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엄마, 나 왔어.”
마사지샵을 다녀온 미림이 집으로 들어서며 소리를 높였다.
거실로 들어서는데 코를 자극할 만한 음식 냄새 따위도 없었고,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도 없었다.
“뭐야......? 시간 아직 멀었나?”
미림은 이란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엄마, 준비 안 해? 아줌마는?”
“어, 왔니?”
“응. 근데 왜 집에서 아무런 음식 냄새가 안 나? 나 배고픈데.”
손님맞이로 부산스럽게 준비하고 있어야 할 이란이 태연하게 화장을 하고 있었다. 미림이 얼른 이란의 곁으로 가 앉았다.
이란이 화장품을 내려놓고 미림을 보며 돌아앉았다.
“미림이 너, 다시 제대로 말해봐. 강진이가 데려오겠다는 그 여자, 회사에서 본 거 확실해?”
“엄만. 대체 같은 얘길 몇 번을 하게 해? 회사에서 본 게 아니라 회사 직원이라니까!”
이란의 말에 미림이 또 그 소리냐, 짜증을 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근데 강진 오빠는? 아직 안 왔어?”
“......회사를 좀 가 봐야겠다.”
“회사? 무슨 회사?”
이란이 몸을 일으키자 미림도 엉거주춤 엉덩이를 의자에서 뗐다.
“너 오늘 그 직원한테 연락 좀 해 봐.”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엄마. 오늘 걔 강진 오빠랑 같이 집으로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이란은 미림이 졸졸 쫓아다니며 묻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았다. 옷장에서 옷을 꺼내 입고 액세서리를 착용했다.
“강진이 회사에 일이 생겼대.”
“일? 무슨 일?”
“그것까진 알 거 없고...... 그 직원한테 전화해서 회사에 뭐...... 서류 아무거나 좀 정리해 두라고 해 봐.”
“응? 왜?”
미림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글쎄, 시키는 대로 해. 뭐든 그 여자애한테 시킬 일을 좀 만들어봐.”
“......왜? 엄마......, 회사 나가보려고? 지음이 걔 만나러?”
이란이 꼬치꼬치 캐묻는 미림에게 휴대전화를 가져다 안겼다.
“그만 묻고 시키는 대로나 해, 얼른.”
“......알았어.”
미림은 이란의 성화에 못 이겨 지음에게 전화를 걸었다.
***
지음은 오랜만에 홀로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게 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냥 집에 멍하니 앉아 있었는데.......
「......금방 갈게. 같이 전시회도 보고 밥 먹자.」
「네, 그럴게요.」
지음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휴대전화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손을 가슴에 얹었다. 두근두근, 손끝에 지음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조금 어색했지만 원피스를 입고 목걸이와 반지까지 그대로 한 채로 집 밖을 나섰다.
회사로 향하는 버스에 막 올라타는데 미림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한지음 씨?
“네.”
-오늘 못 온다며? 왜? 아니, 안 바쁜 사람이 있어? 일방적으로 약속 정한 것도 부족해서 그 약속을 이렇게 깨나?
“......죄송합니다.”
오늘의 약속은 강진이 잡았고 회사 일 때문에 강진이 취소한 거지만 지음은 제가 대신 사과했다.
-그래서 지금 어딘데?
“네?”
-지금 집이야?
버스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았다. 지음은 얼른 손을 뻗어 쇳내가 나는 손잡이를 붙잡았다. 손가락이 하얗게 질리도록 꽉.
“......아뇨. 밖이에요.”
-그래? 아...... 주말이라 좀 미안하긴 한데, 회사에 가서 내 심부름 하나 해 줄 수 있을까? 뭐 어차피 약속도 취소했으니 시간은 괜찮지 않아?
“네, 그러겠습니다.”
지음의 대답에 저쪽에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미림 혼자서만 있는 게 아닌지 누군가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바로?
“네?”
-안 귀찮냐고.
“네, 괜찮아요. 지금 가는 길이에요.”
-뭐? 어디...... 회사에?
“네. 제가 해 드릴 일이 뭐예요?”
지음이 괜찮다는 듯 물었지만, 미림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화는 끊기지 않았지만, 저편에서는 누군가와 한참 얘기를 나눴다.
“여보......세요? 선배님?”
띠릭. 대답도 없이 전화는 그냥 끊겼다.
지음은 이미 꺼진 휴대전화 화면을 보다가 이내 가방 안에 넣었다.
도로엔 차가 많아서 평소 같으면 금방 도착했을 텐데, 이십여 분을 더 가서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였다.
회사 건물을 한 번 올려다보고 들어가려는데, 검은색 세단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
지음이 두어 발자국만 더 내디뎠다면 차에 부딪혔을지도 모른다. 상황이 아찔해서 잠시 멈칫하고 숨을 골랐다. 차에서 누군가 내리는 게 보였지만 너무 놀라 차를 피해 걸었다. 누구든 지음이 아는 사람은 아닐 테니까.
차의 주인은 집에서 미림이 지음과 통화하는 걸 듣고 강진의 회사로 출발한 이란이었다.
지음을 만난 적은 없지만 주말이라 회사엔 아무도 없을 테니까 불러만 내면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미림의 말에 의하면 볼 것도 없는 집구석이라니까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이란은 갑자기 뛰어드는 웬 여자에게 눈을 흘기고 차에서 내렸는데, 저를 스쳐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은......주?”
흰색의 원피스, 뽀얀 목에 잘 어울리는 목걸이를 하고 회사로 향하는 여자.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이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구불구불 갈색의 머리카락을 뒤로 늘어뜨린 것도, 뽀얀 피부로 무표정하게 걷는 것도. 하얀 원피스가 눈부시게 잘 어울리는 것도...... 무엇보다 작고 깨끗한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이목구비도 분명...... 은주였다.
‘으, 은주는...... 이미 죽었는데?’
“사모님, 괜찮으십니까?”
이란이 비틀거리면서 차를 짚고 서자, 정 비서가 얼른 내려 그녀를 부축했다.
“......됐어. 괜찮아.”
이란이 정 비서의 팔을 뿌리치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호흡을 하고 멀어지는 그녀를 향해 걸었다.
“거기!”
손짓을 해 봤지만 듣지 못했는지 여자는 앞으로 걸었다.
“이봐요, 거기 앞에! 잠깐 서 봐요!”
지음은 제 뒤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게 저를 부르는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서울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불릴 만한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뒤에서 나는 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거라는 걸 알게 됐다.
“야! 앞에 흰색 원피스! 거기 서 보라니까?”
“......?”
흰색 원피스....... 지음은 그제야 제 옷을 훑어보고 천천히 멈춰 서는데, 뒤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녀의 어깨, 아슬아슬하게 얇은 천으로 덧대놓은 원피스를 꽉 잡고 잡아채듯 지음의 몸을 돌렸다.
“......아!”
그 힘이 얼마나 센지 찌익, 원피스의 이음새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음의 몸은 넘어질 듯 휘청이며 휙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일을 당한 건 지음인데, 그녀를 본 웬 중년 여자가 얼굴이 시퍼렇게 질려서 비틀거리는 게 아닌가.
지음은 흘러내리려는 원피스의 어깨 옷자락을 꽉 잡고 그녀를 보았다.
“대체 무슨.......”
“너, 너...... 누구야!”
중년의 여자가 지음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네?”
누군지도 모르고 남의 옷을 찢어놨으면 미안하다고 하는 게 먼저가 아닌가.
눈 감으면 코 베간다는 얘기도 다 옛말이라고 하더니, 서울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이런 짓을 하는 모양이었다.
지음이 휘청이던 다리에 힘을 주어 서서 그녀를 보았다.
“너...... 누구냐고!”
“.......”
모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반말로 소리를 지르면 뭐라고 답을 해야 하는 걸까.
지음이 잠시 멍하게 서 있는데, 뒤에서 그녀가 아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 지음아, 왔어?”
“.......”
돌아보니 정후였다.
정후가 지음을 향해 웃으며 다가오다가 그녀의 앞에 표독스러운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여자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어, 고모님.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정후구나.”
‘고모님......?’
정후와 여자의 대화를 들으며 지음은 그가 고모님이라고 부를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길게 생각할 틈이 없었다. 여자가 지음의 코앞에 대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를 높였으니까.
“어떻...... 어떻게 된 거야? 이 애?”
“아, 그게.......”
정후가 살짝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여자와 지음을 번갈아 보았다.
“이쪽은...... 대표님이 결혼하기로 한 상대, 한지음 씨입니다. 지음아, 여긴 대표님 고모님이셔.”
“......뭐라고?”
정후의 소개에 이란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지음은 어깨를 부여잡은 채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가볍게 인사를 했다.
이란이 지음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자, 정후가 품에서 전시회 티켓을 꺼내 지음에게 건넸다.
“지음아, 일단...... 이거 가지고 가 있어.”
“......네.”
지음이 이란에게 다시 꾸벅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멀어지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야! 어디가!”
“고모님, 저랑...... 얘기하시죠.”
정후는 얼른 이란의 몸을 막아서며 지음을 힐끗 돌아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녀의 작은 손이 어깨끈을 부여잡고 멀어지고 있었다.
“아이고, 머리야......! 아이고 두야!”
“어어, 괜찮으세요?”
이란이 바닥으로 주저앉으며 이마를 짚었다. 정후가 얼른 지음에게서 시선을 떼고 이란을 부축했다.
뒤에서 둘이 그러고 있는 건 알지 못한 채로 지음 역시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천천히 미술관으로 향했다.
지음은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좌측으로 보이는 화장실로 들어가 숨을 골랐다.
“하아, 하.......”
거울을 보니 강진이 예쁘다고 했던 흰색의 원피스 어깨가 죽 찢어져 엉망이 되어 있었다. 얼마나 센 힘으로 움켜잡은 건지 어깨에도 손톱자국이 길게 나 있었다.
곱게 휜 그녀의 눈썹이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