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찾아와 한다는 말이 겨우 그 여자 행방을 묻는 거라니.
“......외근 나갔습니다.”
“외근?”
“네. 그럼 안 되나요? 일을 하다 보면 외근도 보낼 수 있는 거지. 그리고 오늘 일은 걔가, 아니...... 지음 씨가 직접 가겠다고 한 거예요!”
평소처럼 지음을 가볍게 부르려던 희라는 매섭게 변하는 강진의 얼굴을 보며 얼른 말을 바꿨다.
“그러니까 어딜 갔다는 겁니까?”
“미노 화백 보러 간댔어요.”
“미노...... 화백? 아직도 해결이 안 됐습니까?”
“그러니까 해결하러.......”
“비가 이렇게 오는데?”
강진의 말에 희라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주먹을 얼마나 움켜쥐었는지 긴 손톱이 손을 찔러 통증이 일 정도였다.
“비 오기 전에 나갔어요! 됐나요?”
그녀가 화를 참지 못하고 식식거리며 악을 쓰는데 강진이 희라에게 다가서서 싸늘하게 말했다.
“미노 화백 주소, 메시지로 보내 놔.”
“......!”
강진은 희라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더는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회사 밖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금방 긴 다리로 멀어지는 강진을 보며 희라가 발을 굴렀다.
“아아악! 짜증 나,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