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94)

#27화.

차에 오른 강진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지만, 희라는 얼른 차에 올라 방실방실 웃었다.

“오늘 저녁 초대 고마워, 강진아. 오랜만에 너랑 밥 먹으니 좋더라.”

“고마울 거 없어.”

“으응?”

“내가 한 거 아니니까. 너 있는 줄 알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고.”

강진은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내던지듯 말했고,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희라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차가 스르르 출발하자 희라가 얼른 얼굴에서 실망감을 지우고 몸을 돌렸다. 운전하는 강진을 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은 고모......님께서 초대하신 거라서. 나도 사실 모르고 왔어, 이런 자리인 줄.”

희라가 안달하듯 말을 잇는데도 강진은 표정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창에 팔꿈치를 댄 채 운전을 했다. 미동도 없는 그의 반응에 그녀의 얘기를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희라는 대답도 없는 그를 슬쩍 보다가 강진을 향해 몸을 완전히 돌렸다.

“강진아, 너 괜찮으면....... 아 좀 피곤하지? 그래도...... 내일 쉬는 날이니까.......”

드라이브라도 하자, 잠시 시간 내서 집에서 커피라도 마시자...... 말을 꺼내려는데 강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김희라.”

“어? 어, 어...... 강진아, 왜?”

회사에서처럼 김 실장이 아닌 제 이름이 불리자 희라가 잔뜩 긴장을 했다.

‘그게 뭐라고. 고백도 아니고 고작 이름 불러주는 걸 가지고.......’

그런데도 희라의 손엔 땀이 흥건했다.

“쓸데없는 기대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난 너랑 결혼할 생각 없어.”

“......!”

희라는 몸에 힘이 탁 풀렸다. 자리에 앉아 있는데도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쳤다. 귀에서는 이명까지 들리는 듯했다.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후랑 나, 너까지. 우리 그래도 친구였는데 네가 이런 식으로 나오면 친구 하기도 불편해.”

“가, 강진......아.”

“너랑은 친구, 직장동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알고 있잖아?”

강진이 희라의 말을 자르고 통보하듯 말했다.

희라가 떨리는 손을 감추듯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사, 사랑해서...... 결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다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냥......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는 거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란 비슷한 사람끼리 사는 거라고.”

“.......”

강진이 눈썹을 찡그린 채로 핸들을 부드럽게 돌렸다. 촤르르 거리를 가르는 소리가 명쾌하게 들렸다.

“하, 한지음...... 그 여자랑 정말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정말 미쳤어?”

희라가 울먹이는데 차가 섰다.

“내려. 다 왔다.”

“.......”

후두둑. 기어코 희라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이 쏟아졌다.

화장을 해서 울면 엉망이 될 텐데. 강진 앞에서 그런 모습 보여주는 건 죽기보다 싫은 희라였지만 막는다고 막아지는 슬픔이 아니었다. 아니, 좌절이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그는...... 태산 같았다. 절대 굽히지 않는 태산.

그녀가 내리지 않자 강진이 그제야 희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강진의 집에 초대됐으니 예쁘게 꾸미고도 싶었고, 그래서 정성을 들여 화장을 하고 옷을 골랐다.

강진은 그런 희라의 마음이 어렴풋이 느껴져서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더욱 단호하게 말하려 했다.

“희라야.”

“......흐윽!”

“낭비하지 마, 네 시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내가 너한테 가는 일은 없어.”

결국 희라는 강진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힘없이 내리는 희라를, 그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떠나는 차를 바라만 보던 희라가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

정후는 차 안에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와 차에 기대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그의 손엔 보랏빛의 작은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꽤 늦네. 연락을 하고 올 걸 그랬나.”

정후가 시계를 보며 중얼거리는데 희라의 집 앞에 익숙한 차가 섰다. 강진의 차였다.

거기서 내린 희라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강진의 차만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차는 매정하게 떠나버렸고, 희라는 떠나는 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정후가 꽃을 들고 있던 팔을 툭 떨어뜨렸다.

“후.......”

정후가 한숨을 쉬다가 얼른 표정을 풀고 천천히 다가섰다.

“이제 와?”

“......?”

희라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물을 훔치고 돌아봤다.

“......뭐야. 넌 여기 무슨 일이야?”

“그냥 뭐, 지나가다가.”

정후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희라에게 내밀었다.

“뭐야?”

“뭐긴, 꽃다발이잖아. 지나가다가 예뻐서 샀어.”

“.......”

희라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후가 그녀의 팔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니 여기 오는 길에 꽃집이 있던데, 이거 하나 딱 남았다는데 못 팔고 계시기에 가져왔어. 문 닫고 퇴근하셔야 하는데 그걸 못 하고 계시더라고. 뭐 겸사겸사 네 생각도 나고.”

“뭐래...... 웃기셔.”

희라가 못 이기는 척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꽃은 희라가 좋아하는 수국이었다. 꽃다발이 하나 남아서 못 팔고 있었다고 했지만, 꽃집 따위는 근처에 없었다.

거짓말도 수준급이야.

희라는 입술을 삐죽이는데, 정후가 나직하게 말했다.

“드라이브...... 할래?”

“훌쩍.......”

희라가 훌쩍이자, 정후가 그녀를 잡아끌어 차에 태웠다. 그녀는 그의 손에 이끌려 차에 올랐다.

차에 올라 천천히 출발하는데 희라가 괜히 볼멘소리를 했다.

“무슨...... 한밤에 드라이브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희라는 내심 기분이 풀리는지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매번 그랬다. 강진에게 상처를 받고 돌아서면 어느새 곁에 정후가 와 있었다.

서글프고 가슴 아프고 세상사 다 짜증이 나서 주저앉아 있으면, 그녀의 옆에 정후가 와 앉아 있었다.

항상 희라에게 손을 내밀고 지금처럼 그녀를 일으켜 준 것도 정후였고.

처음엔 창피한 맘도 있었지만, 내심 고마운 생각도 들었다. 정후는 한 번도 이유를 묻거나 상황을 설명해 달라는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희라는 정후에게는 무슨 모습이든 들켜도 괜찮았다.

그녀가 안정을 되찾자 정후의 마음도 금방 괜찮아졌다.

희라가 강진이에게 목매고 있는 거야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걸 알면서도 친구로, 조력자로 곁에 있었던 건 정후였다.

제겐 눈길 한번 안 주는 희라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좋아하는 마음을 접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정후 자신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씩, 정후도 사람이다 보니, 희라가 강진 때문에 휘청일 때면 정후 역시 휘청거렸다.

빌어먹게 마음도 찢어질 거 같고, 강진을 바라보는 희라의 모습도 보기 싫었다.

희라가 강진을 바라봐 온 시간만큼 정후도 그랬다.

“밥은 잘 먹었어?”

“......뭐?”

“지금 강진이네 집에 다녀온 거 아냐?”

“......뭐야, 너. 말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너에 대해...... 모르는 거 나 없어.”

“.......”

희라는 나직하게 말하고 입을 다무는 정후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

매몰찬 강진의 반응에 충격을 받은 희라를 정후가 위로하는 동안, 지음은 동희와 평화롭게 밥을 먹고 레스토랑에서 나왔다.

그녀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나오는 동희를 찬찬히 보고 있던 지음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제 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데 동희가 지음을 불러세웠다.

“어? 응. 저기, 지음아!”

“......?”

“......아줌마 말이야. 아줌마한테 또...... 전화 오면 뭐라고 해야 할까?”

“.......”

“너한테 연락도 안 되고....... 그러다 보니 마을에 가본 모양이더라고.”

지긋지긋하다. 벗어나고 싶었다. 아줌마로 불리든 새엄마로 불리든, 재진을 생각나게 하는 건 뭐든.

동희가 지음의 대답을 기다리며 멈칫거렸다. 그런 그를 가만히 보다가 지음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가.”

“어? 아...... 응, 그, 그래.”

뭐라고 해야 할지 지음 역시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듣고 싶은 말을 정해두고 말을 꺼내는 부류의 사람이라서.

그런 걸 시쳇말로 답정너라고 한다지, 아마.

동희가 큰일이라도 난 듯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걸 보면서도 지음은 가라는 말밖엔 해줄 수가 없었다.

그가 쭈뼛거리며 돌아가는 걸 보고 지음도 몸을 돌렸다.

미안했다. 지음이 연락하지 않는다면 얼마 안 있어 또 동희에게 전화를 하고, 그를 들볶을 거라는 걸 아니까.

그래서 빨리, 무슨 수를 내야 했다.

지음의 작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이제 갓 입사한 주제에....... 돈을 어떻게 구한담.’

복잡한 마음에 지음이 저 앞 산책로를 잠시 보다가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더라면 계약금이라도 미리 받아둘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1년 무사히 마치고 나면 지음이 받기로 한 돈, 그 어마어마한 10억 중에서 다만 얼마라도...... 받아둘걸.

정 안 되면 그녀가 시간을 내서 온정리에 한번 내려가 봐야 한다.

가서 보기 싫은 민자를 만나고, 듣기 싫은 그녀의 목소릴 들으며 기다려달라고 사정이라도 해야.......

“휴.......”

그런 생각에 한숨을 쉬는데 아파트 정문 쪽에서 까만색 세단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아마도 강진의 차.......

지음이 멈칫하다가 그냥 그대로 산책로를 걷기로 했다.

그리고 ‘비밀의 화원’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 그와 키스를 나누었던 곳으로 들어가려는데.......

Rrrr-

“......네.”

-어디야?

몹시도 다급해 보이는 강진의 목소리에 지음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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