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9/94)

#28화.

강진이 집에서 출발하기 전, 정 비서의 전화를 받고 방으로 들어간 이란이 방문을 슬쩍 잠갔다.

“어, 정 비서. 나야, 얘기해.”

-네. 한지음. 말씀하신 여자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래? 잠시만.”

이란이 방문에 귀를 대고 밖에서 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혹시나 동구가 아직도 거실에 있는 건 아닐까, 다른 식구들이 듣는 건 아닐까 조심스러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그제야 도로 휴대전화를 귀에 붙였다.

“어, 얘기해.”

-네. 말씀하신 대로 한지음은 박정후 비서의 고향 동생입니다. 그런데 말이 좋아 고향 동생이지 그저 온정리에서 살았을 때 알고 지낸 것 말곤 별다른 접촉은 없었고...... 아, 한지음 씨가,

“한지음 씨는 얼어 죽을! 그냥 한지음이라고 해.”

이란의 짜증에 정 비서가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한지음이 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박 비서의 할아버님 집에 얹혀살고 있었답니다.

“집도 절도...... 없다? 계속해 봐.”

-그곳에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여기저기 심부름을 하며 돈을 벌었답니다. 박 비서 할아버님이 운영하시는 펜션 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동네에서 손이 필요할 때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답니다.

“왜? 지 몸뚱이 하나 빌어먹고 사는 거 아니었어? 돈독이라도 올랐나.”

-그것까진 아직.......

“또. 또 다른 건?”

-보육원 출신에 고등학교는 중퇴입니다.

“......별 거지 같은 얘길 하도 들었더니 이제 기도 안 찬다. 어이가 없어서.”

-편의점에서 알바나 하는 친구 하나 말고는 왕래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란은 제 예상보다 더 어마어마한 이야기에 갑자기 어지럼증이 일어 비틀거리다가 옆에 있는 의자를 꽉 붙잡았다. 혈압이 오르는지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어디 세상천지에 사람이 없어서 그딴 거지 같은 년......을.......”

-.......

“그래서...... 가족은? 가족은 어떻대?”

-아직 가족까지는....... 보육원에 알아봤지만 별 소득은 없었습니다. 더...... 알아볼까요?

“어. 싹싹 털어와. 어차피 그깟 계집애를 우리 지우 그룹 근처에 둘 순 없지. 먼지 한 톨 남기지 말고 다 알아 와. 부모며 형제며 모두.”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었지만 이란은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부들부들 떨었다. 의자 등받이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강진과 지음의 접점이라고는 겨우 정후의 고향 동생이라는 것뿐이고.

“정후가 그런 여자를 강진이에게 갖다 붙였을 리는 없는데.......”

강진이 따로 정후의 고향에 간 적이 있었나? 하지만 그런 말은 들은 적 없었다.

“분명 뭔가...... 있어.”

이란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입술을 꽉 물었다.

***

-어디야?

“.......”

산책로로 향하던 지음이 뒤를 돌아봤다.

밤의 묵직한 공기를 가르며 강진의 차가 미끄러지듯 들어오고 있었다.

-어디야?

그가 다시 한번 물었다.

“......비밀의 화원. 강진 씨 차 보여요.”

지음의 말에 강진이 차를 세우고 내렸다. 슈트를 차려입은 강진이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

가슴이 두근거려서 지음은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얼마 안 있어 강진이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밥은. 먹었어?”

“네, 레스토랑에서.”

“혼자?”

“......네.”

지음은 별 얘기도 아닌데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게 맘에 걸렸는지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쓸어올렸다.

“근데 여기서 뭐 해? 산책이라도 하는 건가?”

“그냥....... 날씨가 좋아서요.”

지음을 보다가 강진이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지음은 얼른 그의 옆에 나란히 서서 걸었다.

“다음 주쯤...... 다시 인사하러 가자. 시간 내볼게.”

“......네.”

그가 비밀의 화원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비가 왔을 때나 지금이나 그곳은 근사했다. 투명한 돔 천장 위로 까만 밤하늘과 드문드문 반짝이는 별이 쏟아져 내렸다.

지음은 그와 걷는 이 길, 이 시간이 좋아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하지만 그 긴 거리가 얼마나 짧게 느껴지는지, 순식간에 비밀의 화원 끝에 도착했다.

죽 이어지는 산책로를 보며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강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은 좀 어때?”

“네? 아앗......!”

지음은 발을 내디딘 채 그를 올려다보다가 삐져나온 돌을 잘못 밟고 삐끗했다.

그리고 그녀가 휘청하는 순간 강진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안아 들었다. 길고 단단한 팔이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꽉 안았다.

“......조심해야지.”

“.......”

강진은 그녈 안고 그윽하게 내려다봤다.

‘너무...... 가까워!’

강진의 긴 속눈썹, 우뚝한 콧날, 벌어지는 입술 사이에서 흘러내리는 숨결까지. 그 모든 게 한눈에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강진은 눈도 한번 깜빡이지 않고 지음을 보고 있었다. 지음은 그 시선에 아까보다 더 떨려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부족한 공기를 끌어모으기 위해 지음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그녀의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을 가볍게 뒤틀었지만, 그는 지음을 붙든 팔을 풀지 않았다.

강진은 숨을 몰아쉬는 지음을 보며 몸이 후끈 뜨거워졌다.

왜 매번...... 이곳에 오면 이리도 마음이 흔들리는 건가. 아니면 이 여자 때문인가.

알고 싶었다.

“강진...... 흡!”

생각지도 못한 키스였다.

지음의 꺾인 허리를 단단히 받쳐 들고 고갤 숙였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일에 당황했지만 강진은 눈을 감고 원래 하려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입술을 붙였다.

놓아달라는 듯 허리를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강진의 팔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결국 지음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강진의 와이셔츠를 붙들었다. 눈을 감고 그의 숨결을 느끼는데 얼마 안 있어 강진의 입술이 떨어지더니 멀어졌다.

“하아, 하.......”

아쉬움 가득 담긴 숨이 지음의 잇새로 새어 나왔다.

그가 지음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워줬다.

“.......”

강진이 지음의 허리에 감은 손을 풀고 품에 안듯 그녀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가 다가서니 지음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나던 그녀는 벽에 몸이 기댄 채 강진을 올려다봤다.

뒤로 더는 물러날 곳이 없어서 손바닥을 벽에 대고 지탱할 뿐이었다.

그녀의 당황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양팔로 지음을 가두듯 벽을 짚고 섰다.

“저기.......”

그녀의 말에 강진이 인상을 썼다. 호칭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

지음이 얼른 혀로 입술을 축이고 정정하듯 급히 말했다.

“강진...... 씨.”

“.......”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분이 풀리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는가 싶더니 강진의 입술이 지음의 입술로 다시금 내려앉았다.

벽을 짚었던 손으로 강진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벌리라는 듯 강진의 혀가 지음의 입술을 조심스레 두드렸다. 스르르 벌어지는 입 안으로 혀가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고른 치열을 쓸다가 지음의 혀를 찾아 얽기 시작했다. 휘감아 돌리고 세게 빨아당기자 쾌락과 함께 혀뿌리에 은근한 통증이 돌았다.

그녀의 입술을 잘근거리고, 빨고 잡아먹을 듯 점점 격해지는 키스에 점점 숨이 차올랐다.

지음의 고운 눈썹이 점점 일그러졌다. 부족한 공기 탓에 그녀의 가슴은 쉴새 없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읏......!”

그녀가 이내 숨을 편히 쉬기 위해 입술을 떼자, 강진이 그녀의 아랫입술을 꽉 물고 손을 움직였다.

그뿐인가. 강진이 허벅지로 지음의 다리를 벌리며 가까이 붙어섰다. 그럴수록 지음은 몸을 버둥거리며 움직였고, 강진의 다리 사이는 더욱 힘을 받기 시작했다.

강진은 그녀의 여린 허벅지 안쪽에 단단한 자신의 허벅지를 붙이고 슬슬 문질렀다.

“하아...... 나도 왜 이러는지.......”

“......?”

모르겠다.

지음의 신음 소리를 들으며 강진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꼭 우유 비누 같은 그녀의 살 내음이 났다.

냄새마저도 아이 같은데....... 왜 그녀만 보면 달려들 수작을 부리게 되는 걸까.

강진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오히려 어떤 여자를 데려다 놔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아서 할아버지가 걱정을 하지 않았는가.

강진이 고개를 들고 지음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당신을 보면...... 자꾸.......”

“.......”

키스의 여운으로 촉촉하게 젖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진을 올려다보는 여자에게, 무슨 말을 하겠는가. 자꾸 널 안고 싶다고? 내 아래 깔아 눕히고 울며 매달릴 때까지 유린하고 싶다고?

그런 마음이 드는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낯설어서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당황하기로는 지음이 더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았다.

불길이 훅 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다가 기습 같은 키스를 하고. 그러다 이내 멀어지는가 싶더니.

녹아내릴 듯한 키스를 나눈 후, 지금은 또 이렇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있는 사람처럼 입술을 달싹이고만 있지 않은가.

촉촉하고 부드러운...... 그의 입술을.

잠시 지음을 보고 있던 강진은 그녀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한발 앞서 걷는 그의 어깨가 참 넓고, 그의 등이 참 단단해 보였다. 그의 품에 안기면 포근할 텐데. 이미 여러 차례 강진의 품에 안기지 않았는가.

보기에 냉정하고 차갑기만 한 강진이지만 그가 얼마나 뜨거운 숨결을 품었는지, 그의 몸이 얼마나 뜨거워질 수 있는지....... 지음은 알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 강진의 손을 잡은 채 집으로 향하면서 지음은 그런 생각을 했다.

‘바보 같아, 한지음.’

어차피 그와는 1년의 계약 이후엔 다시 볼일도 없을 텐데.

지음이 그런 생각에 빠져 강진의 뒤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샌가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강진은 그녀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지음을 침대 위에 눕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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