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2/94)

#21화.

미림은 네까짓 게 쳐다보면 뭘 어쩔 건데? 하는 눈빛으로 지음을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말 섞어봤자 미림과 쓸데없는 실랑이만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음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냥...... 가져다 드리기만 하면 되나요?”

“어. 이거 치우고.”

지음은 미림과 부딪치며 엉망이 된 바닥을 내려다봤다. 그러는 사이 미림이 혀를 차더니 지음을 한 번 더 툭 치고 화장실로 향했다.

희라는 둘이 소리를 높여 난리를 치든 어쩌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사무실 바닥 미끄럽지 않게 잘 닦아.”

“.......”

그저 걸레를 가지고 나오는 지음을 보며 한마디 하는 게 다였다.

지음은 서류를 내려놓고 바닥에 흥건한 커피를 닦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커피를 쏟은 왼손이 시큰거리고 힘이 빠졌지만 입술을 꽉 물고 닦았다. 어차피 오른손으로 하면 되는 거니까.

“하아.......”

오기로 괜찮은 척했어도 왼손 손등부터 시작된 통증이 점점 손목과 팔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지음의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고, 얼굴도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왼팔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지만, 그래서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고르기도 했지만...... 희라는 괜찮냐는 말 한 번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보고 있었으면서.

지음이 바닥을 다 닦고 몸을 일으키자 희라가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어머, 지음 씨...... 다친 거 아냐? 미림 씨는 조심 좀 하지. 됐어, 놔두고 가 봐. 문화센터 가야 한다며.”

잘 닦으랄 때는 언제고.

“......네, 다녀오겠습니다.”

이런 취급, 지음을 걱정하는 건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들의 반응은 익숙했다.

지음이 영혼 없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는데, 뒤에서 희라가 고개만 쭉 빼서 내밀고 말했다.

“어, 그래. 지금이 5시 조금 넘었으니까 그거만 가져다주고 퇴근하든가.”

“알겠습니다.”

지음이 도로 몸을 돌려 희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사무실 밖으로 나갔는데 팔까지 후끈거릴 만큼 통증이 올라오자,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지음은 찬물을 틀고 붉어진 손등을 쏟아지는 물 아래 댔다.

“아......!”

아릿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아팠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열기를 식힌 지음이 심호흡을 했다.

‘이따위 상처쯤이야.......’

죽을뻔한 고비도 여러 차례 넘긴 지음에겐 이 정도 괴롭힘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충 물기를 닦아내고 동기의 사무실로 향했다.

***

똑똑.

“국장님, 아트갤러리 기획팀에서 직원이 왔습니다.”

“아트갤러리?”

“네, 전시기획팀 박미림 씨가 보낸.......”

비서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동기는 미림이 보냈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뼉을 짝하고 쳤다.

“어어, 그래! 얼른 들어오라고 해. 차는...... 차는 대충 알아서 두 잔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비서가 나가고 나자 동기가 두 손을 맞잡으며 흐흐, 의미심장한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지음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동기를 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어, 전시기획팀 직원이시라고?”

“......네.”

지음은 어쩐지 동기의 눈빛이...... 징그럽게도 싫었다.

그녀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동기는 지음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보았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대면하면 상대가 어떤지 궁금하기도 하고 알아볼 마음으로 보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다. 지음 역시도 강진이나 동기,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보았으니까.

하지만.......

“으음.”

이따위로 신음까지 흘리며 지음을 훑어보는 동기는 소름이 돋았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 같고, 과거 재진이 했던 짓거리가 떠올라서 토악질이 났다.

“아...... 이거, 전해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

지음이 얼른 고개를 젓고 손에 든 서류를 내밀었다.

동기는 그녀가 하는 양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앞으로 다가섰다.

빨리 가져가라 하는 마음에 지음이 서류를 든 손을 더욱 내밀었지만, 그는 느릿하게 다가와서는 서류가 아니라 지음의 손을 잡기라도 할 것처럼 팔을 쭉 뻗었다.

지음의 눈이 커졌다. 순간 그녀의 맘속에 울리는 강진의 목소리.......

「......조심하는 게 좋겠다.」

「무슨 일이든...... 엮이지 마.」

퍼뜩 정신이 든 지음이 얼른 손을 빼려고 서류에서 손을 놓는데 동기가 한발 더 빨랐다. 그의 끈적한 손이 지음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아......!”

지음은 통증 때문에 소리를 질렀다. 잡혀버린 손이 좀 전에 다친 손이었다, 바보같이.......

그녀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몸을 웅크렸지만, 동기는 그녀의 손목을 그대로 붙들고 함께 몸을 숙였다.

“어? 이거 왜 이래......? 어디 다친 겁니까?”

“......손 좀 놓아주시죠?”

지음이 이를 악물고 동기를 올려다봤다.

“아....... 미안합니다.”

그제야 동기가 지음의 손을 놓았다.

“에헤이, 어디 다쳤나 보네. 언뜻 보기에도 많이 다친 거 같은데....... 아니 미림이 얘는 이렇게 다친 사람을 심부름 보냈다는 건가? 괜찮아요?”

동기가 지음을 향해 조금 더 다가와 그녀의 손을 보고 인상을 썼다.

그가 자꾸 자신에게 손을 내밀려고 하자 지음은 뒤로 물러나야 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이거나 확인해주세요.”

지음은 바들바들 떨리는 왼손을 뒤로 감추고 서류를 얼른 동기에게 건넸다.

중요한 서류이고 바쁘다고 하더니 그렇지도 않은 건지 서류엔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지음의 얼굴에 눈을 고정한 채로 자꾸 그녀에게 다가서려 했다.

지음은 손이 아파 제대로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없었다. 그냥 이곳에서, 동기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거...... 받으시라구요!”

“아, 서류...... 이거야 뭐.”

동기는 서류를 받아 대충 아무렇게나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지음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병원 갑시다.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

“괜찮습니다.”

“......아니, 내가 뭐....... 지음 씨라고 했나? 내가 뭘 한 대? 그냥 손 그거 보니까 좀 심하게 다친 거 같아서 병원에 가자고 한 거지. 내가 데려다준다니까?”

“왜요?”

“......뭐?”

그녀에게 한 발 더 다가서려던 동기가 멈칫했다. 마주친 지음의 눈빛이 서늘해서 어쩐지 더는 다가갈 수 없었다.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전 오늘 서류...... 이거, 전해드리러 온 겁니다.”

“.......”

서류에 잠시 시선을 둔 지음은 벙찐 표정으로 서 있는 동기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선 사무실 밖으로 황급히 나왔다.

그가 붙들기라도 할까 봐 도망치듯 나오느라 가슴이 너무 빨리 뛰었다. 잠시 잊혀졌던 통증이 심해졌다. 손이...... 아팠다. 서둘러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

지우 그룹의 계열사 지선 병원의 정형외과 전문의인 권창국은, 차강진의 죽은 형인 차민준의 친구였다.

오전 내내 까다로운 환자를 보다가 이제 겨우 한산해져서 차를 한 잔 마실 여유가 생긴 참이었다.

“선생님, 오늘 진짜 힘드셨죠?”

간호사가 문을 열고 창국을 보며 안쓰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김 간호사께서 고생하셨죠.”

“아휴, 아니에요. 왜들 그렇게 예민한지 모르겠어요.”

창국은 부드럽게 웃었다.

“날이 더워서 그런가 다들 힘든가 봅니다. 이제 마지막 환자분이죠?”

“네. 잠시만요.”

김 간호사가 문을 반쯤 잡고 밖을 내다보았다.

“한지음 씨, 들어오세요.”

지음은 대기 의자에 앉아 있지도 못할 정도로 손에 통증이 일어, 어쩌지 못하고 선 채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얼른 진료실 앞으로 향하니, 간호사가 문을 열어 주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가세요.”

“.......”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니 창국이 모니터를 보며 손짓을 했다.

지음은 닫히는 문을 괜히 한번 돌아보며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어서 오세요, 어디가 불편......!”

“......?”

모니터를 보던 창국이 미소를 지은 채로 지음을 돌아보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의자의 바퀴가 뒤로 밀리기까지 했다.

“은......주......!”

창국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지음은 어디서 보았던 사람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행여 어디서 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

지음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자, 창국도 정신이 들었는지 심호흡을 했다.

“아, 미안......합니다. 내가 아는 사람과 너무...... 너무 닮아서.......”

“.......”

그 말 참...... 많이 듣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서울 사람들은 그리 닮은 사람이 많은가.

지음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 ......어디 좀 보죠. 어딜 다치신 겁니까?”

지음이 왼손을 들어 보이자, 창국이 그녀의 손등을 살펴보았다.

“아...... 많이 데었네요. 어쩌다 이랬어요?”

“뜨거운.......”

지음은 와서 부딪치던 미림을 떠올리다가 어쩌면 그녀가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커피를 쏟고 나서 번뜩이던 미림의 눈빛이나, 고소해서 어쩔 줄 모르고 씰룩대던 그녀의 입꼬리가 그랬다.

그러다 지음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야 하겠어......?’

“뜨거운 물을 엎었어요.”

“조심하시죠. 바로 흐르는 물에 열기를 식혀줬어야 하는데...... 조금 지체한 모양이에요. 그쵸?”

“.......”

지음은 제 손 위로 약을 바르며 치료하는 창국을 보며 움찔거렸다.

“아프겠어요. 그래도 잘 참았어요. 오늘 처치는 이 정도만 하면 될 것 같고, 내일 또 오세요.”

그가 붕대를 감아주며 말했다.

“물 닿지 않게 조심하고. 아셨죠?”

“......네.”

진료가 다 끝났는데도 창국은 지음의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아! 미안......합니다.”

지음이 손에 힘을 주어 당기자, 그제야 그가 지음의 손을 놓아주었다.

“너무...... 많이 닮으셔서.......”

“.......”

창국의 말에 지음이 그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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