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누군가와 통화를 한 희라는 팔을 툭 떨어뜨렸다. 휴대전화를 쥐고 있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와 긴급하게 통화를 한 상대는 강진 말고도 또 있었다. 이를테면 차이란.......
이란이 휴대전화를 화장대 위에 집어 던지듯 놓고 코웃음을 쳤다.
“어딜 감히....... 내가 아직 허락도 하기 전인데 어딜 온다는 거야?”
그녀가 건조한 손에 여유롭게 크림을 바르고 몸을 일으켰다.
거실로 나가니 차동구가 인상을 쓰며 강진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손은 허리에 얹은 채로 그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뭐?”
이란은 조심스레 동구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했다는 거야? 이런 쯧쯧....... 너답지 않게 확인을 안 했어?”
“아버지, 흥분하지 마시고.......”
이란이 얼른 물잔을 내밀었다.
동구는 두툼한 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지르다가 이란이 내민 물잔을 받아들었다.
“그래. 그렇다면 어쩔 수야 없지만...... 그럼 대체 언제나 데려올 거야? 이 할애비 세상 뜨고 나면 데려올래?”
-그런 말씀 마세요. 조만간 다시 시간 잡아보겠습니다.
“으음....... 정 네 놈이 바쁘면 내가 가 봐도 되고.”
-아닙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인데 제가 찾아뵈어야죠.
중요한 회사 일이라니 어쩔 도리가 없어서 한발 물러나긴 했지만, 동구는 영 기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이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아버지, 좀 앉으세요. 또 이러다 혈압 오르실까 걱정이에요.”
이란의 권유에 동구가 마지못해 소파에 몸을 기댔다.
“무슨 일이에요? 강진인 거 같은데 왜 안 오고 전활 했어요?”
“......못 온단다.”
“네? 아니, 왜요? 이렇게 사람들 다 불러 모아 준비까지 하게 해 놓고?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있는 거예요?”
이란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동구를 보며 말했다.
“프랑스 계약 관련이라니까...... 급한 일인가 보다.”
“프랑스 건이면 어쩔 수 없죠. 아버지, 어차피 뭐...... 그 여자 아직 본 것도 아니고 그냥 강진이와 만날 뿐인 사이잖아요.”
“......?”
이란의 말에 동구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녈 보았다.
이란이 동구의 팔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니 뭐, 아직 저나 아버지가 본 것도 아니고...... 또 젊은 애들 만나다가 헤어질 수도 있고.”
“이제 시작하는 애들을 두고!”
동구는 강진이 만나겠다는 여자가 생긴 것만으로도 좋아서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죠. 예전하고 달라요, 아버지. 그래서 말인데.......”
“무슨 말을 하려고, 또.”
“희라 말이에요.”
“.......”
“희라에게도 기회를 좀 줘보는 건 어때요?”
“강진이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잖아. 놔둬 봐. 잘 만나고 있는데 희라니 누구니 갖다 붙이지 말고. 그나저나 어디에 사는지 말해달라고 해도 그렇게 말을 안 하네.”
“제가 좀 알아볼까요, 아버지?”
“네가? 어떻게?”
이란은 희라를 들이미는 타이밍을 놓친 게 내심 아쉽고 화딱지가 난 참이었다. 동구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더구나 미림이 고게 강진의 집 앞에서 본 적이 있다니까....... 집이나 회사나...... 강진이한테 한번 찾아가 보면 무슨 방법이 있지 않겠어?’
이란이 입술을 삐죽이고 앉아 있자, 동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가 뭘 하든 상관없지만 강진이 건드려서 만약에 그놈...... 결혼한다는 거 어그러지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둔다. 으흠!”
“아버지도 참.......”
이란이 동구를 따라 일어나며 말끝을 흐렸다.
동구가 못 미더운 표정으로 이란을 보다가 방으로 들어갔다.
이란은 혼자 거실에 남아 있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제 방으로 향했다.
“못 오지, 암. 그동안 프랑스와 제휴 맺으려고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이 얼만데.”
그녀가 화장대에 던져둔 휴대전화를 도로 집어 들고 네일아트를 받은 긴 손톱으로 토토토독 메시지를 보냈다.
[강진이는 못 온다고 연락 왔다. 고생했어.]
그러고 나서야 상쾌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주방으로 향했다. 지음인가 뭔가 하는 여자애를 위해 준비하려던 음식은 다 집어치우라고 얘기도 해야 했으니까.
“아줌마! 오늘은 국물 시원하게 내서 콩국수 좀 해봐요.”
이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피었다.
***
강진은 회사 사무실로 향하면서 신경질적으로 넥타이를 풀었다.
“대표님!”
강진을 기다리고 있던 희라가 그를 보고 얼른 다가섰다.
오늘은 주말이라 그녀 역시 쉬는 날이었지만, 동시에 중요한 계약 서류를 누락한 책임자이기도 했다.
강진이 지음과 함께 집을 나서려 할 때 전화를 한 것도 희라였다. 그리고 강진과의 전화가 끝난 후 이란과 연락한 것도 그녀였고.
굳은 얼굴도 잘생겼다고 생각하면서 희라는 사무실로 향하는 강진의 옆에서 따라 걸었다.
“제가...... 잘 챙겨서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딜 간 건지 모르겠어요. 오늘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어 확인을 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강진은 희라의 말을 툭 잘랐다.
“어제까지 아니었나?”
“맞습니다.”
“오늘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고? 김 실장님, 일을 예감으로 하십니까?”
“.......”
강진이 반쯤 풀어진 넥타이를 아예 풀어 손에 쥐었다.
“기획팀 직원이라고는 실장님과 박미림 씨뿐인데. 내가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죄송합니다, 대표님.”
강진의 싸늘한 목소리에 희라가 변명할 생각도 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확인했어야 했는데...... 실장님을 믿고 맡긴 게 잘못이군요.”
“.......”
입에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야 했고, 눈도 마주치지 못할 정도여야 했지만...... 희라는 별로 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슬쩍 고개를 들어 강진의 얼굴을 살폈다.
강진은 오래도록 준비했던 일이 어그러지기라도 할까 봐, 온통 일 생각뿐이라 희라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때문에 그녀가 이상하다는 것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서류 가져오세요. 내가 전화해서 설명할 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희라가 꾸벅 고갤 숙이고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강진은 책상을 짚고 한숨을 쉬었다.
“내가 했어야 했는데....... 차강진, 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냐.”
강진은 요새 그가 정신을 팔고 있는 상대, 지음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자리에 앉아 일정을 확인하던 그의 눈에 책상 저 구석에 밀어두었던 미술 전시회 티켓이 들어왔다.
“.......”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한참 고민을 하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오늘의 약속이 딱히 지음에게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강진의 가족을 보는 일이긴 하지만...... 어차피 둘 사이는 계약으로 묶인 가벼운 관계이고. 1년 계약이 종료되면 다신 보지 않을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음은 강진의 차가 멀어지는 걸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
강진은 달랐다. 계약서에 따르자면 그의 가족과 다르지 않아야 하고, 그 역시 1년간 지음을 스쳐 가는 사람일 뿐이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휴.”
강진의 차가 까만 점으로 사라지고 나자, 지음이 참았던 숨을 내쉬며 집으로 올라갔다.
예전 같으면 주말이고 평일이고 할 거 없이 일을 했으니,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평일에는 8시간만 일하면 됐고, 그 이후와 주말엔 마음껏 쉴 수 있었다. 지음에겐 매우 어색한 일이었다.
“......어떻게 하는 거지.”
쉬는 거라는 건.
지음이 텅 빈 거실을 둘러보며 혼잣말을 했다.
강진이 집에 있을 때는 이렇게 휑하고 허전한 것 같지 않았는데, 그녀 혼자 둘러보는 집은...... 너무 크고 고요했다.
계약이 끝나고 나면 받을 돈으로 지음도 집을 구입할 생각이지만, 그때가 되더라도 이렇게 큰 집은 절대 구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다.
옷을 갈아입으려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지음은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거울을 보았다.
그러다 가볍게 화장한 얼굴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얼마 만에 화장이라는 걸 했는지 모른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을 뒤로 한껏 늘어뜨리고, 옷도 예쁘게 입었는데.......
지음이 옷을 내려다봤다.
“아깝다.......”
그래도 급한 일이 있다는데 어쩌겠나 싶은 생각에 일어나서 옷을 벗으려는데 강진에게 전화가 왔다.
-나야.
“네. 회사는...... 잘 갔어요?”
-어, 지금 수습하고 있는 중이야. 뭐 하고 있었어?
지음이 도로 자리에 앉아 거울을 보았다. 거울을 보고 있었다고 말하기는 좀 그렇고.......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그냥...... 있었어요.”
-서류 문제만 해결하면 될 거 같아. 늦지 않게 마무리될 거 같은데.
“네, 다행이네요.”
-잠깐 미술관에 나와서 기다릴래?
“미술......관이요?”
-어. 오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여름]이라는 전시회가 있어.
지음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전...... 미술 잘 몰라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만화 작가들이 모여서 만든 전시회라서 볼 만할 거야.
“.......”
미술관 전시회라는 건 어떤 걸까. 그것도 사랑과 이별이라니.......
지음은 강진의 목소릴 들으며 작은 기대감 같은 게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와서 보고 있으면 마치고 갈게. 같이 밥 먹자.
“......네, 그럴게요.”
가고 싶었다. 미술관도 전시회도 궁금했고, 사랑과 이별이라는 주제도. 그리고...... 강진과 뭔가를 함께 하는 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뭔가를 하고 싶고, 보고 싶고, 어쩌고 싶다는 욕망을 모르고 살아왔는데.
-그래. 정후 보낼 테니 같이 와.
“그냥 저...... 혼자 갈게요. 그게 편해요.”
-그럴래? 그럼 조심히 와.
“네.”
전화를 끊은 지음은 심장이 두근거려 어쩔 줄을 몰랐다. 볼도 발그레 붉어지는 것도 같고.
손발이 간질간질한 게...... 이게 대체 무슨 느낌일까. 봄날의 바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지음이 훗, 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