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지음은 얼마나 세게 붙잡힌 건지, 강진에게 붙들린 손목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잡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걸음도 빨리했다. 화가 난 사람처럼 지음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걸었다.
그냥 걸어도 차이가 나는 보폭이었기에 지음은 빠르게 걷는 강진을 제대로 따라갈 수 없어서, 뛰다시피 걷어야 했다.
“후.......”
미술관 밖으로 나와서야 굳게 닫힌 강진의 입술이 열렸다. 그나마도 첫마디가 한숨이었지만.
강진이 멈춰서서 지음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지음이 휘청이며 강진의 앞으로 와 섰다.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이 남자가 이렇게 화가 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음은 숨을 골랐다.
강진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다. 그러다가 그 뜨거운 눈길이 지음의 어깨에 닿았다.
“.......”
지음은 그가 제대로 보지 못하도록 몸을 오른쪽으로 틀고 손을 슬쩍 찢어진 옷자락 위로 올렸다.
하지만 강진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이미 지음의 뽀얀 어깨에 실낱같은 상처 몇 올을 보았으니까.
“하....... 내가...... 생각했어야 했어. 차강진 이러고도.......”
이번엔 그가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인 채 혼잣말을 했다.
작은 목소리, 거기다 한숨이 반 이상 섞였기에 지음은 그가 뭐라 하는지 들을 수 없었다.
잠시 괴로워하던 강진이 고개를 들고 지음을 보았다.
“강진 씨.......”
“.......”
지음이 그의 이름을 불러봤지만, 딱히 할 말은 없었다. 지금 강진의 기분이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뭐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를 부른 채 바라보고 있는데, 강진이 입고 있던 슈트 재킷을 벗어 지음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타.”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차 문을 열었다.
오늘 그와 함께 전시회를 보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화는 가라앉은 걸까.’
강진의 운전 솜씨는 부드러웠다.
지음이 그를 슬쩍 돌아봤다.
“갔던 일은 해결 잘 됐어요?”
“......당신은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거 없어.”
“아, ......네.”
그냥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테지만, 마치 강진의 일은 지음의 영역이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으로 들려서 지음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러지 말고.”
“네?”
“입술 물고 그러지 마. 별 뜻 아냐. 그냥...... 회사 일 아니라도 당신 요새 머리 복잡하잖아. 회사 일은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운전 솜씨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음은 긴장이 스르르 풀렸다.
강진 말대로 요즘의 지음은 삶의 터전이 바뀌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누웠다 하면 악몽이고 뭐고 꿀 새도 없이 기절했다.
“아까.......”
“네?”
“미술관에서 본 남자, 어떻게 된 거야?”
“......?”
“그 사람이랑 무슨 얘길 하고 있었어?”
“아...... 별로...... 그냥 누구냐고만.......”
지음의 말에 강진이 눈썹을 찡그리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박동기, 지우 문화센터 예술국장. 고종사촌 형이야.”
“아, 네.”
지음은 그제야 정후가 건넨 자료에서 그에 대해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고모...... 차이란의 아들이자, 기획팀 미림이 오빠고.”
그의 이력에 대해 차분히 설명하던 강진이 잠시 머뭇거렸다.
“......조심하는 게 좋겠다.”
“아...... 뭘 조심하는 게 좋을까요?”
지음의 물음에 강진이 그녀를 슬쩍 보았다.
“그냥 엮이지 마.”
***
“아이고 머리야.......”
이란은 곱게 화장을 하고 회사로 나간 보람도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오자마자 방에 꼼짝없이 누워 끙끙거리고 있었다.
지음을 보자마자 이란은 머리를 둔기로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쪽은...... 대표님과 결혼하기로 한 한지음 씨입니다.」
「뭐라......고?」
이란이 정후를 쏘아보았다.
정후가 서둘러 지음을 보내고 이란의 앞을 막아섰다.
「고모님, 저랑 얘기하시죠.」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너 지금 한 말이 무슨 말이니?」
「말씀드린 그대롭니다. 강진, 아니...... 대표님과 만나고 있는 사람이에요.」
정후가 지음을 따라 회사로 들어가려는 이란의 팔을 붙들었다.
뿌리치려 해 봤지만 그녀의 힘으론 그럴 수 없어서 이내 힘을 뺐다.
「강진이가 겨......결혼한다는 사람이 그럼......?」
「네, 맞습니다.」
이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정말...... 미림이 말이 맞단 말이야? 그 여자애가? 아이고, 아이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도로 누웠다. 이란이 끙끙거리는데,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오셨어요, 국장님.
-네. 엄마는요?
-사모님은 방에 계세요.
동기의 목소리가 들리고 얼마 안 있어 이란의 방문이 열렸다.
동기가 들어오자 이란이 우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너는 어제도 집에 안 들어오고, 어디서 잔 거야?”
“뭐 그런 데가 있어....... 근데 엄마 어디 아파?”
“......아니다. 너는 왜?”
“그게.......”
동기가 이란의 곁에 앉아 얘길 꺼내려는데 미림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걔 만났어? 어, 오빠 와 있었네?”
“엄마 누구 만나러 갔다 왔어?”
동기의 말에 미림은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말했다.
“어, 아까 회사에 누구 좀 만나러....... 근데 오빤 여기서 뭐 해?”
미림이 묻자, 그제야 제가 왜 이 방에 들어왔는지 기억났다는 듯 이란을 보았다.
“맞다! 엄마, 내가 오늘 회사에서 누굴 봤는지 알아?”
“너 오늘 회사 나갔어? 쉬는 날인데 무슨 회사를 나가?”
“내가 또 회사를 가 줘야지 일이 돌아가지.”
“......지랄한다. 평일에 할 일 있을 때도 술 퍼먹고 나가 보지도 않는 게 무슨.”
이란의 말에 동기가 얼굴을 찡그렸다.
“아, 엄마는 맨날.......”
“엄마가 뭐 틀린 말 했어? 그건 됐고, 오빠가 누굴 봤는데?”
“어 참, 그 얘기 하려고 했지. 내가 누굴 봤는지 알면 엄마 기절할걸?”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고 나가. 엄마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으니까.”
미림과 동기가 떠드는 소리에 이란이 심란하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은주!”
“......뭐?”
“뭐라고? 오빠도 봤단 말이야?”
심드렁하던 이란과 미림 모두가 동기를 보며 소리를 꽥 질렀다.
“어 씨...... 깜짝이야. 뭐야, 그럼...... 걔가 지, 진짜 은주라는 말이야?”
“오빤! 말이 돼? 은주 언니 죽은 지가 언젠데.......”
“그치? 진짜 많이 닮았던데....... 근데 강진이도 봤거든? 웃긴 게 걔가 막 성질을 부리면서 그 여자애 손목을 이렇게, 이렇게 탁 잡고 끌고 나가던데?”
동기는 강진이 했던 것처럼 미림의 손목을 잡고 시범을 보였다.
“.......”
“내가 뭐 어떻게 한 댔나....... 새끼가 사람을 양아치 보듯 노려보고 말이야.”
미림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머머, 웬일이냐를 연발했다.
“근데 엄마, 걔가 그러더라? 내가 누구야, 얘? 하니까...... 내 여자. 딱 이러고 가더라?”
“세상에, 와.......”
“으음.......”
이란이 눈을 감고 주먹을 꽉 쥐었다.
동기의 말을 들으니 더욱 이란이 계획했던 일이 점점 흐릿해지는 듯했다.
***
“그럼 쉬......세요.”
“.......”
집으로 돌아온 지음은 자신을 따라붙는 강진의 시선을 피해 서둘러 욕실로 들어갔다.
욕실 문을 닫고 나서야 심호흡을 했다.
“그냥...... 계약으로 인해 같이 사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지음이 문에서 몸을 떼고 손부채질을 했다.
“모르겠다. 얼른 찬물로 샤워하고 정신 차리자, 한지음!”
찢어진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되도록 강진의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지음은 조금 차가울 정도의 물로 샤워를 했다.
당황스러운 일들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지음의 인생에서 그리 큰 이벤트도 아니었다.
지음이 샤워를 마치고 타올로 몸을 감싸는데.......
“아...... 옷을.......”
안 가지고 들어왔네.
지음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찢어진 원피스를 보며 인상을 썼다.
물에 다 젖은 데다 땀에도 젖어 있는 옷이었고, 그걸 도로 주워입을 순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음이 타올을 꽉 붙들고 옷을 팔에 걸쳤다.
그냥, 방으로 날아가듯 들어가면 될 거 같았다. 강진 역시 씻고 있을 테니까.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문을 열고 둘러보는데 다행히 거실에 강진은 없었다.
“다행......이다.”
강진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지음이 얼른 욕실 문을 닫고 거실로 나왔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지음은 입을 떡 벌리고 굳은 듯 멈춰 섰다.
“.......”
분명 거실엔 없었는데.......
그는 바지만 입은 채로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아...... 맥주.......’
눈을 마주친 지음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옷을...... 두고 와서....... 그럼.”
강진이 냉장고 문을 닫고 나서도 그녀를 보고 서 있자, 지음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타올 위로 드러난 그녀의 맨살에 쏟아지는 강진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천천히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지음은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잠깐.”
“.......”
“이리 와 봐.”
강진의 나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매끈한 발목을 붙들었다.
돌아보니 강진은 테이블 위에 맥주를 내려놓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지음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아프진 않아?”
“네?”
강진은 그의 물음에 어리둥절한 지음을 보다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아까와는 달리 부드럽게.......
지음은 소파에 앉느라 허벅지까지 밀려 올라가며 벌어지는 타올을 손으로 얼른 움켜잡았다.
“.......”
강진은 수많은 할 말을 꾹 눌러 참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잠시 지켜보다가 일어섰다. 가서 구급상자를 가져와 그녀를 마주하고 테이블 위에 앉았다.
이상하게 강진의 눈빛에 형형한 빛이 도는 것도 같고. 지음은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시선을 살짝 피했는데, 강진이 소독약 적신 솜으로 그녀의 어깨 상처를 꾹꾹 눌렀다.
“......고마......워요.”
“다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
지음은 마음이 이상해졌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맙고, 기분이 좋았고...... 그래서 울컥해졌다.
“응?”
그녀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강진이 다시 한번 물었다. 지음은 터질뻔한 울음을 꾹 삼키고 간신히 대답했다.
“......그럴게요.”
강진은 그제야 지음의 어깨 위, 실낱같은 붉은 줄 위에 밴드를 붙였다.
어색했다. 겨우 이 정도 상처로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는 게.......
“한지음. 나 좀 봐.”
“.......”
지음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강진의 잘생긴 얼굴이 그녀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무겁고도 야릇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지음이 어쩌질 못하고 있다가 일어나려는데 강진의 얼굴이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의 입술이, 지음의 다른 쪽 어깨에 닿았다.
“읏!”
지음은 어깨 위에 닿는 그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움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