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94)

#26화.

“할아버지가 같이 저녁 먹자는데...... 당신도 갈래?”

강진의 표정을 봐서는 분명 지음까지 초대한 자리는 아닐 것이다. 집엔 할아버지만 계신 게 아니라 고모 차이란도 있을 게 뻔했다.

지음은 자신이 그의 할아버지였다면 주말을 앞둔 이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부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그 초대 자리에 지음의 자리는 없을 테니까.

“아, 전.......”

뭐라고 거절을 해야 할까.

지음이 고민하는데 강진의 시선이 그녀의 다친 손에 닿았다.

“......아니다. 아무래도 다음에 정식으로 초대받는 게 좋겠어.”

“.......”

역시나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

지음은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강진의 마음이 불편하지 않도록.

“밥은.......”

“밥은! 내가 알아서 먹을게요.”

“.......”

지음이 얼른 말을 이어붙였다.

“커뮤 동에 가도 되니까요. 걱정 말아요.”

“......그래, 그럼.”

강진이 재킷을 도로 챙겨 입고 아쉬운 듯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겨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

“무슨 일 있으면.......”

그가 밖으로 나가려다 문을 잡고 머뭇거리며 돌아봤다.

이란이 강진과 함께 있으니 그럴 일 없겠지만...... 그래도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게 내심 마음에 걸렸다.

“?”

“나한테 연락하고.”

“아, 네.”

지음이 고개를 끄덕이고 강진을 보냈다.

그가 떠나고 난 후, 텅 빈 집을 둘러보는데 집이 너무 넓어만 보였다.

“혼자 있기엔 너무 넓다.......”

거실에 서서 다시 열릴 생각이 없는 현관문을 보고 있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어, 나.”

지음은 상대가 전화를 받자 밖으로 나갔다.

“너 지금 근무 시간 아니지?”

-응, 끝났어.

“레스토랑으로 올래?”

지음이 이미 강진의 차가 빠져나갔을 아파트 정문을 잠시 보고 있는데 저쪽에서 동희가 손을 흔들며 달려왔다.

“지음아! 하아, 하.......”

“뭐 하러 뛰어와?”

“너 기다릴까 봐. 어쩐 일이야? 너 요새 회사 때문에 바쁘잖아.”

지음은 별다른 대꾸 없이 커뮤니티 동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동희가 얼른 그녀를 따라 걸었다.

“난 요새 편의점 말고 다른 곳 알아봐야 하나 고민이야.”

“왜?”

“그냥 자꾸...... 사장님한테 혼도 나고.......”

“니가 계산도 틀리고, 정리도 못 하니까 그렇지.”

지음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동희가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너 온정리에서도 그랬잖아.”

레스토랑 안엔 몇 사람이 보였다. 지음은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자리로 가 앉았다.

동희가 얼른 그녀의 앞에 앉았다.

“어쩌지?”

“뭘 어째. 그냥 다녀. ......다른 일자리 구해질 때까지.”

“......알았어.”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잔뜩 시켜서 맛있게도 먹는 동희를 보며 지음도 음식을 먹었다.

“천천히 먹어.”

“응. 여기 밥 너무 맛있더라. 아 맞다, 지음아.”

“......?”

동희가 입 안에 밥을 잔뜩 밀어 넣고 우물거리며 말했다.

“밥 다 먹고 말해라.”

“응? 어어.”

지음의 말에 동희가 입 안에 있는 음식을 꿀꺽 삼켰다. 음식물이 크게 넘어갔는지 인상을 쓰고 가슴을 치며 말했다.

“으, 아프다. ......참, 아줌마 전화 왔었어.”

“.......”

그의 말에 지음이 그나마 깨작이던 포크를 툭 떨어뜨렸다. 하지만 보지 못했는지 동희는 눈치도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아저씨 상태가...... 더 나빠지셨나 봐. 사실 뭐, 거의 식물인간인데 더 나빠지고 말고가 있나.......”

“.......”

지음이 손을 무릎에 올려놓았는데 작은 두 손이 달달 떨렸다.

태연하자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이제 자신도 다 컸고 어릴 때처럼 무방비로 당하지도 않겠지만. 재진의 얘길 하거나 들을 때마다 심장이 마구 뛰었다.

“암튼 그래서...... 돈을 좀 더 보내달라던데.”

양심도 없다.

지음은 기도 안 찼지만 침을 꿀꺽 삼켰다.

“......알았어.”

“너 전화번호는 안 알려줬어. 아줌마는 너한테 휴대전화 있는 줄 아직 모르니까.”

“응.”

“나는 진짜......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다. 그렇게 인상 좋은 아저씨가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때 그리 쪼끄만 한 너를 죽도록 팼다는 게....... 이해가 안 가.”

“.......”

지음이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동희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과거 재진과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날, 눈이 펑펑 내리는 그날 때문에 지음이 지금까지도 묶여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와장창!

밖에선 눈이 내리고 있는데 지음의 방 안에선 온갖 살림살이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음은 행여 집기에 맞을까 싶어 숨을 죽이고 웅크리고 있었지만, 재진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너 이리 안 와? 이년이 너도 날 무시하는 거야? 응?」

「......아!」

순식간에 지음의 앞으로 다가온 재진이 그녀의 머리칼을 잡고 흔들었다. 머리 뿌리까지 뽑힐 만큼 아파서 눈물이 쏙 빠질 것 같았다. 정신없이 그의 손에 몸이 흔들리는데, 재진이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읍!」

지음의 얼굴을 어찌나 세차게 갈겼는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날아가듯 쓰러진 지음이 끙끙 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재진의 폭력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년이. 네가 그렇게 아픈 척하면 내가 봐줄 줄 알아? 앙?」

「윽......! 으으.......」

재진은 쓰러져 있는 지음의 머리카락을 도로 꽉 움켜잡고 양 뺨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입술도 터지고 양 볼이 퉁퉁 부은데다 눈의 핏줄이 터졌는지 앞이 보이지도 않았다.

지음은 어떻게든 맞지 않으려고, 살아보려고 손을 뻗어 그를 막으려 했지만.......

「이년이 이게! 반항을 해? 네까짓 게 반항한다고 내가 무서워할 줄 알아?」

재진의 손은 더욱 거세질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음의 몸이 축축 늘어져 갔다.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데 한 대만 더 맞으면, 그가 손에 쥔 저 몽둥이로 한 대만 더 맞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아서, 작은 손을 뻗어 잡히는 걸 아무거나 잡고 재진에게 휘둘렀다. 눈을 뜨지도 못하고 얼굴은 피떡이 된 상태로 살기 위해서.......

그리고 재진이 쓰러지는 걸 보며 지음 역시 정신을 잃었다.

지음은 다행히 며칠 후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재진은 그날 이후 일어나지 못했다.

“암튼 세상 사람들 얼굴만 보고 믿지 마. 착해 보여도 다...... 속은 안 좋을 수 있어.”

동희의 말에 지음은 간신히 과거의 끈을 놓고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너나 잘해. 누가 누구한테.......”

“히, 하긴. 근데 너...... 돈 있어?”

“......응?”

“돈 말이야....... 아줌마 매일 전화할 거 같던데.”

“.......”

“돈은 어떻게 할 거야? 걱정이다. 나 아직 편의점 월급 나오려면 멀었는데.......”

“그걸 네가 왜 걱정해? 내 일이야. 그리고 나도 일 다녀.”

“일? 지음이 너 일 다녀? 어디?”

“.......”

처음 듣는 소리에 동희가 계속 물었지만 지음은 입을 다물었다.

돈이 당장 필요한데 어떻게 해야 하나.......

결국 지음은 내려놓았던 포크를 다시 들지 못했다.

***

지음을 뒤로하고, 본가 식탁에 앉아 있는 강진의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차이란이 할아버지 핑계를 대며 자신만 초대를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그냥 다른 때와 다름없는 식사 초대라고 생각한 게 실수였다.

강진은 지음과 함께 밥이나 먹으러 갈 걸 괜히 시간 낭비했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할아버지 동구와 이란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렇겠지. 할아버지는 강진을 본다는 게 그저 좋으셨을 거고, 이란은.......

강진은 제 앞에서 수줍게 눈을 내리깔고 웃고 있는 희라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제 고모, 이란이 데려왔겠지. 자신과 할아버지 앞에 앉혀놓으려고.

“그래. 우리 지우 쪽에서 일을 한다고?”

할아버지가 희라를 보며 묻자, 희라가 방긋 웃으면서 차분히 대답했다.

“네. 제가 로아 그룹 딸이긴 하지만 경영엔 관심이 없어서요. 전 지금 하고 있는 문화재단 일이 좋습니다.”

“그래?”

희라의 말에 이란이 얼른 끼어들었다.

“아버지,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희라 얘가, 유학까지 다녀온 인재예요. 뭐 그렇다고 강진이나 정후 빽이나 인.맥.으로가 아니라 이력서도 딱 내고 당당하게 입사했다니까요?”

“.......”

이란이 인맥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어가며 강진을 보았다.

지음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기에 강진은 그녀가 하는 꼴이 우스웠지만 가만있었다.

그렇게 누구 좋으라고 초대한 저녁 식사인지 모를 시간이 지나고 일어서는데, 희라가 강진의 팔을 잡았다.

“강진 씨.”

“.......”

강진 씨......?

강진은 희라가 할아버지가 보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도 안 차서 피식 웃음이 터졌다.

그런 그의 마음은 모르고 희라가 눈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나 집에 좀 데려다줄래요? 차를 안 가져와서.”

“응, 그래라. 강진이가 데려다줘.”

할아버지의 말에 강진이 말을 얹을 새도 없었다.

“할아버님, 저 그럼 다음에도 또 불러주세요.”

“......그래라. 또 보자.”

희라가 할아버지에게 애교를 부리며 인사를 하는 동안, 이란은 정 비서에게 오는 전화를 받느라 안으로 들어갔다.

강진만 굳은 얼굴로 희라를 보고 있다가 밖으로 나갔다.

이런 자리, 강진이 제일 싫어하는 거였다.

당사자를 빼놓고 다른 사람들이 으ㅤㅆㅑㅤ으ㅤㅆㅑㅤ 몰아가서 결론까지 내는 거. 당사자는 옆에 딱 세워놓고 허수아비 만드는 거.

대문을 나선 강진이 굳은 얼굴로 차에 오르자, 희라도 얼른 그의 차를 따라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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