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94)

#30화.

아침에 눈을 뜨니 지음은 넓은 침대에 홀로 누워있었다.

“.......”

중학교 때 마지못해 참가했던 체육대회가 끝나고 나서 다음 날 일어난 것처럼 몸이 뻐근했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두들겨 맞은 것처럼 쑤셨다.

지음은 눈만 깜빡이면서 축 늘어진 사지를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으음.......”

저도 모르게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어제. 강진은 그녀가 기절할 만큼 몰아붙였다.

‘원래 그런 사람은 아니었는데.......’

지음은 어젯밤 강진의 폭주를 떠올리며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싫었냐고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라서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지음이 좀 전까지도 그가 누워있었을 옆자리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어쩐지 온기가 남아있는 듯도 하고. 그럴 리가 없었지만.

‘그가 언제 일어났을 줄 알고.’

지음은 머리를 한번 쓸어올리고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봐도 옷이 없어서 광란의 밤을 보내기 전에 마지막까지 걸쳤던 가운을 주워입고 방 밖으로 나갔다.

저도 모르게 눈으로 강진을 찾았는데, 때마침 강진과 눈빛이 마주치자 지음은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춰 섰다.

바지만 입은 강진이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하고 물을 마시다가 그녀를 돌아봤다. 그 바람에 맑은 물 한 방울이 그의 턱을 타고 목으로 흘러내렸다.

“.......”

일렁이는 목울대를 지나 섹시한 쇄골에 머물렀다가 가슴으로 떨어지며 사라진 물방울.

지음이 그 궤적을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는데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아, 네.”

강진이 물잔을 내려놓고 셔츠를 몸에 둘렀다.

“씻고 와. 같이 밥 먹고 출근하자.”

“......그럴게요.”

지음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보고 안도를 했다. 괜히 어제 일에 대해 말을 꺼냈더라면 쳐다보지도 못했을 텐데.

그가 기다린다는 생각에 얼른 씻고 나와서 옷을 입을 때까지 가만히 앉아있던 강진이 몸을 일으켰다.

“갈까?”

***

레스토랑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차에 올라 출발하면서 그가 말했다.

“앞으로 별일 없으면 출근은 같이하는 게 좋겠다. 당신 덕에 아침도 먹고.”

“사람......들이 보면 어쩌고요?”

그의 말에 지음이 깜짝 놀랐다.

기획팀에 얘기를 꺼낸 것도 갑작스러웠는데 다른 팀에서, 사람들이 보게 된다면 강진이 곤란하진 않을까 싶었다.

지음이 그에게 꼭 맞는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1년 후면 사라질 텐데.

하지만 강진은 그런 생각 따윈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두에게 알리든 알리지 않든 결혼할 사이야. 상관없어.”

그녀의 걱정을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정리하기라도 하듯 강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차피 회사에도 다 알려질 텐데. 왜?”

“......아니에요.”

지음이 도로 몸을 돌려 출근하느라 바쁜 차들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퇴근은...... 내가 늦어질 때가 있을 테니 매번 같이하긴 어렵겠다.”

“네.”

잠시 흐른 침묵을 강진이 도로 깨며 물었다.

“몸은.”

“......?”

“......괜찮아?”

갑자기 바뀐 대화의 흐름에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 알아차린 지음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네.......”

“다행......이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에 도착했다.

슈트를 쫙 빼입고 차에서 내리는 강진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그가 들어가자는 눈빛으로 지음을 쳐다보자, 얼른 그를 따라 걸었다.

넓은 강진의 등을 보던 지음이 멈칫 걸음을 멈췄다.

“왜?”

“혹시.......”

“?”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어디 사냐는 물음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 걸까. 지음이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녀를 돌아보던 강진이 눈살을 찌푸리고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툭, 풀었다.

“상처 남는다고 그러지 말라니까.”

“.......”

“우리 집 주소, 몰라?”

“알아요, 아는데.......”

“나랑 같이 사는 게 알려질까 봐 그래?”

“.......”

그 말의 의미는 달랐지만, 강진의 말에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매번 이 남자는 어떻게 저렇게 다 상관이 없다고 할까.

지음이 뭐라 말을 얹으려는데 정후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대표님. 지음 씨도 같이 오시네요?”

정후가 씩 웃으며 지음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

그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지음의 얼굴이 확 붉어지는데, 강진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앞으론 출근 같이하려고.”

“아......!”

정후의 놀라는 얼굴을 보면서도 강진은 태연했다.

“계약서는? 왔어?”

“아, 아뇨, 아직.”

“가지. 한지음 씨, 오늘도 수고해요.”

“......네, 대표......님.”

지음이 강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로 향했다.

강진은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몸을 돌렸다.

***

사무실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밀었다.

“아!”

“뭐야, 너?”

“......?”

돌아보니 미림이었다. 그것도 마치 성난 복어처럼 얼굴에 잔뜩 심술이 앉은.

“신입, 그것도 계약직인 주제에 어디 대표님이랑 같이 와? 엉?”

“.......”

아, 그거였구나.

오늘의 시비는 또 뭐가 될까, 생각하던 지음은 강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우리 집 주소, 몰라?」

그럴 리가.......

그는 별것도 아닌 얘길 묻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같이 사는 게 알려질까 봐 그래?」

네, 그래요.

지음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는 만큼 다른 사람 눈치를 본 적이 없었지만, 강진에게만큼은 피해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상관없어.」

그 말을 할 때의 강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지음이 당장에라도 나가서 소문을 낸다 해도 태연할 것 같았다.

지음이 아직도 저를 보며 식식 콧바람을 불며 성을 내고 있는 미림을 올려다봤다.

“뭐, 뭐야?”

“같이 살고, 같은 회사에 다니는데...... 그럼 따로 오나요?”

“......?”

지음의 표정과 말이 너무 차분해서였을까. 미림은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서야 알아들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마치 터져버릴 것처럼 시뻘겋게 변했다.

지음은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제 할 말만 하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림이 얼른 그녀를 따라 들어오며 소리를 질렀다

“뭐, 뭐라고? 야! 야, 한......지음!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녀가 지음의 어깨를 붙잡아 돌렸다.

이 집 여자들은 죄다 하나같이 사람 어깨를 못살게 구는지 모르겠다.

지음이 가볍게 한숨을 쉬고 그녀를 보는데, 미림의 뒤에서 희라가 나타났다.

“뭐야? 아침부터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니 그.......”

묻고 싶은 말은 쌓이고 쌓여 폭발할 것 같았지만, 미림은 차마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희라가 미림과 지음을 번갈아 봤다.

“미림 씨는 아침에 나랑 회의가 있고, 지음 씨는 오늘 미노 화백 만나러 간다고?”

“네. 집 앞에서 기다리다가...... 만나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바로 움직여. 괜히 또 놓치면 일정이고 뭐고 다 꼬일 거 아냐.”

“알겠습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지음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미림을 슬쩍 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미림이 지음의 등을 보며 식식거리자 희라도 나가는 지음을 돌아봤다.

“왜 그래?”

“......아녜요, 아무것도.”

***

사무실 밖으로 나온 지음은 얼른 화장실을 먼저 들렀다.

미림의 앞에선 온갖 센 척을 다 했지만, 무릎이 달달 떨리는 걸 보니 천하의 지음도 긴장을 한 모양이었다.

물론 강진이 상관없다고는 했어도.......

“......그런 폭탄 발언을 해 버리면 어떻게 해. 한지음, 진짜...... 요새 너답지 않다.”

지음이 거울을 보았다.

오늘 자신의 말을 들은 미림은 분명 모친인 차이란에게 말을 할 거고, 그럼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성급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지금 와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회사 건물을 막 나서는데 정후가 뒤따라오며 그녈 불렀다.

“한지음? 어디 가?”

“아, 전시회 일정 때문에 미노 화백 만나러 가요.”

“미노 화백...... 아직도 일정 픽이 안된 거야?”

정후의 말에 지음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그냥 기다리고 있으면 영영 날짜를 못 잡을 거 같아서요.”

“그래서 직접 가기로 했구나. 타, 내가 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오빤 어디로 가시는데요? 전 그냥 지하철 타고 가면 돼요.”

정후의 권유에 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지하철이라...... 여기 근처까지 오는 건 버스밖에 없잖아. 지하철은 한참 걷거나 갈아타야 하는데.......”

정후가 회사 앞에 세워 둔 차 문을 열고 손짓을 했다.

잠시 고민하던 지음이 차 앞으로 다가섰다.

“그럼 근처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주세요.”

“알았어. 얼른 타세요, 아가씨.”

그녀가 차에 오르자 정후가 씩 웃고 출발했다.

“지내기는 어때?”

“......좋아요.”

“그래, 뭐. 강진이가 알아서 잘 챙길 테니. 혹 불편하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나한테 물어봐.”

대수롭지 않게 고갤 끄덕이던 지음은 머릿속에 스쳐 가는 생각에 정후를 보았다.

처음부터 궁금했던,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었던 얘기.

“저.......”

서류에서 보았지만 공백으로 남겨져 있던 차강진의 형, 차민준에 대한 얘기.

“응?”

정후가 깜빡이를 켜며 지음을 슬쩍 보았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얘기해.”

“차민준.”

“......!”

그 이름에 정후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지음은 놓치지 않았다.

다른 곳은 빽빽하게 정보가 있었는데 하필 그곳만 공란인 게 이상하기도 했고. 이름만 적혀있는 강진의 가족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고.......

지음은 이왕 말을 꺼낸 김에 제대로 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강진 씨 형에 대한 건 자료가 없던데요.”

“아, 그거.......”

“지금은 어디 계세요? 강진 씨한테도 따로 들은 얘기가 없어서.”

지음의 물음에 정후가 곤란한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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