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94)

#25화.

동기는 사무실에서 김 비서와 숙덕거리고 있었다.

김 비서가 내민 서류를 보며 동기가 목소리를 낮췄다.

“보자...... 문화재단 장부는?”

“여기 있습니다.”

김 비서가 동기의 앞에 두툼한 장부를 건넸다. 그가 장부를 넘겨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바로 이중장부란 말이지? 문화재단의 이중장부! 크.”

“......네.”

김 비서는 동기의 목소리가 혹시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지만, 동기는 별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저 일이 제 뜻대로 되어가는 게 기분이 좋았는지 연신 손뼉을 쳤다.

“잘 정리해 둬. 어차피 금고가 이곳 사무실에 있는 건 김 실장이랑 나밖에 모르니까. 이중장부, 캬- 내가 왜 요걸 진작 만들 생각을 못 했을까.”

그는 장부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룹을 차지하길 바라는 제 엄마 이란과 달리, 동기는 지우 문화재단을 꿀꺽 삼킬 욕심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문화재단 경영, 지우 그룹의 경영을 욕심내는 건 아니었다. 그가 문화재단을 손에 넣으려는 이유는 지우 그룹 내에서도 노른자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간에도 경영 힘들어서 머리 싸맬 일도 그리 많지 않았는데 돈은 꽤 됐다. 이렇게 이중장부로 뒤로 돌려 긁어모을 수 있는 방법도 있고.

“히히.”

그런 생각을 하기만 해도 좋았는지 동기가 히죽거렸다. 그러다 김 비서를 보며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공금 그것도 자알 돌리고 있는 거지?”

“네, 물론입니다. 티 나지 않게 천천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좋아. 참, 주식은?”

“아, 그것도 포착되지 않을 정도로 조금씩 모으고 있습니다.”

동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국장님, 우리 내일....... 어머, 김 비서님이 계셨네요?”

유린이 들어오며 소리를 지르다가 김 비서를 보고 방긋 웃었다. 그녀가 김 비서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고는 동기에게 향했다.

의자에 한껏 기대앉아 있던 동기가 몸을 일으켰다.

“야, 인기척도 없이, 그냥 막 들어오면 어떻게 해?”

“우리가 무슨 그럴 사이야? 오빠, 우리 내일 주말인데 데이트 뭐 할까?”

유린의 철없는 말에 동기가 혀를 쯧쯧 차다가 김 비서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내보냈다.

유린은 한 발 떨어져 동기가 하는 양을 보고 있다가 김 실장을 배웅하는 그를 보고는 책상 위로 폴짝 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긴 손가락으로 책상 위에 있는 서류와 장부 따위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문화재단 장......부? 이건 주식 보유...... 목록인데?’

곱게 그린 눈썹이 살짝 휘었다.

파일철을 열어서 살펴보려는 찰나, 동기가 탁 소리가 나게 장부를 덮었다.

“뭐, 뭘 보는 거야?”

“응? 오빠, 뭔데? 뭔데요?”

“......알 거 없어.”

동기는 얼른 책상 위에 있는 서류와 장부들을 서랍 안에 밀어 넣고 열쇠로 잠가두었다.

“치. 뭐기에 그렇게 숨겨놔요?”

“알 거 없대도? 나가자.”

동기가 돌아서서 벗어던져 둔 재킷을 찾았다.

유린은 그가 옷을 가지러 잠시 멀어진 사이 엉덩이로 꽉 누른 서류를 슬쩍 보았다. 그가 옷을 입는 동안 휴대전화를 꺼내 조용히 서류를 찍기 시작했다.

“어디 갈까?”

“......!”

사진을 찍고 있는데 동기가 돌아보는 바람에 당황한 유린이 휴대전화를 떨어뜨렸다.

“......뭐야? 뭐 해?”

“어? 아니, 문......자가 와 가지고.......”

“참 나.”

동기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러려니 하며 옷을 입었다.

유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기가 재킷을 입는 모습을 보며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던 그 날의 기억을 꺼내 보았다.

「읏......!」

그날도 유린은 술집에서 2차를 나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맞고 있었다. 얼굴도 터지고 눈도 찢어져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곳을 지나가던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유린은 그 차가워 보이는 남자의 손을 잡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는 유린이 치료를 받고 나올 때까지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던 그는 그녀가 나오는 걸 보다가 재킷을 벗어 옷을 덮어주었다.

그녀의 손을 뒤집어 차비를 쥐여준 남자가 돌아서서 나가려 하자, 유린이 얼른 그의 옷을 붙들었다.

「저기! 고맙......습니다.」

남자는 별말 하지 않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 얼마 뒤, 그는 유린의 빚을 갚고 그녀를 술집에서 빼내 주기까지 했다.

남자는 그 후로 유린을 찾지도, 만나주지도 않았지만 그때부터였다. 유린이 그에게 언젠가 꼭 보답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어렵게 남자를 만난 유린은 눈빛을 반짝이며 그가 내민 휴대전화를 보았다.

「......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뇨. 제가 원하는 일이에요, 진짜. 여기에 뭐든...... 찍어오면 된다는 거죠?」

「.......」

어쩐지 남자는 탐탁지 않아 하는 듯도 했다. 혹시나 맘이 바뀔까 유린이 휴대전화를 잡았지만 남자는 휴대전화를 내어주지 않고 힘을 주었다.

「주세요.」

「......유린 씨.」

「주세요, 제발. 제가...... 원하는 거예요.」

「.......」

유린이 옛 생각에 빠져있는 동안 옷을 입은 동기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정신을 차린 유린은 얼른 휴대전화를 주워 가방 안에 넣었다.

“어? 이게 왜 빠져있지. 너, 이거 봤어? 안...... 봤지?”

“그거? 뭔데? 그런 거 난 재미없어, 오빠.”

“그래. 나가자.”

동기는 미심쩍어하는 듯하면서도 서류를 얼른 서랍 안에 넣고 잠갔다.

***

별 소득도 없이 집으로 돌아간 이란은 화병이 나서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아니, 소득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괜히 강진에게 한소릴 들은 게 내내 짜증이 솟고 화가 나는 참이었다.

그래서 이란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강진과 그 거지 같은 여자애를 갈라놓는 일이라면 뭐든.

“아버지.”

“......너는 왜 아까부터 나를 그렇게 졸졸 따라다녀?”

이란이 늦게 어딜 다녀온 후로 동구를 쫓아다니며 말을 걸자, 동구가 귀찮은 듯 그녈 돌아봤다.

“왜, 뭐? 할 말 있어?”

“아버지, 그게...... 내일 주말인데 오늘 우리 강진이 오라고 해서 밥 먹는 거 어때요?”

“강진이?”

동구가 소파에 앉자, 이란이 그 옆에 따라 앉으며 재잘거렸다.

“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으면 좋겠는데. 아, 그...... 희라라고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죠? 희라도 지우 재단 바쁘고 급할 때 도와주기도 했는데 밥 한번 대접을 못 했거든요. 강진이 직원이기도 하니까 이참에 둘이 같이 불러서 같이 식사나 한 끼 했으면 하는데.”

“으음.......”

그가 별로 반대할 것 같지 않아 보이자, 이란이 웃으며 말을 얹었다.

“어때요? 아버지도 강진이 보고 싶으실 거고, 희라도...... 궁금하긴 하시잖아요.”

“지금 부르기엔 너무 늦지 않았어? 내일이 주말인데, 젊은 사람들이 약속도 있을 거고, 그렇지 않겠어? 비도 오는데 여기까지 오라고 하기엔 또.......”

동구의 말에 이란은 쾌재를 불렀다.

이 정도 얘기가 나왔다는 건 다 넘어왔다는 얘기가 된다.

“에이, 뭐 대단한 거 차리나요. 그냥 다 같이 밥 한 끼 먹는 건데요, 뭐. 그리고 아까 오면서 봤는데 비 다 그쳤더라고요.”

내심 동구도 나쁘지 않았는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휴, 아버지 뭘 고민을 하세요. 그냥 우리 밥 먹는데 숟가락 하나 더 얹는 건데요.”

“으음. 그럼...... 그러든가.”

“그럴게요.”

화색을 띤 이란은 얼른 희라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강진에게 전화를 했다.

***

강진이 운전대를 꽉 움켜잡았다.

시동이 꺼진 차 안에서 그가 운전대를 잡는 소리만 들렸다.

“병원...... 옮길까요?”

지음의 말에 강진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었다.

지음은 그의 반응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큰 눈을 끔뻑거리고만 있는데.

“후.......”

강진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를 보았다.

“아냐. 가까운 병원이 거긴데...... 그 손을 하고 멀리까지 다니기 힘들 거야.”

“.......”

“내가 매일 데려다주면 좋겠지만 바쁘면 그러지 못하는 날이 더 많을 거고.”

오늘처럼.

강진이 주먹을 꽉 쥐었다.

“당신이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좋아.”

“......거의 다 나았......어요. 이제 몇 번만 가면 되는데.”

“그래도 그 몇 번, 편하게 다녀야지.”

강진의 말에 지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올라가자. 배고플 텐데.”

지음은 강진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지음에겐, 강진이 싫다면...... 그 병원을 굳이 가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던 지음이 강진을 돌아봤다.

“왜?”

“아......무 것도.”

하지만 그가 상관없다고 했으니 지음 역시 상관없었다.

의사가 강진과 아는 사이이거나 아니거나 지음은 관심도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지음은 가벼운 마음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멍하니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강진이 그녀의 뒤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뺏어 들더니 지음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부드러운 그 손길에 나른해져 지음은 온몸에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배고플 텐데 밥 먹으러 나가자.......”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지음의 머리카락, 그 부드러운 감촉에 강진이 말끝을 흐렸다.

지음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강진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지음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지만 그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받아들었다. 시끄러울까 싶어 머리도 말리지 못하고 숨죽이고 있는데 강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무슨 일입니까? 할아버지, 어디 안 좋으세요?”

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습니다.”

그가 전화를 끊고 지음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지음은 듣고 싶지 않아 얼른 드라이기 전원을 올렸다.

집에 인사를 갈 때 그랬던 것처럼...... 오늘은 같이 저녁을 먹지 못하겠다, 할까 봐.

그가 다가와 지음의 손에서 드라이기를 들어 전원을 끄고 물었다.

“할아버지가 같이 저녁 먹자는데...... 당신도 갈래?”

“.......”

지음이 혼란스러운 눈길로 강진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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