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4/94)

#23화.

창국이 얼른 지음의 손을 보며 화제를 돌렸다.

“아...... 뭐 그런 이름이 흔한 모양이네요.”

“.......”

지음은 달리 대답하지 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

“손 좀 보겠습니다.”

멋쩍어하던 창국이 조심스럽게 지음의 손을 보고 치료를 했다. 지음은 그냥 그가 하는 말에 네, 아니요, 짧게 대답만 하고 말았다.

불편한 분위기에서 치료를 다 받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병원에 올 때까지만 해도 맑았던 날씨인데 우산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음은 병원 회전문에 서서 죽죽 잘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보고 서 있었다.

이내 회전문을 밀고 밖으로 나간 지음이 오른손을 내밀자, 빗물이 손바닥을 기분 좋게 두드렸다.

Rrrr-

미림이었다.

고민하던 지음이 전화를 받았다. 단순히 회사 상사라면 퇴근했다는 핑계로 무시했겠지만, 미림은 그냥 상사가 아니었다.

강진의 고종사촌 동생.......

“네.”

지음이 전화를 받자마자 미림의 목소리가 까랑까랑하게 울렸다. 회사가 아니라고 바로 반말이 튀어나왔다.

-야, 너 어디야? 하라는 건 다 했어?

“네. 다 해 놓고 퇴근했습니다.”

-그래서 어딘데?

“병원입니다.”

-병원? 어디 병원?

지난번처럼 이번에도 미림의 곁엔 누가 있는지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전화를 바꿔 들었다.

-여보세요?

“......?”

-한지음 씨?

“네...... 누구세요?”

-나, 차이란이라고...... 강진이 고몬데. 엊그제 나 보지 않았어? 정식으로 소개받지는 않았다지만, 세상에 어른을 보고 인사도 안 하고 가 버리는 게 어딨어, 그래?

지음은 그제야 차이란과 만났던 일이 떠올랐다. 그녀의 흰색 원피스, 강진이 예쁘다고 했던 옷을 찢어놓은 여자. 지음의 어깨에 실낱같은 상처를 낸 여자.......

“아.......”

-아......?

“......안녕하세요.”

-그래 뭐. 너 지금 나 좀 보자.

“지금......요?”

-왜. 안 돼?

지음은 강진에게 말을 하고 만나야지 않을까 잠시 고민했다.

-어른이 보자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는 거지. 지금요, 라니?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어디니?

“지금 병......원이에요.”

-병원이라니?

말을 하려는 순간 미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을 다쳤다는 둥 병원을 간 것 같다는 둥 설명하는 듯했다. 지선 병원 어쩌고 하는 것 같더니 도로 이란이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선 병원이라는 거지? 그 근처에 OO호텔 있어. 거기 카페에서 30분 후에 보자.

“......네.”

지음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 있었다.

아직 비는 그치지 않았고 지음은 잠시 고민했다.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더 거세지기 전에 버스를 타고 가야 할지.

역시 아무래도 좀 걸어야 할까.

호텔이 근처라는데 택시는 너무 호사고, 이 꼴로 버스를 타는 것도 우스웠다.

고민을 하다 도로로 내려서는데 웬 차가 그녀의 앞에 섰다.

“......?”

“지음 씨?”

“아.......”

창국이 창문을 열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음 씨, 왜 여기 이러고 있어요? 아, 혹시...... 비 오는데 우산 없어서 그런 거죠?”

“.......”

“타요, 어디까지 가는지 모르지만 데려다줄게요.”

“아니에요.”

“타요, 얼른.”

창국은 인상도 좋고 목소리도 부드럽고 좋은 사람인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지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이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창국도 그냥 지나갈 생각이 없었다.

“얼른 타요. 비도 오고 시간도 늦었는데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나, 내릴까요?”

“.......”

끈질긴 창국의 권유에 지음은 할 수 없이 차에 올랐다.

“젖었네요. 이거로라도 좀 닦아요.”

창국이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음에게 건넸다.

“.......”

지음은 그가 건넨 흰색의 손수건을 보며 잠시 예전 생각을 했다.

엄마가 수놓아 준 손수건, 지금은 지음의 품에서 떠난 손수건을.......

“......요?”

“.......”

“지음 씨?”

“아,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녜요.”

“어디로 가면 되나요? 집이 어디예요?”

“OO호텔로 가 주세요.”

“OO호텔......이요?”

호텔로 차를 몰면서 창국은 지음을 몇 번이나 힐끔거렸다.

보통은 되묻는 말에 누구를 만난다, 왜 가는 거다...... 설명이라도 할 텐데 지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창국은 그녀가 참...... 묘했다. 그래서 자꾸 신경이 쓰이고, 별일 아닌 것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여깁니다. 지음 씨가 말한 곳.”

“아. 고맙습니다.”

지음이 고개를 꾸벅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가 멀어지려는데, 창국이 다급하게 그녀를 불러세웠다.

“지음 씨!”

“?”

“......손, 조심하세요.”

창국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지음이 호텔 안 카페로 들어가니, 늦은 시간에도 안은 한산했다. 사실 그 넓은 카페에 한 사람만 앉아 있었다.

그 사람이 이란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음은 혹시 몰라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아, 저 한지음이에요. 호텔...... 카페에 왔어요.”

“어, 그래?”

역시나 여자가 전화를 받더니 뒤를 돌아봤다. 지음이 전화를 끊으며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앉아라.”

지음은 창국에게 받은 손수건을 돌려주지도 못하고 왔다고 생각하며 이란의 앞에 앉았다.

그녀는 지음이 자리에 앉기 전부터 지음을 기분 나쁘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사무실에서 희라와 미림이 그녀를 보던 눈빛과 별다른 것도 없었다.

싫어 죽겠다, 너는 우리완 다르다....... 그러니까 입 다물고 죽어 지내라.

“왜 보자고 하셨나요?”

“뭐? 하, 내가 너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긴 했지만.......”

“.......”

“됐고. 내가 강진이 고모로 걱정이 돼서 보자고 했다. 아무리 지들 좋아 만나는 거라도, 어디 근본 없이 아무나 만나서야 되겠어?”

참 이상했다. 이 사람들은 하나 같이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 못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지음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진 사람들도...... 별거 아니네.

“너, 너...... 내 말이 웃기니?”

“......아닙니다.”

지음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 내가 대충 미림이한테 듣긴 했는데 부모님이 안 계시다고? 대학교도 안 나왔고?”

“......네.”

“기가 막혀서.......”

이란은 열이 오르는지 손부채질을 했다.

“그래서 보유, 보육원에서 자랐니? 학교는? 듣자 하니 고등학교도 안 나왔다던데...... 맞아?”

“......네.”

지음은 앞에 놓인 물잔을 꽉 쥐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

창국은 지음이 호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은주와 많이 닮은 여자라 놀랐고, 그다음엔.......

“......아냐, 닮은 거 같으면서도.”

너무 달랐다.

은주는 잘도 웃었다. 민준의 옆에서 항상 화사하게 웃고 깔깔 소리도 내고. 자기 얘기도 제법 잘했다. 이런 거 좋다, 이런 건 별로다.

창국은 무심하면서도 텅 빈 눈빛으로 자신을 보던 지음을 떠올렸다.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온도 차가 너무 났다.

그녀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창국은 창문을 올리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서야 병원에 레퍼런스 자료를 두고 온 게 떠올랐다.

“아...... 오늘 지음 씨 생각하느라 자료 두고 온 줄도 몰랐네.”

잠시 고민하던 창국은 병원으로 다시 차를 돌렸다.

병원 앞에 대충 차를 대고 회전문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그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창국이 걸음을 멈췄다.

“어......?”

강진은 병원으로 들어서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하...... 정말 이 여자는 대체 전화를 왜 안 받는.......”

“강진......아?”

“......?”

강진은 전화를 받지 않는 지음에게 메시지를 남기려다가 제 이름이 불린 곳을 돌아봤다. 그곳엔 창국이 서 있었다.

“강진아! 너 맞구나? 반갑다, 오랜만이네.”

“.......”

“와, 못 알아볼 뻔했다, 하마터면.”

창국이 예전과 똑같이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다가왔다.

“우리 얼마 만이지?”

“......모르겠습니다.”

강진은 창국 때문에 지음에게 전화를 하지 못하는 게 짜증이 났을 뿐, 반가운지도 모르겠고 얼마 만에 만났는지는 관심도 없었다.

“아, 그래....... 좀 오랜만이긴 하지. 근데 여긴 어떻게 왔어? 어디 아파? 좀 늦었는데...... 온 김에 내가 봐줄까?”

저 오지랖.

강진이 인상을 썼다.

창국이 더 싫었던 이유는 이거다.

저렇게 형 민준을 닮은 오지랖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지나치게 착한 인성. 그래서 창국을 보고 있으면 민준 형이 떠올랐다.

끼리끼리라고...... 친구라 닮은 건가.

강진이 숨을 골랐다.

“아닙니다. 아는 사람이...... 화상 때문에 이 병원에 왔는데 연락이 안 돼서....... 하, 아닙니다.”

강진은 저도 모르게 술술 얘기를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런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창국을 보면 자꾸 속에 있는 말을 하게 돼서. 꼭 형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강진이 다시 지음에게 전화를 하며 스쳐 지나가려는데, 창국이 그를 불러세웠다.

“......저기, 강진아!”

“?”

“혹시 말이야....... 네가 아는 사람, 여자야?”

“......그렇다고 하면 답이 달라집니까?”

강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창국은 입이 썼다. 사람들과 관계 맺는 걸 잘하는 그가,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분을 살필 줄 아는 창국이 저를 적대하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뭘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민준을 잃고 나서 강진이 더 차가워진 건 알겠는데 왜 자신에게 그리 벽을 세우는 건지.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일 보시죠. 나도 바빠서 그럼.”

강진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지음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병원을 뒤지기라도 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뒤에서 들려오는 창국의 목소리에 강진은 얼어붙은 듯 설 수밖에 없었다.

“강진아, 혹시 네가 찾는 사람이...... 한지음 씨니?”

“......!”

예상치 않은 말에 강진이 창국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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