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5/94)

#24화.

강진은 귀에 막 휴대전화를 대려는 순간 뒤에서 들리는 창국의 목소리에 멈칫했다. 놀라서 휴대전화를 든 손을 내리지도 못한 채로 그를 돌아봤다.

“무슨...... 말입니까?”

놀랄 만한 말을 한 건 창국이면서, 그는 돌아서는 강진을 보더니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강진은 심호흡을 하고 창국에게 다가섰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정말 한......지음 씨가 맞......맞아?”

“형한테 치료 받았습니까, 그 사람이?”

강진의 말에 창국이 허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아는 사람이야? 어떻게...... 아는.......”

“결혼할 사람.”

“뭐?”

창국은 은주와 거의 흡사한 외모의 여자를 만난 것도 놀라웠지만 강진이 지음을 알고 있는 것도, 그녀가 강진과 결혼할 사람이라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강진의 표정을 보며 창국이 얼른 얼굴을 풀고 어색하게 말했다.

“혹시 은주......를 닮.......”

“언제 나갔습니까?”

강진이 창국의 말을 뚝 자르고 들어왔다.

“......아, 그게....... 한 삼십 분쯤 됐나.”

“.......”

“OO호텔에 가야 한대서 데려다줬어. 비가...... 와서.”

“호텔?”

강진은 마치 창국이 지음을 호텔로 데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불쾌한 듯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창국은 뭐라 변명이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무슨 약속이 있는 것 같았는데...... 비가 오는데 차를 잡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내가.......”

“......다음에 보죠.”

강진은 창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인사를 하고 성큼성큼 밖으로 향했다.

“강......진아.......”

창국은 금방 멀어지는 강진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네가...... 결혼할 사람......이라고?”

나직하게 혼잣말을 하는 창국의 얼굴이 씁쓸해 보였다.

그 또한 강진의 치부이자 유일한 약점을 알고 있었다. 과거 그가 민준의 짝인 은주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거.

그래서 은주와 같은 사람을 고른 거니? 그 사람은 은주가 아닌데.......

“......그럼 너나 지음 씨나...... 상처받게 될 거야.......”

완전히 사라지는 강진의 뒷모습을 보며 창국이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

“세상에...... 어떻게. 그런 주제에 참 뻔뻔하기도 하다.”

“.......”

지음의 손힘이 조금 더 셌더라면 쥐고 있던 유리잔이 터져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강진이가 잘해주니까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거니? 그 회사가 어디라고 덥석...... 기가 막혀서.”

“.......”

“이력서는? 미림이 말 들어보니까 회사 들어갈 때도 이력서 한 장 없이 입사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지음은 당황했다. 일자리를 구해야겠다는 맘으로 강진의 제의를 수락했지만 이력서니 뭐니 그런 건 생각할 틈도 없었다.

“너 지우 그룹이 네가 자란 그런 촌구석 구멍가게인 줄 아는 거니? 어? 그래?”

“......죄송합.......”

“됐고. 뭐 너 같은 애랑 말 섞어봐야 나만 힘들지. 그래서. 계속 우리 강진이를...... 만날 거니?”

“네?”

이란이 다리를 꼬아 앉은 채로 팔짱을 꼈다. 지음을 아니꼽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얘가 모른 척하는 것 좀 봐? 계속 강진이 만날 거냐고!”

“......네.”

지음은 떨리는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고 대답했다.

“진짜 뻔뻔하기가....... 네가 뭘 잘 모르나 본데 우리 강진이 결혼할 사람 있어.”

“.......”

“감히 너 따위가 넘볼 상대가 아니란 얘기야. 김희라라고, 너도 알 텐데? 네가 낙하산으로 들어가 있는 아트갤러리 기획실장.”

알고 있었다. 정후가 건넨 자료에도 쓰여있었다.

지음은 종이에 정자로 쓰인, 짝사랑이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로아 그룹 이름은, 아무리 촌에 살았어도 들어는 봤겠지. 희라가 그 로아 그룹 대표의 손녀야. 너처럼 집안도 뭣도 없는 여자랑 차원이 다르다고. 희라가 강진이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데 네깟 게 감히....... 알지? 김희라.”

“네, 김 실장님이 누군진 압니다.”

“그래, 알지? 아는데...... 그런데도 버티겠다는 거야!”

“.......”

이란이 눈을 희번덕희번덕 굴리며 테이블을 쾅 쳤다.

그녀를 마주할 기운이 없어 지음이 시선을 돌리는데, 저쪽 카페 문으로 들어오는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어떻......게?’

지음은 이란에게서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보다는 강진이 화가 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했다.

‘역시 그에게 말을 했어야 할까.’

그와 함께하기로 한 1년,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한 그 1년 동안은 강진과 잘 지내고 싶었는데 자꾸 꼬이기만 하는 것 같아 속이 상했다.

그녀의 그런 마음은 꿈에도 알 리 없는 이란이 제 흥분에 못 이겨 자꾸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다. 테이블을 몇 번이나 내리치면서 다그쳤다. 어느새 팔짱을 풀고 지음에게 삿대질까지 했다.

지음이 고개를 숙이고 고분고분 잘못했다, 죄송하다...... 하지 않는 것도 이란을 흥분시키는 데 역할을 했을 거다.

“대체 네깟 게 뭔데!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서는, 응?”

“.......”

하지만 지음은 제 앞에서 삿대질까지 하며 흥분하는 이란보다 점점 제게로 다가오는 강진이 더 두려웠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렇게 소리를 치는 이란의 말은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그래서 우리 강진이한테 접근한 이유가 뭐야? 내가 너 같은 애들 아주 자알 알지. 쥐뿔도 없는 게 얼굴 반반한 거 하나 믿고 남자 하나 잡아서 팔자라도 고치려는 거야? 그래? 너 지금 어디서 살아? 집이 어디야?”

“.......”

집. 집은 없지만 지금은 강진 씨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란의 말이 딱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쥐뿔도 없는 데다 강진의 돈을 받아 인생을 바꿀 생각이니까.

하지만 지음은 바른대로 말할 수 없었다. 그랬다간 지음이나 강진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내내 이란은 더욱 소리를 높였다.

“얘가 왜 말을 안 해! 어른을 무시하는 거니, 너? 입을 꾹 다물고 왜 대답이 없어? 말이 말 같지 않아? 그래? 집이 어디냐니까?”

지음이 뭐든 대답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입술을 달싹이는데 어느 순간 코앞까지 다가온 강진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지음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

놀란 건 지음 뿐이 아니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에 방심하고 소리를 질러대다가 누군가 나타나자 소스라칠 정도로 놀랐다.

그녀가 물 밖으로 튀어나온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너, 너......!”

“이 여자가, 어디 사는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건네는 강진의 목소리는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했다. 말이 뚝뚝 끊겨 들릴 정도로 화가 난 듯한 목소리였다.

“......고모님이 알아서 뭐 하시게요!”

“뭐, 뭐......라고?”

강진의 말에 이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와.”

강진의 마지막 말은 지음에게 한 말이었다. 그는 이란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지음의 손목을 잡은 채로 호텔 밖으로 나갔다.

지음은 그에게 손목을 잡힌 채 달리듯 걸어야 했다.

그가 지음에겐 한 마디도 하지 않고 호텔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강진 씨.......”

호텔 밖으로 끌려 나오듯 나오자마자 지음이 그를 불렀다.

강진이 그녀의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발을 멈춘 채 지음을 내려다봤지만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서 있는 지음을 놔두고 강진은 그녀의 손을 놓았다. 그러더니 돌연 그녀를 호텔 밖에 그대로 세워 두고 도로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저기......!”

지음이 그를 붙들어 보려 했지만 이미 강진은 호텔 안으로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강진은 지음을 데리고 나오긴 했지만,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도저히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지음을 놔두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대체 왜 그런 표정을.......’

사실 강진이 더 화가 나는 건 지음의 태도였다.

담담하게 보이기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강진에겐 미안한 눈빛을 보이고 있는 지음의 태도.

이란에게 화를 내야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아니라 강진이 시킨 일이고 원한 일이다, 그러니까 당신 조카에게 가서 따져라.

물론 그렇게 말할 순 없을 테지만 이러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을까.

강진은 입을 꾹 다물고 아직도 씩씩대며 앉아 있는 이란의 앞으로 다가갔다.

“......뭐, 뭐야?”

무서운 기세로 다가오는 강진을 보며 이란이 멈칫하는데, 강진이 테이블을 쾅! 두 손으로 내리쳤다.

“......!”

“앞으로 한 번만 더...... 내 허락 없이 저 여자 만났다가는 고모님이라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뭐, 뭐? 뭐라고?”

“나 없이 저 여자, 한지음 씨 만나지 말란 말입니다.”

“......!”

이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

지음이 한숨을 쉬며 신발로 흙바닥을 문지르고 서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강진은 화가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얼굴로 호텔 밖으로 나왔다.

지음이 그와 함께 차에 올라 집으로 향하는데, 운전하는 내내 강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는 조금 풀린 것처럼 보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어 알 수가 없었다.

이내 지음이 몸을 돌려 강진을 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뭐가.”

“.......”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사실 지음도 강진에게 뭐가 미안한지 딱히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냥...... 이런 상황을 만든 거?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강진이 후, 한숨을 쉬었다.

“아프면 아프다고 하는 거야. 화가 나면 화가 난다고 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면 이러지 말라고도 하고!”

“.......”

버럭 화를 내던 강진이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아직 나랑 제대로 가족들에게 인사도 못 한 상태잖아. 네가 그렇게 굽힐 필요 없다고.”

“.......”

“다시 날짜 잡을 테니까, 그 전엔 차이란...... 고모와 따로 만나지 마.”

“네, 그럴......게요.”

그러는 사이 차가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스르르 차가 서자, 그제야 강진이 지음을 돌아봤다.

“손은...... 어때?”

“아.......”

그의 말에 지음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괜찮아요. 저기, 강진 씨.”

“응.”

“혹시 권......창국이라는 의사 선생님 알아요? 아는 사람이에요?”

“......왜?”

지음의 물음에 강진이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강진 씨를...... 안다고 하는 거 같아서.......”

‘창국이 형이랑 만나지 마.’

강진은 그렇게 말하려다가 이를 악물고 꾹 참았다.

그렇게까지 할 게 뭐야.......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지음을 보다가, 강진이 시선을 돌렸다.

그가 운전대를 꽉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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