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지음은 심호흡을 하고 어깨에서 손을 떼 보았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느끼지 못했는데 손톱으로 긁은 건지 어깨에 벌건 자국이 죽 그어져 있었다.
“하아.......”
욱신거리긴 했지만 아픈 건 참을 수 있었다. 지음이 속상한 건 옷이 다 망가졌다는 거.
강진이 예쁘다고 했던 흰색의 원피스가 볼품없이 찢어져 있었다. 찢어진 원피스는 앞뒤로 늘어져 어깨를 다 드러내고 있었다.
‘어쩌지.......’
옷이 좀 망가졌다고 강진이 지음을 나무라진 않겠지만 이런 꼴로 돌아다닐 순 없었다. 예쁘다는 옷을 망가뜨린 것도 속상했고.
집에 가야 하는 건가, 아니면 강진을 기다려야 하는 건가.......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며 고민하던 지음이 뭔가 결심한 듯 손을 올렸다. 찢겨 늘어진 옷자락을 붙들고 어깨에 꽉 묶었다.
묶은 쪽의 옷이 슬쩍 올라가긴 했지만 다행히 그리 티가 나지 않았고 볼만 했다.
티켓 한 장을 내려놓고 전시실로 향했다.
[사랑과 이별, 그리고 여름]
크게 세워둔 푯말엔 지음처럼 흰색의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모자를 쓴 채 언덕에 서서 여름의 바람을 맞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음은 아무도 없는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강진의 말처럼 어렵고 난해한 그림 전시회가 아니었다.
제1 전시실로 들어서자 바로 왼편으로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책장 선반이 있었는데, 그 선반 위엔 지음도 예전에 스치며 본 적이 있던 순정만화 그림이 놓여 있었다.
한쪽으로는 아로마 향초가 자리하고 있었고, 각양각색의 작은 패널이 죽 늘어져 있었다.
그 옆으로는 커다란 스크린에서는 연신 순정만화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천천히 다음 장면으로 바뀌었다.
시선을 뺏긴 지음이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스크린 옆으로 책장 위에 순정만화 책들이 꽂혀있는 걸 보았다.
얼마나 가지런히 놓여 있는지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두어 걸음을 걷다 보니 연한 우드색의 벽면에 위에선 햇살 조명을 쏘아주고 있었는데, 그곳엔 연인들의 포옹과 키스 장면이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
지금까지 살면서 지음은 남녀가 서로를 안아주는 행위가 이토록 눈이 부신 장면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눈을 감고 온전히 서로를 느끼는 만화 주인공들이 부러웠다.
괜히 마음이 나약해질까 봐 얼른 그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벽 한 면을 전부 반투명 유리로 해 둔 그곳엔 둥글거나 네모난 패널을 붙여 놓았는데, 전시회의 주제에 맞게 사랑과 이별에 대한 글귀를 모아둔 듯했다.
지음은 걸음을 떼지 못하고 그곳에 서서 글을 읽었다.
[나는 너를 기다린다
바람 부는 언덕 끝에 서서
네 머리칼 한 올 보일까 하여
내 가녀린 손목을 놓던 그 골목 가로등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무도 기다리라고 하지 않았다
가장 늦도록 남아있던
네 뒷모습 그림자조차
아무런 약속도 주질 않았다
그림자가 길어져
네가 망설이는 줄 알았다
널 잃고 어두워
가로등 불빛이 있는 줄도 모르고
홀로 된 날 위로하느라
그 불빛이
네 그림자를 마지막까지
붙들어 둔 줄도 모르고
나는 너를 기다린다
눈물 한 방울도 없는
우리 이별을 안타까워하던
그 밤, 그 골목, 그 불빛을 위해]
이런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 걸까.
지음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한동안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
동기는 사무실 소파에서 일어나며 배를 문질렀다.
“아우, 속 쓰려.......”
어제 클럽에서 술을 얼마나 마신 걸까.
동기가 부스스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쓸어내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뭐야...... 사무실 아냐? 일도 안 하면서 술만 마시면 꼭 여기에 와서 자네. 아, 허리 아파 씨.......”
그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누웠던 반대쪽 소파 위에 웬 여자가 옆으로 누워있었다.
“......뭐, 뭐야? 누구야?”
여자를 보고 멈칫하던 동기가 그녀의 옷을 훑어보았다. 짧은 스커트에 속이 다 비치는 얇은 블라우스가 치마에서 다 빠져 있었다. 까만 생머리를 소파 아래로 늘어뜨리고 S 자로 잘 빠진 몸매를 자랑하며 누워있었다.
광란의 밤을 보낸 건 동기뿐이 아니었나보다.
“민......유린? ......야, 일어나봐.”
몇 달 전 동기가 자주 다니는 클럽에서 만난 여자였다.
성격도 괜찮고 외모는 예쁜 편에 속하기에 동기는 그녀를 가끔 만나고 있었다. 어제도 함께 술을 마시고는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동기는 발에 걸리는 술병을 옆으로 밀며 비틀거리다가 유린에게 다가갔다.
“야, 민유린.”
“으응.......”
유린의 어깨를 흔들자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머리가 아픈지 동기가 유린의 엉덩이를 밀고 옆에 앉아 인상을 썼다.
“일어나봐. 해장하러 가자. 속 쓰려 미치겠다.”
“아, 오빠.......”
“오빠 같은 소리....... 빨리 일어나 봐. 너까지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하냐?”
“그럼 어떻게 해. 오빠는 이미 술을 떡이 되도록 마셨지, 난 돈도 없고. 호텔도 아니고 여기에 오자고 성환데......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내가...... 여기로 오자고 했어?”
손가락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블라우스를 치마에 넣는 걸 보며 동기는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일단 나가자.”
동기와 건물 밖으로 나가던 유린이 그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오빠, 근데 저기 흰색으로 멋들어지게 올라간 건물은 뭐야? 저것도 오빠 거야?”
“저기? 미술관. 다 내 거지, 아직은 아니지만.”
“어머, 미술관? 전시회 같은 거 하는 곳? 나 한 번도 안 가봤는데 우리 한 번 가 보면 안 돼?”
“뭐? 아 무슨 미술관이야. 해장이나 하러 가자니까.”
하지만 유린은 건물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동기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가자, 오빠. 나 사실 꿈이 화가였단 말이야.”
“화가...... 지랄은. 아후.”
그러면서도 동기는 결국 유린의 성화에 못 이겨 미술관 건물로 들어섰다.
***
지음은 이별에 관한 시를 한참이나 보고 있다가 돌아섰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그러니 이별이란 걸 알 수도 없었지만....... 얼마나 힘이 들면 이런 시를 썼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는데 전시실 입구에서 한 커플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와! 이렇게 생겼구나.”
“......좀 조용히 해라, 전시회 처음 와 본 티 내?”
“뭐 어때, 아무도 없...... 어머, 한 분 계셨네. 죄송해요.”
전시회를 둘러보던 유린이 지음을 보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지음도 무심히 그들 사이를 스쳐 지나가려는데 동기가 걸음을 멈추고 ‘어?’ 소리를 냈다.
그의 반응에 유린이 지음과 동기를 번갈아 보았다.
“왜 그래, 오빠?”
“어, 너, 너......!”
동기가 지음을 보고 손가락질을 하며 놀라는 통에 그들 곁을 지나가려던 지음 역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
그는 지음을 아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굴었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고 한껏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곁에 있던 유린이 그의 팔을 잡아끌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너, 네가 어떠...... 네가 여길 어......떻게? 아니 그보다...... 너 누구......?”
동기는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횡설수설했다.
“......?”
“오빠, 왜? 왜 그러는데? 응? 저기...... 우리 오빠 아는 사람이에요?”
보다 못한 유린이 지음을 보며 물었다.
그럴 리가. 지음이 고개를 저었다.
동기의 표정도, 지켜보는 유린도.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는 지음도 우스꽝스러웠다. 누군가 이 어색하고도 묘한 상황을 끝내줘야 할 텐데.......
그런 생각에 지음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치려는데 누군가 급히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며 지음을 불렀다.
“한지음!”
“......?”
지음을 비롯해 동기와 유린이 동시에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진이 어쩐지 화가 난 사람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뭐야...... 너?”
동기는 지음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던 팔을 강진에게 뻗었다.
강진은 그런 동기의 팔을 툭 쳐내고 지음의 앞에 서서 그녀를 훑어봤다. 그리고 인상을 쓴 채 지음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해?”
“아, 그.......”
지음은 뒤쪽 전시실을 슬쩍 바라보았다. 전시를 둘러보고 있었어요, 말하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머뭇거리는데 강진이 눈썹을 찡그렸다.
그의 시선이 지음의 어깨, 뜯어진 원피스로 묶어둔 곳을 보고 있었다.
“.......”
당황한 지음이 손을 올려 묶은 옷과 어깨를 가려봤지만, 강진의 어두운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고모님...... 오셨던데.」
「무슨 말이야?」
「고모님하고 지음이...... 만났어, 요 앞에서.」
정후의 말에 두 번 묻지도 않고 지음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지음을 찾아 전시회로 왔는데.......
강진은 동기의 시선이 지음에게 향해 있는 게 싫어서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지음이 힘없이 강진의 곁으로 끌려갔다.
강진은 지음을 제 뒤로 두고 동기를 내려다봤다.
“왜...... 뭐 할 말 있습니까?”
“어? 아니, 뭐....... 근데 누구야?”
동기가 강진의 뒤에 숨은 지음을 향해 턱짓을 했다.
순간 강진의 짙은 눈썹이 꿈틀, 기분 나쁘게 움직였다.
“내...... 여자.”
“......뭐?”
동기가 놀라는 얼굴을 확인한 강진이 지음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전시실 밖으로 나갔다.
동기는 강진과 그의 여자라는 지음이 나가는 걸 보며 멍하게 서 있었다.
“존나...... 놀랐네.”
“치. 오빠 뭐야, 대체....... 얼른 가요.”
유린이 강진을 힐끔거리며 동기의 팔에 매달렸다.
동기는 유린과 전시실로 들어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오빠, 왜?”
“......은주......인 줄 알았네.”
“은주? 그게 누군데?”
유린의 말에 동기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몰라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