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3/94)

#22화.

이란은 서재에 앉지도 못하고 동동거리며 미림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 비서는 그런 이란 앞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서 있었다.

“그래그래, 너희 기획팀에 계약직이라...... 이거지.”

-엄만! 그렇대도.

이란이 인상을 쓰다가 서재를 왔다 갔다 거리더니 방 한복판에 우뚝 섰다.

“됐고, 이력서 좀 찾아서 보내봐.”

-이력서? 무슨 이력서?

“무슨 이력서는 무슨 이력서야! 한지음, 걔 거 보내라고!”

이란의 말에 미림이 소리를 꽥 질렀다.

-아, 귀 따가워! 엄마! 없다고 했잖아.

“없,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럼...... 그럼 어떻게 들어왔어?”

-얘기했잖아. 내가 말할 때 뭐 들었어, 엄만?

미림이 짜증 부리듯 말하자 이란이 진정하려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가만있어 봐! 그럼 대체 어떻게 입사를 시킨 거야? 그냥 강진이가 멋대로, 데려왔다는 말이야?”

-그렇대도? ......엄마 치매야? 벌써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아, 몰라 몰라. 나 일해야 해, 끊어.

“.......”

이란이 힘없이 휴대전화를 떨궜다.

정 비서가 얼른 그녀의 곁에 의자를 가져다 두자, 이란이 의자 팔걸이를 붙들고 간신히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 세상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정신이야?”

정 비서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이란에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사모님? 차 한 잔 가져다드릴까요?”

“......아니, 그보다 정 비서가 좀...... 알아봐 줘야 할 게 있어.”

“네, 말씀하십시오.”

“한지음. 걔에 대해 알아봐.”

“예? 한......지음이요?”

“그래. 이번에 강진이가 데려왔다는 여잔데, 뭐 아직 집에 안 와서 나도 스치듯 본 게 다야. 한번 알아봐.”

“아, 네 알겠습니다.”

“집안도 형편없고 학력도 별 볼 일 없고....... 거기다 얼굴은 뭐? 하, 나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오네...... 은주를 닮아?”

“......?”

이란의 말에 정 비서도 놀라는 표정이 되었다. 은주에 대해 모르지 않았으니까.

“......아주 탈탈 털어봐. 알아보고 전부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정 비서가 고개를 숙였다.

***

며칠이 지난 어느 오후, 임원 회의가 있어 사무실에서 희라는 미림과 함께 자료를 정리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희라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희라는 사무실 근무할 때 입기엔 다소 불편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다. 지나치게 몸에 붙는 옷에, 허벅지가 다 드러날 만큼 짧은 치마...... 의자에 앉을 때마다 옷이 어떻게 될까 봐 보는 사람도 불편한 옷.

그녀는 매번 강진을 만나는 날에는 과한 옷을 입곤 했다. 문제는 정작 강진은 희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는 거.

희라가 올라간 짧은 치마를 손으로 잡아 내리자 미림이 쿡쿡 웃었다.

“실장님, 치마 너무 짧은 거 아니에요?”

“......괜찮아. 암튼 나 다녀올게. 늦을 거 같으니까 알아서들 퇴근해.”

“네.”

희라가 사무실을 나가자, 미림이 한쪽에 조용히 있던 지음을 노려보았다.

“지음 씨는 사무실 정리 좀 하고 퇴근하지?”

지음이 책상 정리를 하다가 미림을 보았다. 사실 당분간은 퇴근 후 병원에 가야 하는 지음은 되도록 빨리 정리하고 싶었지만.......

“......네, 알겠습니다.”

“진짜 지음 씨는 왜 그렇게 대답이 굼떠? 빨리빨리 대답하는 법이 없어? 짜증 나, 진짜.”

“.......”

“난 가볼게. 저기 복사실도 정리도 좀 해 놓고, 탕비실도...... 알았지?”

“알겠습니다.”

미림이 흥, 코웃음을 치다가 가방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지음은 한숨을 쉬고 탕비실로 향했다.

***

회의실로 향하던 희라를 보고 정후가 달려왔다.

“김 실장님, 회의 가십니까?”

“응.”

희라는 정후를 힐끔 보며 또각또각 발걸음을 옮겼다.

정후가 희라의 옷차림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하...... 옷이 이게 다야?”

“뭐?”

정후의 말에 희라가 걸음을 멈췄다.

잠시 그녀를 보던 정후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네 옷이 부족한 거 같아서 내가 좀 빌려주려고. 잘 쓰고 갚아라, 비싼 거다.”

“......웃기시네.”

희라가 피식 웃으며 옷을 도로 정후의 품에 안겼다.

“이거 콘셉트야.”

“.......”

희라는 씁쓸해 보이는 정후를 뒤로한 채 강진의 사무실로 향했다. 회의실 들어가기 전에 따로 강진을 조금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대표......님.”

들어갔는데 강진은 전화가 오는 휴대전화를 보며 인상을 쓰고 있었다. 심상치가 않아 보여서 희라는 얌전히 문을 닫고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자, 강진 역시 그녀를 슬쩍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권창국]

형 민준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만에 온 전화였다.

고민하던 강진이 전화를 받았다.

“......네, 차강진입니다.”

-어, 강진아. 나야, 창국이 형.

“......네.”

그의 목소리를 듣는 강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창국과 별다른 일이 있어서 껄끄러운 건 아니었다. 서로 안부 전화를 하지 못할 정도로 불편하다거나, 창국이 강진에게 실수를 한 것도 아닌데.......

사실 강진은 형 민준과 형수 은주가 죽고 나서 그들과 관련된 사람들은 보지도 않았고, 만날 일은 더더욱 만들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갑작스러운 창국의 전화가 불편했다.

강진이 갑갑하다는 듯 넥타이를 풀었다.

“형이 무슨...... 일이십니까?”

-어, 그냥 안부...... 전화한 거야. 잘 지내지?

“잘 지냅니다.”

-어 그렇지....... 잘 지내야지.

‘듣고 보니 안부 전화인 거 같은데, 별거 아닌 안부 인사가 이렇게 살벌할 일이야......?’

희라는 강진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고 목소리가 싸늘해지는 게 의아했다.

“왜 전화했습니까?”

-그냥 뭐...... 내가 너한테 전화도 못 해? 오랜만에 목소리도 듣고.......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걱정이요? 형이 왜 내 걱정을 합니까?”

-그러게. 그냥 난...... 잘 지냈나 싶어서.

“......잘 못 지낼 일도 없습니다.”

강진은 창국을 떠올릴 때마다 민준이 자동적으로 생각나는 게 싫고...... 아팠다.

“더 할 말 없으면 끊겠습니다.”

오랜만의 안부 전화가 서늘하게 끊겼다.

그제야 희라가 강진에게 다가왔지만 강진에게 그녀는 안중에도 없었다.

“누구 전화이기에 그렇게 날을 세워? 너답지 않다, 강진아.”

“......?”

희라가 계급장을 떼고 강진에게 친구처럼 말했다. 강진이 어디론가 연락을 하다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누구 전화인지 내가 실장님한테 설명할 필요 없는 거 같고. 호칭 제대로 하시죠. 아직 회삽니다.”

“......어? 아, 네.......”

“회의실로 가 계세요. 금방 가겠습니다.”

“.......”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희라가 분한 듯 울상이 되어 몸을 돌렸다.

***

지음은 여전히 아픈 손으로 탕비실도 치우고 복사실까지 정리를 마치고 나서야 허리를 폈다. 다치지 않은 손까지 뻐근했다.

그녀는 한번 휘둘러본 뒤 아무도 없는 사무실 불을 끄고 병원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병원엔 사람이 많았다. 접수를 하고 앉아 있었지만 그녀의 차례는 아직 멀어 보였다.

한편, 진료실 안에서는 창국이 한창 바쁘게 환자를 보고 있었다. 그는 콘퍼런스가 끝나자마자 외래를 보러 내려왔다.

“선생님, 오늘은 김 선생님이 하셔도 된다고 했는데...... 안 피곤하세요?”

간호사 말에 창국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환자분들도 많은데, 같이 하면 좋죠, 뭐.”

“김 선생님 힘드실까 봐 피곤하실 텐데 외래까지 보시는 거예요? 진짜 권 선생님은 천사세요.”

간호사가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창국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동료 선생이 힘들까 봐, 가 아니라...... 오늘 그녀가 오기로 한 날이어서인데.

한참 후, 지음이 진료실로 들어와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지음 씨. 어서 오세요. 이리 앉으세요.”

“네.”

창국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부터 지음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키나 체형도 그렇고...... 저 새하얀 피부하며, 도톰한 이마에 앙증맞은 입술하며....... 은주와 닮아도 너무 닮았기에.

처음 봤을 땐 이미지가 비슷해서 잘못 봤겠지, 했지만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닮아 있었다.

꼭 자매처럼, 이미지도 그렇고...... 분위기가 정말 자매처럼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은주...... 씨에겐 자매가 없는데. 분명 형제자매......, 부모도 없다고 했는데.’

“......아, 오래 기다리셨죠?”

창국은 지음을 멍하게 보다가 그녀가 다가와 앉자 얼른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요.”

“이상하게 오늘따라 예약 손님이 많았네요.”

“네.”

“자, 그럼 한번 볼까요?”

창국의 앞에 손을 내밀려는 순간 지음의 전화가 울렸다.

“아...... 전화 먼저 받으세요. 난 잠깐 이것 좀 보고 있을게요.”

창국이 지음의 표정을 보고 얼른 모니터를 가리켰다.

강진에게서 온 전화였다.

“......네, 강진 씨.”

-오늘 회의가...... 아무래도 좀 많이 늦을 거 같아. 괜찮겠어?

“괜찮아요.”

-일은 끝났어?

“네. 끝나고 병원...... 갔다가 집에 갈 테니 걱정마세요.”

-병원? 하, 그래...... 병원 간다고 했지. 어디야, 병원이?

“아...... 지선 병원이요.”

-......데리러 가지.

“저기, 강진 씨 회의잖아요. 오늘 중요한 임원 회의라고 했잖아요.”

-혼자 갈 수 있겠어?

지음은 괜히 창국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부끄러워서 몸을 돌렸다.

“당연히...... 혼자 갈 수 있죠.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오자, 창국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 있었다.

“......?”

“저기...... 지음 씨, 방금 통화.

..... 강진......이라고 하던데?”

“네?”

지음은 제 전화를 듣고 있었다는 게 기분이 나빠 얼굴이 확 굳었다.

“아, 오해...... 말고요. 들어서 미안합니다. 사실...... 내 친한 친구 동생 중에 강진이라는 녀석이 있어요.”

“네......?”

창국을 보는 지음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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