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5/94)

#14화.

‘어떻게 밥을 먹는지 모르겠네.’

지음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는 옛말을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다.

희라와 미림이 뭐라 반박할 틈도 없이 강진이 지음을 소개하고 못을 박았으니. 안 그래도 고요한 레스토랑에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식사 시간이 끝나자, 강진이 소화도 시킬 겸 근처로 드라이브를 하자고 제안했다.

갑작스러운 소개가 당황스럽고 걱정되기도 했고, 고맙기도 했다. 그런 마음을 담아 지음이 운전을 하고 있는 강진을 힐끔거리자, 그가 팔을 창에 올린 채 그녀를 슬쩍 돌아봤다.

“왜?”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음은 훔쳐보다 들키기라도 한 듯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밖으론 차들이 휙휙 지나가고 있었다.

“걱정 마.”

“.......”

강진의 목소리가 차 안에 꽈악...... 차는 느낌. 그 부드럽고 깊고 울림이 있는 목소리.

지음은 고개를 다시 그를 향해 돌릴 수밖에 없었다. 차 시트에 기대 듣는 그의 목소리는 안정감을 줄 만큼이나 좋았다.

“신경도 쓰지 말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란 것뿐이에요.”

“너무 늦은 거지. 당신이 온 지가 언젠데. 처음 회사에 들어온 날, 내가 미리 얘기했어야 했어.”

지음은 긴 속눈썹이 매달린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강진의 옆모습을 바라보는 게 참 좋았다. 눈이 깜빡이는 순간 그의 모습이 지워지는 게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다 포크가 떠올라 지음이 아, 입을 열었다.

“아까 포크...... 고마워요.”

“포크?”

“......아무것도 아녜요.”

강진이 되묻자 지음은 괜히 혼자 호들갑을 떤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저었다.

그가 하필이면 지음이 집어 든 포크를 들고, 다른 포크는 저 옆으로 치워두고 그 포크로 이것저것 다 먹으면서 사색이 되는 희라와 미림을 보고 ‘왜 그러냐.’ 했던 게 설마...... 자신 때문일까.

‘그냥...... 그런 거추장스러운 예의 따위가 귀찮았던 거겠지.’

지음이 소란스러운 마음을 다잡고 시선을 돌려 창밖을 보는데, 강진이 슬쩍 그녀를 보았다.

그녀를 보는 강진의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포크라....... 그게 뭐라고.

포크가 여러 개가 나오는 이유 역시 밥을 편히 먹기 위해서일 텐데. 분명 희라와 미림은 지음이 용법에 맞지 않는 포크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무안을 주고 핀잔을 줬을 거다.

강진은 희라와 미림이 색안경을 끼고 지음을 보는 시선을 차단해주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지음이 고맙다고 느꼈다면 강진이 잘했다는 얘기가 된다. 뭐가 됐든.

기분이 썩 괜찮았다.

그가 미소를 지은 채로 물었다.

“아, 집에도 인사해야 하는데. 이번 주말 어때?”

***

희라와 미림은 정후와 회사로 가는 내내, 사무실로 들어갈 때까지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 들어가십시요, 들.”

정후가 사라지고 나자,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터덜거리며 자리로 돌아갔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가 없었다. 멍하게 모니터를 노려보던 희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순간 미림 역시도 거의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미림 씨!”

“실장님!”

희라가 숨을 훅 들이켜며 손짓을 했다.

“옥상으로, 고?”

“고!”

두 여자가 자리를 박차고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두터운 철문을 밀어버리며 희라가 식식거렸다. 그 뒤로 잔뜩 인상을 쓴 미림도 따라 나왔다.

희라는 힐을 신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다 다리로 저릿하게 통증이 올라오는지 손으로 종아리를 주무르며 악을 썼다.

“악! 이게...... 이게, 말이 돼?”

“안 되지, 안 돼! 언니 진짜...... 너무 화가 나요.”

“하.......”

희라가 손을 허리에 올려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결혼할 여자라니. 자신이 강진을 얼마나 오랫동안 지켜보고 바라봤는데.

미림이라고 갑자기 나타난 한지음이라는, 저보다 한참 모자란 여자를 강진의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게 쉬울 리 없었다.

“대체 어디서 여자를 골라도 어떻게....... 강진 오빠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

미림의 말을 들으며 희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짓씹었다.

삽십 년이 넘도록 강진 곁에 있는 여자라고는 가족인 고모 차이란과 그녀의 딸 박미림, 그 둘뿐이었다. 거기에 친구라는 명분으로 그나마 말이라도 걸 수 있었던 희라 외에는 없었는데.......

희라가 인상을 썼다.

“그동안 뭐...... 별다른 낌새 없었어? 누굴 만난다거나, 어디서 소개를 받았다거나.......”

“강진 오빠가? 그런 거 전혀 없었어. 그랬으니 집에서도 난리지. 할아버지, 울 엄마까지....... 할아버지는 좋아서 입꼬리가 씰룩거리시고.”

미림의 말을 들으며 희라는 주먹으로 가슴을 쳤다. 그래도 답답함이 가시질 않았다.

“말도 안 돼.......”

“강진 오빠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격 떨어지게.”

“.......”

미림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디서 굴러먹던 애인 줄도 모르는 여자애를.......

희라는 강진의 옆에 앉아 있던 지음의 모습을 떠올리며 아아악, 소리를 질렀다.

순진한 얼굴,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 감히 강진이를 꼬셔?

“......가만 안......둬.”

“언니, 나도 동감이야.”

미림이 희라의 손을 붙잡았다.

“이대론 안 돼. 나는...... 수준도 맞지 않는 어린 계집애를 우리 집에 들일 수 없다고.”

미림의 말에 희라가 그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음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강진이 집으로 인사를 가자던 날이었다.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늦게 간신히 잠이 들었던 지음은 창으로 햇살이 쏟아져 내릴 때까지도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눈이 부셔 반짝 눈을 떴다.

거실로 나서는데 이미 준비를 마쳤는지, 강진은 슈트를 입고 손목 단추를 채우고 있다가 지음을 보았다.

“.......”

“잘 잤어? 업어가도 모르겠던데.”

“아.......”

그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지음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내렸다.

“너무 늦었나요? 빨리...... 준비하고 나올게요.”

“괜찮아. 천천히 해.”

지음은 강진의 시선을 느끼며 얼른 욕실로 들어갔다.

그가 기다릴 거라는 걸 알기에 빨리 준비하고 싶었지만, 샤워를 하고 나와 드레스룸에서도 한참이나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어른을 만나는 어려운 자리엔 나가본 적이 없었으니까.

뭘 입어야 하나 고민하는데 강진의 발소리가 들렸다.

“아, 금방...... 나갈게요.”

“아무거나 입어도 돼. 잘 보여야 할 사람들 아니니까.”

“강진 씨 가족......이잖아요?”

강진이 지음의 시선을 따라 시원해 보이는 흰색의 원피스를 보더니 꺼내 들어 내밀었다.

“내 가족이라도 상관없어. 당신은......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되니까.”

“.......”

그 말에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지음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되었다.

강진이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는 빙그레 웃었다.

지음은 얼른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서 옷을 받아들었다. 손에 닿는 옷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꼭 지음의 마음을 달래주던 강진의 미소처럼.......

그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지음은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엔 강진이 선물했던 목걸이와 반지가 들어 있었다.

지음에게 잘 어울린다고 했던 그의 첫 선물. 손가락으로 문지르다가 반지를 끼고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거실로 나간 강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나한테만...... 잘 보이면 된다고? 무슨 그런 농담을.......’

계약이든 뭐든 간에 분명 강진에게도 기분 좋은 변화가 일고 있었다. 지음이라는 여자로 인해.......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지음이 거실로 나섰다.

거실 가운데 우뚝 서 있는 강진의 뒷모습을 보며 지음이 조용히 손을 가슴이 올려댔다. 손바닥에 쿵쿵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다 됐어요.”

강진이 돌아섰다. 그가 따사로운 주말의 햇살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다가 멈칫했다.

“그거.......”

그의 시선이 지음의 목걸이와 반지에 닿아 있었다. 화사하던 강진의 표정이 어느새 굳어져 갔다.

이상한 걸까. 당황한 지음이 말을 더듬었다.

“아...... 지난번에 강진 씨가 선물해줬던.......”

“.......”

강진은 은주와 닮은 지음에게, 은주가 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목걸이와 반지를 선물로 건넨....... 과거를 떨치지 못한 한때의 치기를 후회했다.

그녀를 보는 순간 칼로 가슴팍을 그어대는 느낌이 일었다. 강진은 차마 그녀를 똑바로 보지 못하고 몸을 비스듬하게 돌려 섰다.

아팠다, 흐른 시간이 얼만데.......

옆으로 돌아섰지만 지음은 강진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한껏 찡그리느라 짙은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이 티 나게 어두워지자 지음이 너무 과했나, 싶었다.

“빼고...... 올까요?”

지음이 강진에게로 한 발 다가서며 물었는데. 꼭 그만큼...... 강진이 지음에게서 멀어졌다. 이번엔 아예 몸을 돌려 등을 보이고 섰다.

더는 그에게 다가설 수 없어서 오도 가도 못 하고 서 있는 그녀에게 강진이 돌아선 채로 입을 열었다.

“......아냐, 예뻐. 나가지.”

“.......”

그가 도망치듯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예쁘다면서 한 번 보아주지도 않고....... 괜히 서운한 마음이 일었다.

지음은 쓸데없이 감정이 흔들리는 자신을 깨닫고, 계약 종료 후 받기로 한 대가만 생각하기로 했다. 얼른 심호흡을 하고 강진을 따라나섰다.

강진의 차로 향하는데, 그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제휴 계약서류가 사라지다니? 오늘 보내기로 한 게 아니었나?”

심각한 목소리, 잔뜩 일그러진 얼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하....... 지금...... 가지.”

강진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끊자, 지음이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무래도 인사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어.”

“아, 그럼...... 얼른 가 보세요.”

“괜찮겠어?”

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강진이 손짓을 했다. 그의 손길에 지음은 조심스럽게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리고 그 순간 강진의 품에 폭 안겼다.

“.......”

“미안해.”

“괜......찮아요.”

그의 품에 안겨 듣는 강진의 목소리.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반응하자, 지음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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